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최홍송-모택동의 방탄차를 만들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10일 17시15분    조회:2211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국민족브랜드 《홍기》차의 공신 최홍송
 
최홍송, 그는 조선족기사로 모주석을 모셔 할빈시를 들썽하게 했고 중국의 첫 《홍기》차 생산에 참가하여 자동차업계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남다른 기술력으로  국무원의 신임을 얻어 중남해의 특수인물로 되였다. 

장춘제1자동차그룹 승용차공장 부공장장으로 있다가 리직휴양한 최홍송은 비록 84세 고령이지만 걸어온 지난날을 조리있고 빠짐없이 흥미진진하게 얘기했다.

 차와의 인연

최홍송은 1925년 3월 12일에 왕청현 라자구에서 태여났다.  16살때 그는 전씨 성을 가진 조선인 운전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운전기술을 익히고 차수리기술을 배웠다.

1945년 최홍송은 혁명에 참가한 형님을 찾아 도문위수사령부로 갔는데 당시 사령원이였던 요빈의 차를 몰게 되였다. 1947년, 요빈이 송강성(지금의 흑룡강성) 부성장 겸 할빈시 시장으로 가면서 최홍송도 함께 갔다. 그 이듬해 최홍송은 중국공산당원이 되였다.

 1951년 항미원조전쟁에 참가, 자동차기술참모로 있었고 1958년에 제남군구 모 부대로부터 전업하여 제1자동차공장 총조립작업장 홍기승용차개발소조에 배치되였다. 

그때로부터 최홍송은 장장 38년 동안 《홍기》와 정을 쌓았고 《홍기》의 소리만 들어도 어느 부분에 고장이 났다는것을 인츰 알아냈다.

모주석을 모셨던 행복의 날

최홍송이 25세되는 해 요빈의 운전사인 그는 요빈으로부터 《래일 내가 차를 쓰지 않겠으니 전면 검사를 한 다음 오전 8시에 성당위빈관에 대기해 있으시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0년 2월 27일 오후,  최홍송은 명령을 받고 기차역 귀빈실문앞에 차를 세워놓았다. 당시 할빈시는 안전상황이 좋지 않았는바 사전에 누구를 모셔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오후 2시쯤 누군가가 뒤좌석에 올랐다. 최홍송이 얼핏 보니 모주석께서 차에 오르는것이였다.

최홍송의 가슴은 삽시에 쿵쿵 뛰였다. 그는 핸들을 꼭 잡은채 굳어있었고 후시경으로도 감히 모주석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모주석의 옆에는  요빈이 앉고 운전사 옆좌석에는 당시 모주석과 동행한 왕동흥이 앉았다. 모주석께서는 쏘련방문을 마치고 할빈을 시찰하려고 잠시 머물게 된것이다.

최홍송은 《정신을 도사리고 차를 몰았다.》며 《그때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고 가슴이 부풀어오른다》고 말한다.

《나는 무슨 정신으로 빈관문앞까지 갔는지… 빈관에 들어서는 구간에 경사진 곳이 있는데 그때는 한창 겨울이라 길이 미끄러웠지요. 평소 요빈을 모실 때 그 곳을 지날 때면 차가 약간 움직거렸는데 모주석을 모시는 그날따라 묘하게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유. 빈관문앞에 당도하자 누군가 뒤에서 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어유. 뒤를 돌아보니 모주석께서 미소를 머금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  很好,很好! 謝謝 謝謝! 》하면서 나의 손을 잡아주셨어요.  나의 얼굴은 삽시에 화끈 달아올랐지유. 모주석께서 차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꼼짝 않고 운전석에 목석처럼 박혀있었지유. 후~, 조금 지나 주변에 있던 사업일군들이 우루룩 나의 차에 올라타고 나와 악수했어요. 모주석께서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보고 모주석께서 잡아주셨던 나의 손을 잡으려고.  얼마나 행복했던지…》

최로인은 《이튿날 나는 모주석을 모시고 할빈시의 공장들을 돌았어요. 그후 최홍송이란 이름이 할빈시에 널리퍼졌고 특히 조선족단체들에서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는 자호감을 느꼈대요》라며 행복에 잠겨있었다.

《홍기》차 생산 기술골간

1958년, 최홍송이 제1자동차 공장에 갔을 때 《해방》패 트럭을 만드는것만 배웠을뿐 승용차를 만들어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승용차제조대오라는것이 소조에 불과하고 작업장소도 총조립직장의 한쪽에 유리로 칸막이한 작은 방이였다. 거의 아무런 설비가 없다싶이 했고 생산라인도 없었다. 단지 몇명 기능공들이 뚝딱거리면서 세계급 고급승용차를 만들려고 했다.

