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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민영기업가 박광종회장의 창업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0월23일 08시26분    조회:7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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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 그는 가정의 전부 재산이나 다름없는 1800원짜리 저금통장을 지니고 결혼한지 일주일밖에 안되는 안해곁을 떠나 앞길을 가늠할수 없는 망망 창업대해속에 뛰여들었다. 산전수전을 경과한 오늘 박광종회장은  한낱 평범한 개체공상호로부터  흑룡강성 로동모범, 전국인대 대표로  당선되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으며 1억 6000만원의 자산, 산하에 7개의 기업, 20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당지에서 소문난 굴지의 민영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첫수확, 목재장사로  350원 벌다

박광종회장은 흑룡강성 경안현사람이다. 1993년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12월 6일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금통장에서 전부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1800원을 몽땅 찾아내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간직하고 산길을 재촉한다. 목재장사를 해보려고 산중에 있는 림장을 찾아나섰다. 원목을 차에 싣고 립방수에 따라 계산하니 2060원이 나왔다. 림장에서는 260원이 모자란다면서 차를 가로막고 못떠나게 하였다. 박광종이 급해서 막 안달아하고있을 때 반갑게도 면목을 아는 사람이 눈에 띄였다. 그는 무작정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그분이 선뜻 나서서 담보를 서고 자신의 신분증까지 저당잡혀서야 겨우 산에서 내려올수 있었다.

《목재를 팔아 350원을 벌게 되였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장사라 저는 기뻐서 온 밤을 뜬 눈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곧바로 림장에 찾아가 나머지 260원을 갚아주었지요.》

이렇게 그는 개털모자를 꾹 눌러쓰고 령하 40도씩 되는 북방의 림해설원의  무릎팍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힘겹게 헤치면서 6년동안 산장을 누볐다. 여기서 그는 어떤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더욱 강한 의지력을 가지게 되였으며 미래 경영에 필요한 경험과 창업자금을  마련할수 있게 되였다.

위기를 기회로 상업 부동산에 투자

1999년 국가에서 삼림보호정책을 실시하고 채벌량을 대폭 줄이게 되자 원목장사를 하는 그로 말하면 큰 위기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위기, 말그대로 위험과 기회의 동반이라고 위험을 기회로 만드는 담략과 지혜가 필요했다.

2000년 치밀한 시장고찰을 통해 박광종은 당지에 대형상업마트가 없다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과 100만원을 공동출자하여 경안동원상업무역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상업무역에 본격 뛰여들기로 결심하였다. 가족과 친지들은 본전까지 떼울수 있다면서 반기를 들었으나 여기서 물러설 그가 아니였다. 자신이 그동안 모은 자금으로 대형마트를 건설하려면 태부족, 그는 당지 정부를 찾아나섰다. 정부에서는 그의 계획보고서를 듣고 찬성하면서 은행과 협상하여 대출을 받을수 있도록 적극 도와나섰다. 주체공사가 끝나고 장식을 해야겠는데 자금이 거덜났다. 그는 또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빌릴수 있음직한 곳에는 비위를 무릅쓰고 다 찾아갔다. 이렇게 2001년 음력설 전야에 드디여 850만원을 투자한 6000여평방메터의 상업무역빌딩이 박광종의 첫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한동안의 노력을 거쳐 동원상업무역성은 전 현적으로 이름있는 쇼핑쎈터로 자리잡았다.     박광종은 이를 계기로 2002년부터  상업과 부동산령역에 동시에 투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회사는 일사천리의 기세로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2002년부터 2004년사이 그는 선후로 5600만원을 투자하여 세개의 상업무역빌딩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2005년에는 2300만원을 투자하여 3성급호텔을 건설하였다. 지금까지 그가 개발한 부동산은 20여만평방메터에 이르며 4개 공사가 선후로 당지의 량질공사로 평의되였다.

