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홍미옥- 폭소뒤에 깔린 슬픈 배우리력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10일 20시59분    조회:942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ㅡ화룡시예술단 홍미옥배우의 이야기

보름달같은 얼굴에 호함진 함박웃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폭소탄을 안겨주는 뛰여난 연기, 바로 화룡시예술단 미녀배우 홍미옥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언제나 대중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선사하는 배우이지만 그녀에게도 그 웃음뒤에 삶과 모지름을 썼던 남모르는 슬픈 과거가 깔려있었다. 일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홍미옥양은 자신의 비애에 젖었던 이왕지사를 털어놓아 기자를 감명깊게 했다.

올해에 들어서만도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고향오빠》, 추석맞이야회에서 《만남》, 4회연변민들레생태문화예술절문예공연에서 《세 홀로인》(이상 허상권, 최중철, 홍미옥 출연) 3로인에 출연하여 폭소탄을 선물하며 연변TV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홍미옥배우의 걸어온 자국마다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고여있을가?

신물나는 가난ㅡ소녀의 비애

1970 3 21일 화룡시 용화향의 한 농민가정에서 3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홍미옥양은 노래를 잘 부르는 엄마 강금녀의 영향을 받아 어릴적부터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어 학교선전대에서 주력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때 공부에 더욱 흥취가 짙었던 그는 예술보다는 장차 대학에 가려는 리상을 품고 공부에 진력, 드디여 화룡고중을 졸업한 뒤 대학입시에서 입학선인 520점을 훨씬 넘겨 614점의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 헌데 어찌 알았으랴. 가난이라는 몹쓸 운명이 한창 꿈에 부푼 소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줄을. 원체 시골살림이여서 그때는 이웃들도 풍족하게 사는 형편이 못되였지만 특히 홍미옥양의 집안은 가난이라는 두 글자때문에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져가고있었다. 장기환자인 오빠때문에 집까지 다 팔아버리고 한가정식솔이 전기도 없는 과수원 보초막에 빌어들어서 먹을것도 없어 쌀까지 꿔서 먹으며 생활하는 상황에 대학을 지망했던 19살소녀의 황홀한 꿈은 결국 물거품처럼 사라질수밖에 없었다.

오직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아버지의 눈길에서 딸을 대학에 못보내는 미안한 심정을 읽으면서도 당시 비애에 젖을대로 젖은 소녀의 마음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있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일을 자기일처럼 안타까와하던 고중시절의 선생님이 그녀에게 정 대학에 갈수 없다면 직업고중에라도 갈것을 권고했다. 그 권고를 듣고 아버지 또한 큰마음 먹고 집안에 유일한 재산이던 암소를 500원에 팔아 그녀에게 손풍금을 사주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공부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옷 한벌 못사입은것은 물론 영양부족으로 고생하던 홍미옥양은 결국 13살부터 걸린 신염때문에 직업고중 유사반에 입학했어도 춤출 때거나 몸이 약간만 차가와도 소변건사가 힘들 정도였다. 결국 직업고중까지 중퇴한 그녀는 사회의 무직업자로 되고말았다.

가난과의 도전ㅡ내 인생은 나절로

설상가상이라고 할가. 홍미옥양의 모든 꿈이 사라진 상황에서 오직 장기환자아들을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겪어오며 마을에서 꼬리없는 황소로 불리우던 아버지마저 끝내는 지쳐서 드러눕게 되였다. 오빠와 함께 중환자가 되여 눈앞에 있는 사람도 못알아보는 아버지를 보며 또 가냘픈 어깨에 한가정 중임을 떠메고 겨울이면 낫을 들고나가 담배대를 베여다 불을 때며 생활을 연명해가는 어머니를 보며 홍미옥양의 가슴속에서는 차츰 비애가 걷혀지고 강렬한 삶의 욕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일어서야 한다. 아버지도 오빠도 중환자가 된 마당에서 오직 내힘밖에 믿을게 없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홍미옥양은 무작정 집식구들을 모시고 화룡시가지에 세집을 잡은후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부르던 밑천을 살려 나이트클럽의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차이로 인해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래를 파는 《기생》으로 비난받기가 일쑤였다. 당시 23살처녀인 홍미옥양이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맨먼저 반대한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죽어도 딸이 〈창기〉가 되는것을 볼수 없다》며 한사코 반대하는 어머니에게 차근차근 설명해드리며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나날 홍미옥양은 자신의 힘으로 번 월급으로 한가정생활을 꾸려나갈수 있게 되자 차츰 생활에 신심이 생기였다.

홍미옥양이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른지 2년이 되던 어느날 즉 1995년도의 어느날 머리가 희슥희슥한 남성 한분이 나이트클럽에 왔다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화룡시예술단에 시험쳐볼것을 권고했다. 당시 화룡시예술단에서는 대외로 배우모집을 했는데 홍미옥양에게 시험쳐볼것을 권고한 남성분이 바로 화룡시예술단 김동률서기였다. 결국 홍미옥양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수로 뽑히는 행운을 얻었으며 그때로부터 그녀의 앞길에 예술의 광활한 무대가 펼쳐지게 되였다.

