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농민” 작곡가 전승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16일 10시55분    조회:862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왕청현 왕청진 왕청대대에서 창작과 예술지도에 종사하며 농촌문예사업에서 한몫을 톡톡히 감당하던 작곡가 전승길선생이 지난 2월 1일 66세(음력 1월 7일) 생신날에 음악생애 50돐 기념 및 첫 음악작품선(CD)발행식을 펼치였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음악계인사들은 전승길선생이 50년 음악생애에서 거둔 성과에 대해 충분히 긍정함과 동시에 농민출신의 조선족작곡가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음악에 “미쳐있던” 나날

1943년 정월 초이레날 왕청현 십리평향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한 전승길은 1948년에 부모님을 따라 도문시에 이사해온후 1949년 7살 어린 나이에 도문시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생이 된지 얼마 안되던 어느날 음악시간에 학급담임선생님이 흑판에 오선보를 그리고 그우에 음계를 표시하였을 때 처음으로 음악이란 사물을 접촉하게 된 그는 콩나물대가리처럼 생긴 오선보가 그렇게 신기할수 없었다. 이때로부터 음악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게 된 그는 2학년때 벌써 자기절로 오선보를 볼줄 알게 되였고 새로운 노래들이 나오면 제법 절로 부를수 있게 되였다.

부모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친척집에 얹혀살게 된 그는 초중에 진학한후 학교 취주악단에 들어가 트럼본을 다루는 행운을 얻었다. 이렇게 음악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58년 길림성소수민족학생문예콩클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예술의 무대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면서 장차 음악가로 되여보려는 꿈을 싹틔우게 되였다. 하지만 궁핍한 가정생활때문에 공부를 계속 해나갈수 없게 될줄이야?!  막부득이한 형편에서 그는 초중3학년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인 왕청현 십리평향으로 돌아가고말았다.  

당분간 꿈을 키워나갈수는 없게 되였지만 어떻게 하든 그 꿈을 꼭 이루어보고싶었던 그는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음악지식을 부지런히 쌓아갔다. 농사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음악에만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는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조상에 없는 풍각쟁이가 생겼다”며  못마땅해하였고 출가한 누님도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만나기만 하면 꾸중부터 들이댔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대한 추구만은 버릴수가 없었다.음악만 생각하고 돌아다니던 어느날 향정부에서 낡은 손풍금을 발견한 그는 보배라도 얻은듯 집에 가지고 와서 반복적으로 련습하면서 자기절로 대조, 소조의 기본화성을 익혀갔다. 이렇게  17살의 어린 나이에 향의 문예골간으로 활동하면서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선보이게 된 그는 동요 《좋은 범 나쁜 범》,《도랑물소리》를 작곡하면서 창작의 첫발자국을 내디디기 시작하였다. 

음악을 위해 천방지축 뛰여다니는 아들이 너무도 한심해서 부모님들은 색시감을 물색해주며 당금 결혼하라고 닥달했다. 가정이 생기면 책임감에서라도 마음을 잡을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20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세대주로 되였지만 그는 가정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것을 음악을 위한 사업에 복종시키는것을 천직으로 간주하였다.

음악창작에 “빠져있던” 시절

1965년, 왕청현 왕청진 왕청대대에서 문예선전대를 크게 발전시키면서 현내에서 문예골간을 물색하던차 트럼본이며 손풍금 등 악기를 마음대로 다룰수 있고 음악창작까지 할수 있는 전승길선생에게 눈독을 들였다. 이것은 한창 음악에 “미쳐있던” 전승길선생으로 말하면 잠재한 음악재질을 남김없이 과시하고 창작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안해와 3살난 딸을 거느리고 왕청대대로 이사해왔다.

당시 왕청대대 문예선전대는 나젊은 과외예술애호가들이 농촌문예활동에서 장끼를 자랑할수 있는 드넓은 활무대였다. 이리하여 전승길선생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낮에는 생산대의 집체생산로동에 참가하고 밤에는 대대구락부에 가서 창작과 예술지도에 묻혀있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그 보람으로 왕청대대문예선전대는 1966년부터 거의 20년간 성, 주, 현의 문예콩클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며 전국에 소문을 놓게 되였다.

전례없는 대동란시기에 아버지가 터무니없는 력사문제에 걸려들면서 선생에게도 영향이 컸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 음악창작사업에 정진하면서 우수한 작품들을 륙속 내놓았다. 이 시기 선생이 창작한 가요가운데서 비교적 환영을 받은 작품으로는 《풍년씨앗 뿌리세》(1966년), 《양돈처녀》(1971년), 《중화의 대가정》(1973년), 《경애하는 주총리》(1976년), 《우리네 생산대장》(1979년), 《여기가 내가 사는 마을이라오》 (1980년)  등을 꼽을수 있는데 그중에서 《양돈처녀》를 주제곡으로 한 독무 《양돈처녀》는 당시 여러 예술단체의 공연종목으로 되였고 전국콩클에 참가하여 묵직한 상을 받아안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은 또 새납독주곡 《풍년의 새노래》, 바이올린합주곡 《청년돌격대》, 목금독주곡 《딱따구리원무곡》 등과 많은 무용곡을 창작함과 동시에 동방가무단을 위해 무용곡 《장백산에 깃든 이른봄》과 《탈곡장의 기쁨》을, 민족학원을 위해 《농약치는 처녀》를, 료녕성 반금지구를 위해 대형가극 《창업자》 등을 작곡하여주었다.