사회적책임감 민영기업가도 당연히 한몫

직원들과 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기업과 사회가 아름다운 멜로디마냥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하는것이 박광종회장의 바람이자 철학이다. 성공적인 기업가라면 리익창출뿐만 아니라 사회적책임감을 다하는데 응당 선두에 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고있다. 그의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 2000여명은 대부분 당지의 실업일군이다. 그중에는 조선족 실업일군도 38명이 포함되여있다.

  농민의 아들인 그는 고향을 한시도 잊어본적이 없다.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을 계기로 지난해 그는 정부와 련락을 취해 고향마을의 촌민위원회 부주임을 맡을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60여만원을 투입하여 마을에 아스팔트길을 새로 닦고 가로등을 설치하였으며 78세대에 달하는 모든 농가에  철대문을 만들어주고 집집마다 화장실까지 새로 지어주었다. 올해에는 또 마을에 문화회관을 새로 건설하고 인터넷광케이블을 들여왔다. 

박광종회장은 지역 조선족사회에서 매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도와나서는 민족애가 깊은 기업가이기도 하다. 지난번 경안현조선족운동경기때에도 그는 2만원을 보내왔다.  생활이 어려운 회사의 직원과 자녀들의 학업 등에 지원하는 성금은 한해에 십만원을 넘긴다. 사천 문천지진때 회사에서는 20만원의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이 몇년래 기업은 재생산에 거듭 투자하느라 숨 돌릴 새도 없이 바빴지만 장학금지급, 불우이웃 돕기와 기타 공익사업에 쓴 돈은 무려 800만원이나 된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않듯이 박광종회장은 당년에 정부가 주었던 도움을 잊지 않았다. 지난 3년동안 경안현과 망규현 시정기초시설건설에 먼저 투입한 회사의 자체 자본은 4700만원이나 된다. 

현대기업 인재를 잡아야 산다

박광종회장에게 있어서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인력자원이다. 자신이 몸소 겪은 경험으로 이를 너무나 절실히 느낀것이다.

2001년 음력설전야 동원상업무역성은 개장한지 얼마 안지나 관리와 마케팅, 경험 등 허다한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불황에 빠지고말았다. 매장은 고객들의 발길이 뚝 끊기여 한산하기만 하였다. 채무까지 한가득 짊어진 그를 놓고 말하면 사활을 결정짓는 더없는 위기의 고비였다. 문제의 핵심점은 바로 인재의 부진에 있다고 판단한 박광종은 대담히  가장 높은 대우로 외부에서 관리능력과 경험을 겸비한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3번이나 남방시장을 고찰하면서 끝내 기업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기업은 초기의 가족식관리로부터 현대적관리체계로 전면 탈바꿈하였으며 박광종회장의 경영진에는 유능한 전문인재들로 결책이나 관리 모든 면에서 최선의 방안을 내오는데 막히는것이 없다. 청화대학, 길림대학, 할빈공업대학 등 국내 우수한 대학들을 졸업한 나젊은 인재들이 있는가 하면 정부에서 처장으로 있던 간부, 경제위원회에서 주임으로 있던 사람, 상업국장, 중소기업국장 등 경험이 풍부한 관리인재도 있다. 또 기업에서 공장장으로 있던 기업관리인재 그리고 기사, 회계사, 경제사, 1급건축사 등 고급직함을 가진 기술인재들도 회사의 버팀목으로 현장 곳곳에서 한몫 튼튼히 하고있다. 박광종의 기업은 인재영입, 인재에 대한 과학적 관리와 경영을 통해 거족적인 경제효익을 창출하였을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어가고 기업이미지를 수립하는데서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박광종회장은 시장경제하에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다 주어진다면서 관건은 본인이 이를 발견하고 다잡고 성공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만약 15년전 그 엄동설한에 얼마 안되는 집의 전부 저축을 갖고 산장으로 떠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또 산더미같은 부채를 짊어지고 감내하기 어려운 고생을 사서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현실은 꿈꿀수도 없었을것이라면서 창업은 용기와 패기, 혈기와 끈기로 도전하는 정신을 가장 필요로 한다고 강조해 말했다.

기자: [리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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