《홍기》차 생산성공은 전적으로 정신의 걸작이며 민족의 기적이라 할수 있다.

최홍송은 오래동안 승용차를 몰아보았고 부대에서도 자동차기술참모로 있었는지라  자연 승용차소조의 기술골간으로 되였다.

승용차생산조건이 구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최홍송과 그의 동료들은 높은  정치적책임감과 모주석과 나라를  위해 승용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낮으로 일했다. 매일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일하고  식사를 걸으면서도 피곤한줄  모르고 배고픈줄 몰랐다.

1959년 봄, 1958년에 만든 견본차 토대우에서 좌석이 두줄인 《홍기 72형》 고급승용차가 기적적으로 탄생, 반년도 채 안돼 10대의 《홍기 72형》 승용차를 생산하여 국경축전에 보냈다.

5년후 30대의 《홍기 72형》 승용차가 또 북경에 진출,  건국 15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했다. 그후 국무원에서는  《홍기》차를 영빈차로 결정지었으며 구쏘련의 기스, 기므차를 대체했다.

1965년, 좌석이 세줄인 《홍기 770형》 고급승용차가 최홍송과 그의 동료들 손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중공중앙정치국위원이며 북경시 시장으로 있던 팽진이 《내가 시험해보고 선전해 줄게요》 하며 차를 남겼다. 팽진의 운전사에 따르면 팽진은 어디를 가나 《770형》 차에 앉았고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이를 민족의 자랑으로 여겼다.

1966년 나라에서는 《홍기》보험차(방탄차)를 만드는 임무를 제1자동차공장에 맡겼다. 나라에서는 모주석, 류소기, 주은래, 주덕에게 하루 빨리 보험차를 배치하려고 했다. 이 사업은 봉쇄된 상황에서 진행되였고 참가일군들에 대한 정치심사도 아주 엄밀했다. 최홍송은 당연히 이 대오의 기술골간으로 꼽혔다.

1969년 《5· 1》전야 첫대의 홍기보험차가 시험제작에 성공했다. 차조형이 좌석 세줄짜리 홍기차와 같았고 특수강철판과 두꺼운 유리를 채용했기에 방탄력이 강했다. 특수 제조한 다이야는 탄알이 꿰뚫어도 바람이 새지 않는 특수기능이 있었다.

최홍송로인은 《듣는 말에 의하면 당시  세계의  모든 방탄차중》홍기《보험차의 안전시스템이 제일 높았다. 그후  림표가 이 보험차에 앉아 도망칠 때  경위일군이 쏜 총알이 방풍용유리에 맞았는데 옅은 흔적만  남았을뿐이였다》며 자랑했다.   1972년  당과 국가 지도자들중 모주석이 제일 마지막으로  《홍기》보험차에 앉으면서 《홍기》승용차의 지위가 확정됐다. 



최홍송 에피스도
스스럼없이 중남해를 드나들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주은래총리는 자기의 6호 《홍기》보험차를 닉슨전용차로 사용하게 하고 부인은  좌석이 세줄인  《홍기》고급승용차를 사용하게 했다. 국무원에서는 최홍송을 《홍기》승용차의 특별 책임자로 지정했다.

북경에서의 방문을 마치고 닉슨은 항주에 가기로 했는데 승용차 두대를 군용운수기로 실어가야 했다. 운수기의 꼬리부분에 두개의 강철판을 걸쳐놓고  운수기안에 앞차와 뒤차 사이에  주먹만한 거리를 남겨두고 차 두대를 세워야 했다. 두 차가 충돌하면 전반 접대사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아슬아슬한 판이였다. 

국가지도자들의 운전수나 복무소의 운전수들중 최홍송을 내놓고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최홍송은 후~ 숨을 들이쉬고는 핸들을 잡았다. 엔진소리에 맞춰 차는 정확하게 철판을 올라탔고 온당하게 운수기안에 착 들어섰다. 두번째 차량도 오차없이 바로 첫차 뒤에 딱 멈추어섰다. 모두 혀를 차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운수기에서 내려올 때도 최홍송은 마찬가지로 아주 침착하게 차를 세워놓았다.

그후 최홍송이 없는 상황에서 사업일군들은 차 두대를 어깨로 메여 운수기에 올려놓고 북경까지 실어왔다 한다.

많은 《홍기》표 승용차가 북경에 진출하면서 제1자동차공장에서는 최홍송을 복무과 과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북경의 특수인물로도 되였다.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으며 국가의 중대 외사활동이 있을 때에는 꼭 그에게 《홍기》승용차 검사수리를 맡겼다.

1985년 제1자동차공장 승용차공장의 부공장장으로 있던 최홍송은 리직휴양하게 되였다.