이밖에 농민신분으로 왕청현내의 광산, 기업, 상업, 학교, 해방군 등 단위에 가서 음악창작과 지도를 하던 선생은 그후 원로예술가인 최수봉선생의 눈에 들어 연변구연단의 설립을 위한 사업에 동참하였다. 그동안 성과 주의 많은 단위들에서 전승길선생을 욕심냈지만 한사코 놓아주지 않던 왕청현에서도 음악을 위한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선생에게 탄복한 나머지 뒤늦게나마 특수인재초빙지표를 주었다. 이렇게 되여 선생은 4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연변구연단에 적을 붙이고 로임을 타면서 음악창작에 전념할수 있는 특혜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연길에서 “홀아비”생활을 하면서 시골에 계시는 년로한 부모님들을 돌봐드리고 왕청에 두고온 안해와 아들딸 3명까지 먹여살리자니 너무도 힘들었다. 생각다 못해 선생은 어렵게 차례진 연길생활을 포기하고 왕청현문화관으로 전근하여 문예조 조장으로 활약하면서 빛과 열을 군중문화보급사업에 다 바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후 왕청현문공단(단장), 왕청현문화국 창작조, 연변석유정제공장 공회 선전부 등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선생은 같지 않은 사업분야에서 시종 음악창작과 예술지도에 온갖 심혈을 다 몰부었다. 그리고 정년퇴직한후에도 계속하여 도문시음악협회 부주석이라는 직무에 충실하는 한편  《만풍년의 기쁨 꽃으로 피여나네》, 《정 하나 못잊어》, 《연변아가씨》, 《연변이란 그 이름》, 《산좋고 물좋은 내 고향》, 《웃으며 삽시다》, 《그리운 하늘》, 《고향생각》 등 가요를 작곡하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생활, 우정, 열정

연변음악협회 주석이며 연변가무단 명예단장인 박서성씨는 전승길선생의 50년 음악창작생애를 “생활, 우정, 열정”이라는 여섯글자로 귀납한다. 

전승길선생이 그동안 생활미가 철철 흐르는 작품들을 내놓을수 있게 된것은 본인의 굴곡적인 생활략력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한다. 다년간의 농촌생활실천에서 직접 체험하고 보고들으면서 루적한 풍부한 생활경험 그 자체가 음악농사의 밑거름이 되여 독특한 민족특색을 갖춘 작품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게 되였으니 그럴법도 하다.

전승길선생에게서 제일 보귀한 개성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것이라고 한다. 인품이 좋은 선생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가는 곳마다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여오고있는데 80세 고령의 로인네들로부터 20대의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고있는 사람들이 푸술하다고 한다. 

음악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저 찾아오는 초학자들에 대해서도 선생은 능력껏 지도해주면서 그들이 음악면에서 최대한 진보를 가져오도록 하고저 왼심을 써왔는데 그가운데는 선생의 지도를 받고 성공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테면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원장으로 사업하는 강광훈씨는 전승길선생과 친구로 지내고있는 형님의 소개로 선생을 알게 되였는데 1971년에 일주일에 한번씩 금창에서 소철을 타고 60킬로메터 상거한 왕청진으로 다니면서 손풍금연주를 배워서 소원대로 연변예술학교 음악전업에 입학하였다. 하기에 강광훈씨는 손풍금으로 성공을 거두고 전반 예술학원을 이끌어가는 코기러기로 된 지금도 38년전 왕청대대문예선전대의 사업때문에 팽이처럼 돌아치면서도 시간을 짜내 열심히 손풍금지도를 해준 전승길선생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있다.

음악에 대한 끈질긴 추구와 뜨거운 열정은 뭇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내는 가장 돌출한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당년에 음악창작을 한답시고 집에 비가 새도 관계하지 않고 10살 어린 나이에 물을 긷는 딸애도 못본체하면서 구락부에만 들어박혀있었다는 선생은 60고개 중반을 넘어선 지금도 젊은 시절의 열정 그대로 음악창작활동에서 앞장을 다투고있으며 도문시음악가협회 부주석으로 뛰던 그제날과 다름없이 주머니를 헤쳐 협회의 사업을 지지, 성원하고있다.  

