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최상철교수의 《인생도전 3박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16일 08시35분    조회:882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신문학》 하면 금방 떠오르는 한분이 계신다. 바로 연변대학의 신문학교수이며 우리 《신문학교육의 개척자》인 최상철교수(70세)이다.

청춘시절에는 작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연변대학 조문학부만을 선택해 연변에로 왔고 졸업후에는 15년간 문학교수와 창작 및 평론에 전념, 왕성기를 맞다가 돌연 신문학의 길을 새롭게 선택하고 모색, 우리 민족 신문학에 진한 첫획을 그은 분,  현재는 또 한국어 교육으로 만년을 장식하고있는 최상철교수이다.

이한 평범치 않은 인생려정을 두고 최교수는 《인생도전 3박자》라고 말한다.

문학: 작가의 꿈을 안고 연변대학으로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1959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통지서와 함께 작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연길역에 도착했을 때의 정경을 최상철 교수는 아직도 생생히 상기한다.

《글쎄, 분명 연길시로 알고 찾아갔는데 홈을 나오고보니 농촌정경이 펼쳐집니다. 초가집들에 아스팔트길 한자락 없고 뻐스, 전차 한대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변대학을 어떻게 가냐고 물으니 고무바퀴 마차를 가리키며 저걸 타고 간다고 하더란다. 당시의 유일한 교통도구인 마차에 앉아 《쓰딸린극장》, 연변병원, 농촌을 《구경》하며 겨우 연변대학에 도착하고나니 《왜 왔던고?》 후회도 없지 않았다는 최교수.

아무리 1, 2, 3지망을 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로 쓰고 찾아간 연길이라지만 또 어려서부터 문학에 집착, 타고난 재질을 나타내며 작가의 꿈을 굳혀오던 그라지만, 통화에서 태여나 매하구, 심양에서 살았던 그가 찾아간 《연길시》가 《농촌》임을 마주했을 때는 잠시나마 《눈이 감기》지 않을수 없은것이다.

그러나 며칠후 《연길공원》에서 한복차림에 중절모를 쓴 로인들이 부는 은은한 퉁소소리를 들으면서는 《조선에 오지 않았나?》고 착각할 정도로 신기하면서도 정다왔고 또 우전국, 백화점 등 봉사업체들에서 일색 조언어를 쓰는것을 보면서는  더없는 친근감과 함께 원초의 생각으로 회귀했다고 한다.

대학생시절부터 문학리론에 짙은 흥취를 느끼며 문학평론에 심취되였던 그인지라  졸업후 연변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은 문학강의 15년간 그는 적잖은 문학평론과 작품을 써내면서 점차 왕성한 창작시기에 진입, 문학평론과 작품 수십편을 발표했다.

신문학:  조선족 신문학교육의 개척자

최교수가 한창 문학강의와 창작 및 평론에서 전성기를 맞이하고있을 때인 1979년, 당시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부장이였던 정판룡교수가 문득 그를 찾았다. 문학강의를 접고 신문학강의를 새로 하라는것이였다. 15년간의 심혈이 고스란히 깃든 문학을 그만두고 신문학을 하다니?

당시 조선족언론(신문, 방송 등)의 력사는 짧지 않지만 여전히 실천의 차원에만 머물러있고 신문학 리론연구와 교육은 확실히 공백인것만은 사실이였다. 최교수는 일종 사명감을 안고 이 도전에 림해보기로 했다.

그는 즉시 국무원 지정 연수생명단에 뽑혀 신문학을 공부하러 상해로 파견되였다. 중국에서 신문학교육이 가장 발달한 상해복단대학 신문학부로 간것이다. 그는 이 곳에서 행운스럽게도 당시 복단대학의 부교장 겸 신문학부의 학부장이며 국내신문학리론 1호 인물이자  중국신문학교육계의 제1임 교수인 왕중교수를 도사로 모시게 되였다.

아래는 최상철교수가 왕중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이다.

《연변대학에 신문학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왔지요?》

《앞으로 신문학부를 내오려구요.》

《당신네 학교 지도부는 참 원견성이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는 정보화시대입니다...》 왕중교수는 거듭 치하했다.

그럴만도 했다. 당시 신문학학부가 있는 대학은 전국적으로도 4소뿐(중국인민대학, 북경방송학원, 상해복단대학, 화교대학인 광주기남대학)인데  변강의 소수민족대학인 연변대학에서 벌써 신문학부 설치를 구상하고있으니 참으로 원대한 식견이 아닐수 없었다. 현재는 물론 전국 100여개 대학교에 신문학부가 있다.

