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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리광일 파란만장한 삶의 려정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27일 17시26분    조회:8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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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적 그에겐 야무진 꿈도 있었고 사업에서 그에겐 드높은 열정도 있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보따리는 그의 꿈도 열정도 무시한채 그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싸우도록 핍박했고 결국 그는 예술의 무대에서 주렁진 이야기를 엮어가게 되였다.

꿈을 쫓는 젊은이

1965년 7월 20일 안도현 명월진 홍기가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리광일은 4살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연길로 이주, 태평소학교에서 소학공부를 마치고 한족학교인 7중에 들어가 고중과정까지 마치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학급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했던 그는 특히 음악에 취향이 있어 노래를 잘 불렀던 까닭에 음악시간이면 선생님이 우선 그를 지목하여 부르게 하는 등 싹수를 보여주었다. 학교의 활동모임때마다 기타도 치고 하모니카도 불며 음악에서 재주를 남김없이 자랑해온 그는 운동에도 남다른 흥취가 있어 학교 체육팀의 주력배구선수로 활약하며 학급에서 문체위원의 직책을 짊어지고 늘 선두작용을 해왔다.

고중을 졸업한 뒤 18살 어린 나이에 참군한 그는 가없이 넓은 내몽골초원에서 군인생활의 한페지를 엮었다. 군인생활이란 얼핏 생각하면 아주 랑만적인것 같지만 사실상 힘들기 그지없었다.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겨왔던 리광일로서는 고된 훈련에다 엄격한 규률에 얽매이는 생활이 그렇게 달가울수가 없었다. 하여 도망칠 생각까지 품기도 했으나 “전도를 위해서는 모든것을 달갑게 받아들여라”는 어머님의 간곡한 당부를 명심하고 모든 곤난을 참아가면서 입당까지 한 그는 4년 반이라는 군인생활에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다.  
군인시절 리광일의 유일한 “친구”라면 참군할 당시 가지고갔던 소형록음기였다. 그나마 그때 그에게는 록음테프가 하나뿐이였는데 바로 한국의 남진, 나훈아가 부른 노래를 록음한것이였다. 훈련여가에 리광일은 넓은 초원의 풀밭에 누워 떠가는 구름송이를 바라보며 그 록음기의 노래를 들었고 저녁 잠자리에 들기전에도 늘 그 노래에 도취되군 하였다. 나중에 그의 운동실력과 노래실력을 발견한 부대에서는 그를 각종 모임에 참가시켰는데 해마다 “8.1”건군절이면 그는 낮에 배구경기에 참가하고 저녁이면 사부의 공연에서 노래를 불러 갈채를 받군 하였다.

제대후 조직의 배치에 따라 연길시건설국 원림관리처에서 사업하게 된 리광일은 천성적인 활동가로서의 본색을 남김없이 발휘, 단위에서 륙속 공청단서기, 공회간사, 공회주석, 기관당지부서기 등 직을 맡고 본때있게 사업을 밀고나갔다. 원림관리처에 출근하는 기간 그는 자주 직장내의 문예공연, 운동회 등을 조직하면서 해마다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군 하였다. 그때 이미 그의 노래실력은 전업가수 못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는데 특히 건설국계통문예경연에서는 4중창으로 출연하여 특등상을 받았을뿐만아니라 독창을 불러 당시 운수회사에서 근무하던 황영애가수와 함께 나란히 1등상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되였다. 그것이 기회가 된것일가. 당시 음악보도를 하러 왔던 연변인민방송국의 황상룡선생님이 리광일의 노래실력을 보고는 “한번 방송국에 와서 불러보라”고 권고하는것이였다. 이로써 연변방송의 전파를 타고 리광일의 노래가 알려지게 되였는데 당시 그는 중국가요 《군항의 밤》, 한국가요 《장모님》 등을 불러 청취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후 황상룡선생님에게서 체계적으로 음악리론을 배우는 한편 김창근, 고창모, 성기화, 김정 등 음악계의 유명인사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모를것이 있으면 한밤중에라도 찾아가 지도를 받으면서 노래실력을 한층 제고시킨 리광일은 인차 프로급가수로 인정받게 되였다.

