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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계의 “노배서기” - 한석봉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9일 10시40분    조회:7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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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노배서기” 한석봉

장장 30년을 연극배우로 살면서 《털 없는 개》, 《금개구리》 등 33편의 연극 그리고 《전화》, 《계약서》 등 30여편의 소품에 출연하며 다양한 소재의 작품에서 부동한 이미지의 인물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내여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고있는 국가1급배우 한석봉은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길림성연극가협회 회원, 연변연극가협회 리사로 활약하고있다. 

특히 소품 《전화》에서 우리말을 제쳐두고 중국어로 전화하면서 시청자들에게 폭소를 안겨주어 “노배서기”라는 별호까지 달게 된 한석봉은 “지금까지 30년을 연극배우로 살았지만 아직도 연기에 목마르다. 그래서 내부퇴직한 지금도 계속 연기를 하고있다. 연기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연극배우의 길이야말로 내가 끝까지 걸어야 할 길이기때문”이라며 연극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내비쳤다.

출세한 “미치광이”

한석봉은 연길태생이였지만 건설은행에 출근하는 아버지가 사업수요로 화룡에 전근하는 바람에 학교는 줄곧 화룡에서 다니게 되였다. 소학시절부터 남달리 시랑송을 잘하고 노래와 춤에 재질을 보였던 그는 쭉 학교선전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고중부터는 연극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장차 연극배우가 되리라는 꿈을 가지게 되면서 학교음악교원이였던 김창락선생으로부터 예술에 대해 배우게 되였다.

1974년에 고중을 졸업하고 화룡현 로과 1대 집체호로 하향한 한석봉은 로과공사선전대에서 시랑송, 춤 등 자신의 재주를 맘껏 과시할수 있었다. 그는 많은 공연이나 콩클에 참가하는 한편 화술이나 연극에 관한 학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시랑송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한석봉은 매일 강변을 찾아 강건너 조선쪽 바위에 대고 목청을 틔웠다. 그는 바위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를 들으면서 발성련습을 했다. 그러는 그를 보고 조선측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를 지르는 그가 미쳐보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러거나말거나 그의 발성련습은 좀처럼 그칠줄 몰랐다.       

그러던 그에게 행운의 기회가 왔다. 연변연극단에서 배우모집을 왔던것이다. 1차 시험에 합격되고 연변연극단에 와서 보는 2차 시험에까지 합격된 그는 꿈에도 바라던 연극배우로 되였다. 

그가 연변연극단에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서 로과를 떠나자 조선사람들은 “날마다 소리지르던 그 ‘미치광이’가 며칠 보이지 않던데 죽었는가”고 묻기까지 하였다. 로과촌민들은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출세해서 좋은 단위에 배치받았다”며 자랑하였다.

진정한 희극배우로 성장

1978년 1월, 한석봉은 정식으로 연변연극단에 출근하게 되였다. 그런데 집체호에서 갈고 닦은 연기력으로 실력파배우들이 모인 연극단에서 그가 설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간단한 단역을 맡아도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배역은 연극 《고요한 야밤》중의 도적역이였다. 그냥 서서 부들부들 떨면 되는 단역이였지만 좀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잘하고싶은 마음은 불같았고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동료들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속이 타서 재가 될 지경인 그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는이가 있었다. 바로 연극단 업무단장으로 계셨던 허동활선생이 4일간이나 퇴근후 밤 12시까지 개별지도를 해주었던것이다. 우선 배역분석부터 연기방법까지 낱낱이 가르쳐주었다. 하여 그는 차츰 연극에 대해 신심을 가지게 되였고 순조롭게 공연할수 있게 되였다.

신인배우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한석봉은 남에게 뒤질세라 낮에 밤을 이어가며 연기력을 키우기에 노력했다. 거기에 로선배인 리영근선생과 최인호선생의 가르침으로 그의 연기실력은 하루하루 눈에 띄우게 진보를 가져왔다. 1981년, 한석봉은 희극 《누구를 닮았나요?》에서 처음으로 주인공 칠복이역을 맡게 되였고 또한 《누구를 닮았나요?》를 통해 진정한 희극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그후 그는 희극 《도시 + 농민》에서 주인공 철남역, 희극 《출국전야》에서 주인공 장걸역 등 많은 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그는 대중들이 널리 알고있는 희극 《털 없는 개》에서 영팔역으로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인기희극배우로 부상했다. 선후로 국내에서 500여차 순회공연을 한 《털 없는 개》는 한국 《매일신문》사의 요청으로 한국의 서울, 대구, 구미, 포항 등지에서도 8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 희극 《털 없는 개》는 국가문화부로부터 문화신극목상을 수상했고 한석봉은 영팔역으로 연기 2등상을 수상했다. 또 희극 《금개구리》중의 주인공 최석팔역으로 동북지구제3회연극교류콩클에서 연기금상을 수상했고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로부터 《덕예겸비》영예상을 수여받았다.

명품연기를 보여준 “노배서기”

한석봉의 연기는 연극뿐만아닌 소품무대에서도 빛났다. 그는 1986년 음력설맞이야회에서 소품 《전화》의 로백서기역을 맡아 연변식중국말을 천연덕스레 하여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로부터 그에게는 “노배서기”라는 별호가 붙었는데 지금까지 2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보면 “노배서기”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그후에도 그는 많은 소품에 출연하여 여러가지 인물형상을 부각했는데 그중에서  《계약서》의 돼지고기장사역으로 길림성제2회소품콩클에서 연기 1등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영예를 받아안기도 하였다. 