복단대학에서의 1년간의 연수는 최상철교수의 리론수양을 충실히 하고 향상했으며 금후의 신문학 교수와 연구에 튼실한 기초를 닦았다.

이듬해 연수를 마치고 연변대학에 돌아오는 즉시로 최교수는 신문학과 수업을 하는 동시에 신문학 학생모집과 교수연구 및 리론연구 사업에 착수했다. 그의 노력으로 신문학 교수와 연구 및 학과건설사업이 전면적으로 실질적인 운행단계에 들어섰다.

1983년 연변대학 신문전업이 끝내 교육부의 비준을 받고 탄생, 기자반을 모집  양성했다. 1990년부터는 신문취재편집전업이 정식 학생모집에 들어갔으며 이해에 또 신문학석사연구생을 모집하고 최교수가 직접 지도교수를 맡았다. 하여 연변대학 신문학학부는 현재까지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소수민족언어로 수업하는 대학교 신문학 학부로 되고있다.

신문학부 건립초기부터 그는 자신이 직접 수업을 하는외에 국내1류대학 및 국외대학의 이름있는 학자들을 청해다 교수를 한데서 학부는 그 기점이 높다. 교재도 자체로 편찬한것으로 중국, 조선, 한국 세 나라 내용을 다 흡수하여 종합했으며 《조선신문사》 등 외국신문사 강의는 다른 대학들에 없는것이다.

동시에 최상철교수 또한 조선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조선신문사를 연구, 한국에 가서도 수차 강좌, 국내외학술회의에도 빠지지 않는 등 최전연에서 달렸다.

1980년 신문학강의를 시작하여서부터 1999년 정년퇴직선을 넘어 2006년까지 옹근 25년간을 최교수는 줄곧 신문학리론강의로 우리 민족교육 교단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25년간을 걸치며 신문학에 대한 그의 결론이라면 《신문은 선전도구만이 아니라 하나의 완정한 독립적인 학문이고 하나의 세상》이라는것이다. 그는 또 21세기는 신문학세계이며 신문학의 지위는 앞으로 점점 더 상승할것임에 의심없다고 전망한다.

신문학에 몸을 담근 기간 최교수는 《중국조선족언론사》, 《중국조선족언론연구》, 《조선신문사》, 《신문출판사》, 《중국소수민족신문전파통사》, 《중국소수민족신문전파사》 등을 대표로 하는 21부의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으며 130여편의 론문을 여러 학술간행물에 발표, 국내외 신문전파학계를 널리 영향주었다.

이러한 최상철교수에 대해 연변대학 김병민교장은 《중국조선족신문전파학의 권위일뿐만 아니라 국내외 신문학계에서도 자신의 학술지위를 확립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받고있다》고, 중국인민대학 교수이며 중국신문사학회 방한기 명예 회장은 《중국 조선족신문전파교육과 신문전파학 연구의 개척자》라고 높이 평가하고있다.

언어학:  만년에 낸 인생의 도전장

길림화교외국어대학 한국어학부는 최상철교수가 연변대학 신문학부에 이어 창설한 또 하나의 새 학부이다.

그는 길림화교외국어학원의 간곡한 요청으로 2006년 7월 이 학원에 와 한국어학부를 세우고 학부장을 맡았다. 그해 이미 67세였던 그는 시초에 학원의 요청을 사절했었다. 그러나 종당에 응해나서게 되였던것은 한국어가 문학, 신문이라는 전업과 관련이 있는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리사회가 령도하는 공익성민영대학으로서의 이 학교가 당시 아주 훌륭한 교육리념과 관리체제를 이미 세워놓고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든데다가 이 학교 진화원장의 참된 인품과 원견성 있는 교육사상에 깊이  감복되였기 때문이였다.  최교수는 이를 문학, 신문학에 이은 세번째 인생도전에 대한 자신의 의미있는 응전이라고 말한다.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한국어학부는 최초의 5명 교원으로부터 24명으로 늘었으며 학생수도 4개학급의 100여명으로부터 16개 학급의 420여명으로 늘어났다. 학부는 자기의 언어문화 실습기지도 앉히고 학부내 신문도 있으며 특색항목도 개발중이다.

최교수는 한국어학부가 《아직도 완성이 아니다》면서 앞으로 교원수준이 향상되면 한국어연구소도 내올 타산도 밝힌다.

국가교육부로부터 《증헌재교육기금회우수교원상》과 《전국보통고등학교 인문사회과학 연구성과상》 등을 수상한 최교수, 많은 저서와 론문을 펴내고 국제학술 회의에도 수십차례 참가한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경력의 소유자인 최교수, 문학, 신문학, 언어학을 한몸에 집대성한 교육자로서의 최상철교수는 고희의 오늘도 젊은 청춘들에 못지 않은 정력으로 인민교육사업에 혼신을 불태우고있는것이다.