생활의 가혹한 시련앞에서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여가에 각종 활약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굳혀온 리광일도 어느날 문득 미묘한 사랑을 느끼게 되였다. 시정부문건전달회의때마다 만나게 되는 백화공사의 김매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토론회의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것이였다. 하여 휴식시간만 되면 그녀를 불러 가끔 커피도 한잔씩 나누며 사업, 생활, 인생 등에 대해 담론하다가 어느날 문득 사랑을 고백했는데 단마디로 거절당할줄이야. 애모의 마음으로 속썩이는 총각의 마음이야 어떻든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김매처녀도 리광일에게 마음은 있었으나 녀성특유의 신중성을 앞세워 거절한것이였다. 그후 당시 연변의약도매공사에서 재회과장으로 사업하던 처녀의 어머니가 리광일의 직장인 원림관리처의 재회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리광일에 대한 뒤조사를 했는데 대뜸 “해마다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는 훌륭한 젊은이”라는 말을 듣고 동의하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련애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던 청춘남녀는 드디여 1989년 10월 20일에 백년가약을 맺는 혼례식장에 들어서게 되였다.

결혼후 연길시 철남의 한 20평방남짓한 온돌세집에 신혼살림을 차린 리광일도 여느 신혼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신혼초기에는 꿈같이 황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나 인차 궁핍한 생활의 곤혹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부모님들도 풍요롭지 못하다보니 갓 결혼한 아들에게 뭐 하나 변변히 해줄수 없는 상황에서 다달이 월급에만 매달려 세집생활을 하는 리광일로서는 스스로 생활의 곤경을 헤쳐나갈수밖에 없었다. 하여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자신의 장끼를 살려 나이트클럽에 다니며 노래를 부르기로 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안해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칠줄이야. 사실 그때까지만도 나이트클럽이나 가라오케라고 하면 세간에는 오입질하는 장소로 락인이 찍혀있던 까닭에 안해가 강렬하게 반기를 들고나온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게다가 그런 장소에서 노래를 부른다니 마치도 노래를 팔아 살아가는 “창기”같다는게 그때 안해의 생각이였다. 하지만 언제 해탈될지 모르는 생활의 곤혹은 리광일로 하여금 번마다 안해를 요리조리 구슬려놓고 나이트클럽에 나가도록 등을 떠밀었다.

낮에는 출근하고 퇴근후에는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옷을 갈아입고 나이트클럽에 나가며 그렇게 나가서는 자정이나 새벽에 들어설뿐만아니라 그대로 쪽잠을 자고는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안해는 뾰로통해질 때가 많았다. 신혼생활의 단꿈에 빠져있을 시기에 부부간에 얼굴조차 보기 바쁜 일정들이 안해에게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나날이였던것이다. 하지만 사나이로서 한가정의 버팀목이 되여야 한다는 신조를 굳게 간직한 리광일은 그런 안해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나이트클럽에 나가야 했고 그러다 새벽에 들어설 때면 가끔 안해가 좋아하는 단설기를 사다가 옹송그리고 자는 안해의 머리맡에 놓아주군 했다. 그러면 아침에 깨여난 안해는 지난밤의 뾰로통했던 기분을 씻은듯 가시고 단설기를 맛나게 먹군 했다.

나이트클럽이나 무도청에서 노래를 부르다보면 가끔 생각지 않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리광일도 그랬다. 그가 공원무도청에서 노래를 부를 당시 늘 깡패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군 했는데 어느날엔가 녀석들이 또 무도청에서 소란을 피우며 노래반주를 맡은 사람에게 손찌검까지 하는지라 참다못해 나섰다가 맞붙게 되였다. 사실 부대에 있을 때 무술훈련을 받았고 제대후 또 연변대학 태권도관에서 수련을 한적이 있는 리광일에게 건달 두세명은 상대가 아니였다. 하지만 불이 번쩍 나게 3명을 꺼꾸려뜨리고 손을 터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3명을 미처 막지 못한채 머리를 세곳이나 찔리고말았다. 피를 흥건히 흘리며 병원에 갔을 때는 그의 뒤잔등으로부터 발뒤축까지 죄다 머리에서 흐른 피로 질벅했는데 그때 그는 마취주사도 맞지 않고 상처를 기워맸다.