희망의 터전ㅡ예술의 활무대 
화룡시예술단에 가수로 뽑혀서 홍미옥양이 맨 처음 참가한 공연은 흑룡강공연이였다. 그때 갓 결혼해서 돌도 차지 않은 젖먹이아기를 엄마에게 맡겨두고 떠나려니 가슴이 쓰려나지 않을수 없었지만 자신의 일생에 전환점이 될 예술길의 첫발자국을 그는 결코 포기할수 없었다. 흑룡강에 가서 1개월간 주숙하며 공연하는 동안 뜻밖에도 그녀의 통속가요가 인기를 끌어 매 공연때마다 재청으로 6~7곡씩 부르게 되였다. 따라서 처음 참가한 공연이 인기를 끌며 그녀의 실력 또한 예술단지도부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그후로 줄곧 공연때마다 독창가수로 등장하던 홍미옥양은 어느날 문득 예술단에 소품배우가 부족한것을 발견했다. 즉 예술단의 배우진영이 부족한 까닭에 공연때면 외부인원을 불러다가 출연시키는것이였다. 허상권, 최중철 등 소품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함께 섭쓸리다보니 자연히 구연에 흥취를 가지게 된 홍미옥양은 마침내 어느날 자신이 구연작품에 출연할 뜻을 내비쳤다. 그후 얼마간 선배들에게서 구연예술을 배우고 그녀가 맨 처음 출연한 소품제목이 바로 《웅담분》이였다. 그녀가 최중철, 황은희와 함께 출연한 《웅담분》은 그 이듬해 흑룡강성순회공연에서 크게 관중들을 매료했고 홍미옥자신은 이 소품으로 1998년 길림성소품경연에서 개인 2등의 영예를 안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홍미옥양은 독창가수 겸 구연배우로 출연하며 화룡시예술단의 중견배우로 부상, 매 공연때마다 통털어 10~11개의 프로가운데서 혼자 독창, 대창, 소품, 삼로인 등 5~6개의 프로에 등장하게 되였다.

배우의 길ㅡ가슴속의슬픔도 묻어두고 
배우의 삶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랑만적인것만은 아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뛰여난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피타는 노력도 들여야 하지만 가끔은 가슴속의 슬픔도 표정상에서는 웃음으로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1998년 흑룡강순회공연을 가게 되였을 때 홍미옥양의 아버지가 림종을 앞두게 되였다. 하지만 혼자 예술단공연의 절반가량프로에 출연해야 하고 또 흑룡강측에서는 이미 극장마다 화룡시예술단의 공연표를 다 팔아버린 상황에서 목구멍에 그렁그렁 담이 끓는 아버지의 림종을 앞두고도 홍미옥양은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납덩이에 눌리운듯 무거운 마음을 안고 흑룡강공연길에 오른 홍미옥양은 공연여가에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고 집에서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점적주사를 맞고 많이 나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래서 다소 마음을 놓고 공연에 몰두하여 흑룡강성관중들의 갈채를 받고 보름만에 길림시에 도착, 마지막 몇차의 공연을 앞두고있을 때에야 예술단 단장으로부터 그녀가 집을 떠나서 불과 40분만에 아버지가 사망된 소식을 알게 되였다. 사실은 공연일정때문에 그녀의 어머니와 예술단 단장이 약속하고 그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비밀에 붙였던것이다. 그때의 심정 무엇으로 표현할가? 아버지의 림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자식의 가슴속에서는 눈물 아닌 피고름이 흘렀다.

하지만 이미 약정된 공연은 그만둘수 없었다. 슬픔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홍미옥양은 계속 무대에 나섰는데 특히 정극소품 《웅담분》을 공연할 때엔 절절한 심정이 안받침되여 관중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따라서 공연은 원래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되였다.

엄마구실 못하는 엄마ㅡ모든 희망 애에게 기탁 
가정생활에서 홍미옥양은 애를 낳기만 했을뿐 별로 사랑을 주지 못했다. 1년치고 대부분은 공연차 밖에서 떠돌다보니 애는 낳아서부터 줄곧 그녀의 어머니가 키워왔다. 《어린애를 두고 나갈 때면 가슴이 아프고 늘 엄마의 수고가 안스럽다》고 말하는 홍미옥양은 《매번 공연차 몇달씩 밖에서 돌다가 돌아와보면 그동안 애가 커서 알아볼수 없을 때도 있었다》며 눈굽을 적셨다. 현재 15살로 초중 2학년에서 공부하고있는 홍미옥양의 아들 리림걸은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공부도 잘하고 학급에서 반장으로 활약하고있다. 어려서부터 엄마와 갈라져 살아온 리림걸은 지금 저절로 밥을 해먹거나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단다. 또 엄마의 소품을 보고 신통히도 흉내내군 하는데 홍미옥양은 그런 아들애가 예술보다는 자신의 가슴에 한맺힌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것을 바라고있다.