 *   *   *

학생들과 강의하는 순간만은 그렇게 재미나고 젊음을 되찾은듯한 기분이라는 최상철교수, 학기내에는 부인 방금선씨와 함께 학원의 전문가아빠트에 류숙하다가 방학이면 연길의 집이나 딸집으로가 아니면 상해의 아들집으로 훨훨 드나들며 천륜지락을 향수하는 최교수 부부의 행복한 만년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삼가 기원한다.


길림신문 박문희 김정함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쓸쓸한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려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시작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였다. 중국 옌볜에서 양팔이 없는 지체장애인 최금호씨를 사계절 따라다니며 카메라에 담았다. 방송은 반응이 좋았지만 김광호 감독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담고 싶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다큐멘터리에서 ...
  • 2008-07-04
  • 창립 4주년맞은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 대표 김해성 목사 ‘크레파스와 물감에 살색을 없애야....’ - 차별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진료 제공“감사하고 또 눈물이 납니다”국내에 하나뿐인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에서 만난 중국 심양이 고향인 김혜숙(52, 여)씨.김씨는 한국에 건너와 애기를 돌...
  • 2008-07-04
  • —현장총지휘 리종환씨를 만나 온몸으로 열심히 지휘하는 리종환씨,  그의 지휘하에 1만명도 훨씬 넘는 무용배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리종환씨는 이번에 자원봉사자로 나서 현장총지휘를 맡게 되였다. 연변군중예술관 부관장으로 대형행사때마다 총연출의 중임을 떠메였던 리종환씨는 퇴직한 몸이지...
  • 2008-06-29
  • 목단강지구 문과장원 - 외교관이 되고싶어요 대학입시 시험에서 659점의 성적, 흑룡강성 문과 장원의 663점 보다 4점이 떨어지는 성적을 따낸 해림시조선족중학교 고3-2반의 남홍옥학생이 목단강지구 문과 장원석에 올랐다. 《어제 저녁 동창들로부터 저의 시험성적을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뻐 했는데...
  • 2008-06-28
  • 환자의 아픔은 곧 의사의 아픔입니다연변대학병원 중의과 김향숙주임의 진찰권을 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 기다려야 겨우 뗄수 있다고 한다. 진찰권이 긴장하다는것은 그만큼 의술이 높아 환자량이 많음을 의미하지만 김향숙주임의사는 "환자들이 병원의 지명도를 보고 찾아온것이지 저 개인을 보고 온것이 아닙니다&q...
  • 2008-06-27
  • 《떼떼부부》가 며느리를 보게 되였다. 즉 《작은 떼떼》가 사귀는 녀자친구를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시키러 온다. 그런데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며느리감을 보고 왕청같은 말들을 늘여놓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는 며느리감을 보고 말한다는것이 로친한테 대고 말한다. 그래서 김광철은 난처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사리밝고 례...
  • 2008-06-15
  • 2년에 국가특허발명 5건 농민발명가 천해룡(53세)씨는 다년간 모색과 연구끝에 지난해와 올 상반년짧은 2년여 기간 ‘다기능 비누곽’, ‘정량분유채취기’ 등 국가발명특허를 3건 획득하고 2건은 현재 신청 출원중에 있다. 흑룡강성 오상시 광휘향의 조선족 농민 천해룡씨는 지난해 5월 ‘다기능...
  • 2008-06-14
  • 박민자 연변가정연구소 소장 통일의 밑거름으로 조선족 활용 기대  “조선족의 중국 이민정착사는 150년이다. 만주 땅을 개간하고 중국을 건설하는데 기여하여 당당한 중국국민의 위치를 확보했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코리안드...
  • 2008-06-13
  • "의사는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또 배운 리론지식과 실제경험들을 관통시켜야만이 진단의 정확률을 높일수 있다"고 늘 얘기하는  연변대학병원 소화내과 주임 박희서는 시골 아저씨와도 같은 소박하고도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평소 환자를 진찰하거나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할 때도 항상 차근차...
  • 2008-06-13
  • 중국관계자 중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난 두 차례의 한중올스타전 때 중국 올스타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방복순(69) 통역이었다. 방 통역의 한국과 인연은 벌써 18년이 넘어간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는 되지 않았지만, 스포츠 교류는 있었던 90년 김학영 국제심판과 중국인 심판의 가교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
  • 2008-06-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