이렇게 리광일이가 집에 붙어있을 사이 없이 팽이처럼 돌아치다보니 집안일은 안해의 몫으로 떨어졌다. 결국 고생하는 딸에게 불쌍한 생각이 든 장인어른이 늘 찾아와 불도 때주고 온돌수리도 도맡아해주군 하여 그럭저럭 리광일은 근심없이 밖에 나가 활동할수 있게 되였다. 바로 그시절 신물나는 세집생활에서 리광일은 하마트면 일가가 황천객이 될번한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바로 그의 사랑의 결실인 아들애의 첫돌생일이 금방 지난 추운 겨울의 어느날, 랭기가 스며드는 집안을 덥히려고 불을 많이 땠는데 그만 한밤중에 석탄가스에 중독될줄이야. 마침 그때 그의 아버지가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한가족 세식구가 모두 석탄가스에 중독되여 인사불성이 되다보니 전화를 받을수가 없었다. 의심이 든 아버지가 부랴부랴 달려와보고 급기야 그들 세식구를 밖으로 업어내다가 김치물을 마시게 하는 등 부산을 떨어서야 세식구 모두 겨우 생명을 부지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때 표정이 처량한 안해와 아들애를 보면서 굴강한 사나이의 눈가에 처음으로 이슬이 맺혔다.

속죄하며 사는 삶

한가족이 몰살할번한 위험을 겪고나서야 리광일은 신물나는 세집살이를 개변하고픈 욕망이 예전보다 더욱 강렬해졌다. 언제까지 고생해야 할지 모를 세집살이에서 해탈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하여 그는 단연히 단위에 사직서를 내고 망망한 “하해”에 몸을 던졌다. 그후 그는 심수에 가서 중한합자기업소에서도 일해보고 한국에 다녀오며 교포가수로 공연에 참가하는가 하면 여가에 운전기사, 호텔이나 려관의 경비원일도 하면서 돈을 벌수 있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 마침내 아빠트를 갖춘 뒤 리광일은 다시 자기의 사업을 벌려보고싶었다. 하여 한국에 가있는 동안 송미옥스피치언어학원에서 반년간 학습하며 사회자기량을 닦은 그는 귀국후 곧바로 연변민족전통례절문화원에서 주임직을 맡고 사회봉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있다. 현재 송미옥스피치언어학원과 자매결연을 맺은 연변민족전통례절문화원은 가수클럽, 민족전통례절, 민족예술 등을 많이 교류하며 공연하는 한편 연변내의 사회자들을 집결시켜 회갑, 혼례, 돌잔치 등에 신용있는 봉사를 제공하고있다.

한편 리광일이 이처럼 열심히 돌아치는 사이에 그의 안해 또한 한국나들이끝에 현재 한국에 사업을 차려놓고 분망히 보내다보니 그들 부부는 아예 떨어져사는 그리움을 감수하며 지내게 되였다. 현재 리광일은 1년에 1~2차씩 한국에 다녀오고 그의 안해 또한 한해에 2~3차씩 왔다가다보니 부부가 만나는 시간은 1년치고 별반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만남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리광일은 “지난날 바쁘게 돌아치다보니 안해에게 잘해주지 못했던것을 지금 속죄하는 마음으로 잘해주고싶다”며 비록 번마다 만나는 시간이 많지 않아도 꼭 시간을 내여 쇼핑도 함께 다니고 현재 백산실험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아들 리상림(18살)까지 데리고 가족이 함께 낚시질도 즐긴다고 한다. 그리고 “늘 안해와 아들애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 미안스러운 과정에서 나의 발전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면서 “이왕에 생활에서 못했던것을 채워가며 인생을 더 다채롭게 살고싶다”고 말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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