지나간 50년 세월을 뒤돌아보며 전승길선생은 가장 고마운 사람은 그동안 가정의 크고작은 일들을 혼자서 떠메고 숱한 고생을 하면서도 남편 뒤바라지에 정성을 다한 마누라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안겨주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스러워 도문에서 음식업체를 경영하는 딸과 며느리를 도와주느라 나름대로 노력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것이라고 속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최근에 전승길선생은 지금까지 창작한 200여수의 가요가운데서 《붉은 태양》, 《기러기》, 《연길비행장》, 《인생의 길동무》, 《첫수확》 등 15수를 골라 음악작품집(CD)  제1집을 출판하였고 상반년내로 제2집을 출판할수 있는 준비도 바야흐로 마무리하고있다. 선생이 음악에 대한 열정을 영원토록 간직하고 연변음악협회 전임주석 박장수선생의 건의대로 《전승길작품음악회》도 구상해보는 한편 기둥뿌리를 뽑는다는 늘그막사랑으로 마누라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선물할것을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ㅡ한국 KBS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선생 인상기지난 9월 11일 오전,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KBS전국노래자랑(심양편)을 사회하기 위해 송해선생이 심양에 왔다. 점심식사를 할 때까지도 손명식, 권유현, 길경갑 등 현지의 주최측책임자들과 행사준비상황을 료해하고 체크하기에 경황이 없던 선생은 오후에 짬이 좀 나...
  • 2009-10-20
  • 저명한 촬영가 황범송 만나본다 황범송은 장백산에 300여차 올라 천지사진만 해도 100장 찍었다. 《장백산천지》는 국가 교육부, 수리부에서 지정한 《천지표준상》으로서 초고중 교과서에 올랐다 1959년 8월부터 연변을 시찰한 중앙지도자들을 촬영, 선후로 주은래, 주덕, 동필무,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
  • 2009-10-20
  • 충북서 배워간 ‘명사 시낭송회’길림에서도 자리잡아동양일보 초청 연변동포 6명 단장으로 방문97년 옥천 지용문학상 수상 충북과 인연연길 포석회 회장… 8회째 조명희문학제 개최명사들이 무대에 올라 시를 읊으며 깊어가는 가을의 낭만을 전해주는 ‘2009 명사 시낭송회’가 지난 9월 25일 청...
  • 2009-10-19
  • 무진장 큰 중국시장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청도성신온돌유한회사 김룡웅 총경리를 만나전자파측정기로 제품을 측정해보이는 김룡웅 총경리 (왼쪽사람). 룡정시와 훈춘시에서 상업, 무역에 종사하던 김룡웅씨가 청도시 성양구에 온것은 2004년경, 처음에는 한국회사와 합작하여 전기온돌판넬을 생산하다가 지금은 한국성신전...
  • 2009-10-15
  • 우리 문화는 우리 경제가 살려야 합니다산동성 청도시 청도코리아수정실업유한회사 회장 남룡해 인터뷰남룡해 프로필: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연변촬영가협회의 직원, 부비서장,부주석,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 중국예술촬영가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력임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화상》  수상전국덕예...
  • 2009-10-15
  • 나라가 부강해야 모두가 잘살수 있다 북경건국60돐경축에 참가한 김죽화교장의 감수10월 10일, 기자는 북경건국60돐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무순경제개발구리석채조선족소학교 김죽화교장을 만났다. 그는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고 하늘땅이 크다 해도 공산당의 은덕에 비기지 못한다”며 아직도...
  • 2009-10-14
  • 80년대중반 연변가요계에서  《살구나무》노래를 불러 새별로 떴던 김경자씨가 일본생활 17년만에 고향행을 하면서 그 이름《살구나무》앨범을 선물로 들고 찾아왔다. 특히 모교인 연변대학 성립 60돐기념행사에 모처럼 《교정의 종소리》를 불러올릴 예정이란다. 고향과 모교, 그에게 가수의 꿈나래를 키워준 곳, 오매...
  • 2009-10-14
  • 성실신용은 금이다도문시 보이라공장 김룡식공장장 인터뷰일전 기자는 30여명의 종업원들을 이끌고 팽이처럼 돌아치는 도문시보이라공장 김룡식공장장(55)을 만났다. 월동준비때라 꺼질줄 모르는 핸드폰, 할빈서 온다는 손님들… 여하튼 오전에 시작한 인터뷰가 밤 약속으로 이어졌다. 그도 그럴것이 지나온 17년간 눈...
  • 2009-10-13
  • 작은 인연이 커 갑니다 -북경 왕징 중심호텔 강하연사장을 찾아서 지난 10월 10일 오전 9시 30분경, 기자는 전날의 약속대로 북경시 조양구 왕징리택중원3구 301번지 중심호텔(北京市朝阳区望京利泽中园3区301号 中心宾馆)의 7층 사무실에서 강하연사장(39세)을...
  • 2009-10-13
  • 단편소설 《몽당치마》의 작가 림원춘 만나본다● 《가무단 한쪽구석에 처박힌 〈논물관리원〉이 입었던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한복차림으로 나타나자 수백명 기자들이 샤타를 누르는데 ...》 ● 《농촌에 내려가 하숙집의 나무도 패주고 불도 때주고 배갈 한병 받아놓고 주인집 량반과 술 한잔 나누면서...
  • 2009-10-1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