홍미옥양은 《내 가정을 잘 지키지 못해 안스럽지만 관중들이 손잡고 인사하며 반가와할 때면 새로운 용기가 난다》며 《보다 더 좋은 소품에 출연하여 관중들에게 보답하고싶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독창, 대창은 물론 소품 《초하루》(성급2등상 획득), 《내거 삽소》(성급 1등상 획득), 《병원에서 맺은 인연》, 삼로인 《고향오빠》, 《만남》 등 수십편의 구연종목에 등장하며 1500여차의 공연에 참가, 대부분 온돌공연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굳힌 홍미옥양은 특히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 문화유산인 3로인에 많이 출연한 까닭에 시골관중들로부터 《홍아매》로 친절히 불리우고있으며 그와 허상권, 최중철 등 배우들 그리고 화룡시문화부문의 알찬 노력으로 3로인은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ㅡ한국 KBS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선생 인상기지난 9월 11일 오전,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KBS전국노래자랑(심양편)을 사회하기 위해 송해선생이 심양에 왔다. 점심식사를 할 때까지도 손명식, 권유현, 길경갑 등 현지의 주최측책임자들과 행사준비상황을 료해하고 체크하기에 경황이 없던 선생은 오후에 짬이 좀 나...
  • 2009-10-20
  • 저명한 촬영가 황범송 만나본다 황범송은 장백산에 300여차 올라 천지사진만 해도 100장 찍었다. 《장백산천지》는 국가 교육부, 수리부에서 지정한 《천지표준상》으로서 초고중 교과서에 올랐다 1959년 8월부터 연변을 시찰한 중앙지도자들을 촬영, 선후로 주은래, 주덕, 동필무,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
  • 2009-10-20
  • 충북서 배워간 ‘명사 시낭송회’길림에서도 자리잡아동양일보 초청 연변동포 6명 단장으로 방문97년 옥천 지용문학상 수상 충북과 인연연길 포석회 회장… 8회째 조명희문학제 개최명사들이 무대에 올라 시를 읊으며 깊어가는 가을의 낭만을 전해주는 ‘2009 명사 시낭송회’가 지난 9월 25일 청...
  • 2009-10-19
  • 무진장 큰 중국시장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청도성신온돌유한회사 김룡웅 총경리를 만나전자파측정기로 제품을 측정해보이는 김룡웅 총경리 (왼쪽사람). 룡정시와 훈춘시에서 상업, 무역에 종사하던 김룡웅씨가 청도시 성양구에 온것은 2004년경, 처음에는 한국회사와 합작하여 전기온돌판넬을 생산하다가 지금은 한국성신전...
  • 2009-10-15
  • 우리 문화는 우리 경제가 살려야 합니다산동성 청도시 청도코리아수정실업유한회사 회장 남룡해 인터뷰남룡해 프로필: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연변촬영가협회의 직원, 부비서장,부주석,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 중국예술촬영가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력임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화상》  수상전국덕예...
  • 2009-10-15
  • 나라가 부강해야 모두가 잘살수 있다 북경건국60돐경축에 참가한 김죽화교장의 감수10월 10일, 기자는 북경건국60돐경축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무순경제개발구리석채조선족소학교 김죽화교장을 만났다. 그는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고 하늘땅이 크다 해도 공산당의 은덕에 비기지 못한다”며 아직도...
  • 2009-10-14
  • 80년대중반 연변가요계에서  《살구나무》노래를 불러 새별로 떴던 김경자씨가 일본생활 17년만에 고향행을 하면서 그 이름《살구나무》앨범을 선물로 들고 찾아왔다. 특히 모교인 연변대학 성립 60돐기념행사에 모처럼 《교정의 종소리》를 불러올릴 예정이란다. 고향과 모교, 그에게 가수의 꿈나래를 키워준 곳, 오매...
  • 2009-10-14
  • 성실신용은 금이다도문시 보이라공장 김룡식공장장 인터뷰일전 기자는 30여명의 종업원들을 이끌고 팽이처럼 돌아치는 도문시보이라공장 김룡식공장장(55)을 만났다. 월동준비때라 꺼질줄 모르는 핸드폰, 할빈서 온다는 손님들… 여하튼 오전에 시작한 인터뷰가 밤 약속으로 이어졌다. 그도 그럴것이 지나온 17년간 눈...
  • 2009-10-13
  • 작은 인연이 커 갑니다 -북경 왕징 중심호텔 강하연사장을 찾아서 지난 10월 10일 오전 9시 30분경, 기자는 전날의 약속대로 북경시 조양구 왕징리택중원3구 301번지 중심호텔(北京市朝阳区望京利泽中园3区301号 中心宾馆)의 7층 사무실에서 강하연사장(39세)을...
  • 2009-10-13
  • 단편소설 《몽당치마》의 작가 림원춘 만나본다● 《가무단 한쪽구석에 처박힌 〈논물관리원〉이 입었던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한복차림으로 나타나자 수백명 기자들이 샤타를 누르는데 ...》 ● 《농촌에 내려가 하숙집의 나무도 패주고 불도 때주고 배갈 한병 받아놓고 주인집 량반과 술 한잔 나누면서...
  • 2009-10-1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