많은 기업에서 높은 로임으로 그를  초빙하였지만 그는 승용차공장의  부탁을  받고 아무런 보수도 없이 장춘―중남해를 오가며 1996년까지 11년동안 장춘제1자동차공장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1991년 6월, 최홍송은 전국 자동차업계의 유일한 로간부대표로 전국 로간부선진단위, 선진일군표창대회 및 우수간부좌담회에 참석하여 강택민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故최은택 감독(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한양대 교수)은 여전히 연변 FC의 정신적인 지주로 기억되고 있다. 최 감독은 1987년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의 때 연변 오동(현 연변 FC)의 추명 부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1997년 최 감독은 2부리그 강등 위기에 처해있던 연변 팀의 요청에 따라 지휘봉을 잡는...
  • 2009-12-02
  • 조룡남시인과 부인 심월선녀사 조선족 여러 세대 어린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구전동요로 알려질만큼 반세기 넘어 애창되여온 명동요 《반디불》, 그 《반디불》의 작자 조룡남(75세)시인의 근황을 알아보고저 일전 기자는 연길시 하남가두에 위치한 그의 가택을 찾았다. 조룡남시인의 집에 들어서면 첫눈에 안겨오는것이 벽에...
  • 2009-12-02
  • 조상들 일군 땅 복지로 가꾸는 길마패촌 최촌장댁 《계주봉릴레이》3부곡프로필:최명우(崔明宇,1954년 3월), 길림성도문시월청향 마패촌 토박이촌장1970년대초 월청고중을 졸업하고 마을공청단서기로 활약1983년부터 호도거리책임제 농기구전업호1998년부터 마패촌 촌장 2003 촌장 겸 서기로 사업 2004년 연변주우성무공해농...
  • 2009-12-02
  •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고 정률성 ●  섭이 신성해와 나란히 《중국 3대  최고음악가》로 공인 ●  《새중국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100명》중 한명에 선정 ●   중국과 조선 두 나라 군대 군가를  작곡한 전대미문의 기록 새중국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중공 중앙선전부, 중앙...
  • 2009-12-01
  • 조계창 연합뉴스 선양특파원 순직(자료사진) "조계창 특파원, 정말 부지런했던 기자"한반도 문제.동북 3성 고대사에 정통"애정어린 관심으로 동포사회 취재..신망 두터워"(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 "직접 발품을 팔아 현장을 확인하고 취재원을 만나 직접 얘기를 들어야만 기사를 쓰는, 고...
  • 2009-12-01
  • 광양며느리, 중국 사법고시 '합격' 전라남도 광양읍에서 남문세탁소를 운영중인 김덕한(62)씨의 며느리인 이금산(28)씨가 9월 19일부터 이틀 동안 중국에서 치러진 제8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씨는 중국 하얼빈 출생으로 천징재경대학교에서 경제법을 전공했다. 2004년 졸업 후 현지 한국기업에 취업하고...
  • 2009-12-01
  • 《효도 존경 책임》을 실천하는 기업가 광주모드모아그룹의 리성일회장을 만나본다리성일 프로필: 1956년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 출생1972년 송원시 전고르로스 3중 졸업, 선풍촌에서 농사일, 유전일 등1975년 영길현 이도소학교 교사1977년 길림성교하탄광학교 (현재의 장춘석탄관리간부학원) 입학1980년 졸업후 길림시조선...
  • 2009-11-30
  • 음악예술을 꽃피우는 멜로디가정 ―저명한 음악인 안국민, 김인숙가정에 대한 이야기 중국조선족음악계의 거장으로 존경받고있는 안국민선생은 출중한 악대지휘이자 유능한 작곡가이고 부인 김인숙녀사는 그제날 연변가무단의 빼여난 독창가수였다는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이들 가정은 중...
  • 2009-11-29
  • 동포자녀들에 사랑을 심어주는 길에서 한국 4.19동포후원장학회와 이세현 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 김명환 서울특파원 = 한국 서울 성북구 보문동 6가 441번지, 큰길에서 좁은 언덕 받이를 굽이굽이 오르다보면 도심의 번화가를 등진 동네 한가운데 40㎡가량 되는 사무실이 있다. 검소한 집기들로 꾸며진 이 자그마한 공간...
  • 2009-11-26
  • 《문예시대》와 울고웃으며 인생을 엮는 시인한국 계간 《문예시대》 배상호사장을 만나 기자는 《장백산 모드모아 문학상》 세계문학상의 인연으로 배상호시인과 올해까지 두번째의 만남을 이루게 되면서 문학을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인격도야에 진정 탄복하게 됨과 존경스러움을 금치 못하게 되였다. 배상호시인...
  • 2009-11-2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