한석봉은 2006년 1월 정책으로 인해 연변가무단에서 내부퇴직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기인생이 결코 끝난것이 아니였다. 그는 2008년에 이어 금년에도 다시 초빙을 받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있는바 지난 1월 18일에는 연변가무단의 새봄맞이소품야회에서 소품 《개 핑계》중 령감역으로 출연하여 관람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였다.

안해의 내조에 감동

한석봉은 입사한 이듬해 당직로인의 소개로 지금의 안해 장옥분을 만났다. 사위사랑은 장모님이라지만 한석봉의 장모는 그들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리유는 단 하나 “풍각쟁이”를 사위로 삼을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래도 다행히 시방송국에 출근하는 장인어른과 처남, 처제들의 지지로 결국 장모의 허락을 받았고 교제한지 1년만에 결혼에 골인하였다. 

당시는 외지공연이 잦은 때라 부부가 갈라져있는 시간이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많았다. 그래서 집안의 크고작은 일들은 다 안해가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안해는 언제 한번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없이 내조를 잘했다. 뿐만아니라 공연을 떠난 남편한테 자주 편지를 써보내여 힘을 실어주었다. 외지공연때마다 한석봉은 안해의 편지를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안해의 편지에는 늘 애잔한 그리움과 몸조심하라는 따뜻한 부탁 그리고 집걱정말라는 격려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한번은 어쩌다 편지가 동료들에게 공개되였는데 모두들 그 편지를 읽고 감동되여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연변병원 약제사였던 안해는 1994년 돈을 번다며 한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집에 홀로 남겨둔 외로운 남편을 위해 안해는 3년이 지나서부터는 해마다 남편 생일에 집으로 돌아와서 생일을 쇠주군 하였다. 그렇게 그들 부부는 10년 넘게 견우직녀처럼 그의 생일에 만나서는 회포를 풀었다.

안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훈훈해난다는 한석봉은 “우리 안해처럼 마음씨 고운 녀자는 드물다. 난 참 마누라복이 있는 남자”라고 입버릇처럼 외운다. 료리에 취미가 있는 한석봉은 오로지 남편만을 위하는 안해에게 맛있는 료리를 해주는것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할 때가 많다면서 “이제 안해가 돌아오면 아침마다 밥상을 해서 바치겠다”고 은근히 부부금슬을 자랑하기도 한다.

아들한테는 하냥 미안한 마음

한석봉은 우수한 희극배우로 되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훌륭한 아버지로는 되지 못했다. 이것이 아마 그의 마음에서 제일 가슴아픈 일일것이다.

그는 지금도 아들이 태여난 날을 잊을수 없다. 1981년 1월 28일 집에서 부랴부랴 좁쌀죽을 쑤어가지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는 병원앞에서 간호사를 만났다. 간호사는 그에게 “아들을 본것을 축하한다”며 인사를 하였다. 아들을 보았다는 말에 한석봉은 기운이 막 솟았다. 전날에 두툼하게 내린 폭설이 해빛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였다. 그는 새하얀 눈우에 설광(雪光)이라고 큼직하게 써보았다. 

그러나 한석봉은 아들 설광에게 큰 사랑을 주지 못했다. 공연이 잦은 그는 안해가 출국하자 아들을 부모님한테 맡겼다. 설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부모의 엄격한 교양을 받지 못한데서 굴레벗은 말처럼 밖으로 나돌기만 하고 학습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하여 초중을 졸업하고 돈을 번다며 위해, 청도 등 여러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고생을 하였고 지금은 엄마가 있는 한국에 가서 일하고있다.

자라면서 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이 적었던 설광은 늘 아버지가 어렵기만 했다. 결혼을 앞둔 지금에야 아버지한테 “자라면서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얼마나 나누고싶었는지 모릅니다”며 솔직히 털어놓은 설광은 날마다 아버지한테 문안전화를 올리고 또 컴퓨터로 화상채팅도 한다. 이렇게 초년에 고생한 아들한테 미안한 마음뿐인 한석봉은 “아들이 나쁜 길에 들어서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스럽고 남자답게 자라주어서 너무 고맙다. 아들한테는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산다”고 고백하고나서 “지금은 부자간의 관계가 많이 돈독해졌다. 아들이 있어서 너무나 든든하다”며 아들에 대한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후기

연극에 푹 빠져 가정의 모든 식구들에게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한석봉은 경제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연변연극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그는 “제대로 된 장막극 하나를 내놓으려 해도 곤난이 첩첩하다. 우선은 원고료지불도 어렵기에 좋은 작품이 없어 연기력을 펼치려 해도 표현할수 없다. 거기에 좋은 신인배우들을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다. 극난에 처한 민족예술이 너무 걱정된다”며 깊은 우려심을 내비치고나서 또 “아무리 힘들더라도 연극연구는 계속할것이고 배우로서의 사명감을 안고 재능을 발휘하여 우리 민족 관람객들에게 보다 많은 웃음과 기쁨을 줄것이다”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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