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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 성공한 녀강자-전복녀경리의 창업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4월8일 15시02분    조회:10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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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시영결쿠크도구경영판매부 전복녀경리의 창업이야기

1990년대초기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나가기 위해 갈팡질팡할 때 심양시 황고구 명렴지역의 전복녀(56)씨는 남편과 함께 15평방메터의 영결쿠크도구생산공장을 꾸리고 부지런히 기업을 키워 지금은 여러개의 경영판매부를 가진 경리로 활약하고있다.

영결쿠크도구공장의 탄생

1965년 심조1중을 졸업한 전복녀씨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화평촌(현재의 화신그룹)으로 환향하게 되였다. 고추는 작아도 맵다고 연약하고 왜소해보이는 몸매와는 달리 그의 재빠른 일솜씨는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1977년 전복녀씨는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마삼가자에 살고있는 장상철씨와 결혼했다. 그때 친척들의 소개로 북시장의 모 가감저항기공장의 전기용접기작업장에서 일하게 된 그는 워낙 일솜씨가 좋은데다가 리해능력이 출중하다보니 일년도 되지 않아 전기용접기를 조립할수 있는 기술자로 성장했고 검사원에 보관원까지 책임지게 되였으며 공장에서 항상 선진인물로 당선되였다. 당시 남편 장상철씨는 시공안국후근기사로 일하면서 스위치상자공장의 기사와 친구로 사귀게 되였는데 그 공장의 일감이 많을 때는 늘 장상철을 찾아 도움을 청하였다. 이 공장의 스위치상자가 잘 팔려나가는것을 보면서 이 장사를 하면 돈을 벌것 같은 생각에 1984년 15평방메터의 작은 집을 맡아 “영결”이라는 이름으로 공장을 차리고 스위치상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심양에서 가정용 소형배연기가 잘 팔린다는 말을 듣고 남방 배연기생산공장으로 고찰나갔던 그들부부는 그자리에서 소형모터오다를 따와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신근한 노력이 “영결”을 창조

자신의 공장이 있게 되자 전복녀씨는 가감저항기공장을 사직하고 창업을 시작하였다. 남편은 상품생산을 책임지고 그는 서탑부근에 자그마한 가게를 앉히고 판매를 책임지면서 부지런히 오다를 따왔다. 가정필수품이였던 배연기는 값이 싸 환영을 받았고 전복녀부부도 돈벌이에 재미를 붙이게 시작했다.

1990년대초는 심양시에서 불고기장사가 호황기를 맞을 때였다. 불고기집에 배연기가 수요될것이란 생각에 그들부부는 심양시를 누비며 시장조사를 나갔는데 생각밖으로 소형배연기수요량이 많았다. 그들은 인차 소형배연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창업초기 전복녀씨는 추운 겨울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애들을 학교에 보낸후 공공뻐스를 여러번 갈아타고 가게에 와 화로를 피우고 꽁꽁 언 발과 손을 녹이면서 부지런히 일했다. 이렇게 매일마다 저녁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온몸이 쑤셔나고 손발이 부어나 움직일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복녀씨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사업을 잘해내고야말겠다는 생각만은 굽히지 않았다.

1990년대 소형배연기생산으로 상해에서 첫번째 금덩이를 쥔 전복녀씨는 시장의식이 앞서있다. 한번은 전복녀씨의 가게에 로무로 한국에 나가 불고기음식점에서 일한적이 있는 중국료리사가 찾아와 웬 돌판을 내놓으면서 이런것을 사겠다고 했다. 이 료리사를 통해 이 돌판에 구운 불고기가 맛이 특별하고 고소하여 그가 일하고있는 불고기점의 장사가 항상 초만원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중국료리사가 돌아간후 전복녀씨는 한국에 있는 여러 상인들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이런 모양의 돌판을 구해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전복녀씨는 구입한 상품을 들여오자마자 당날로 몽땅 팔게 되였다. 이 일이 있은후 그는 부지런히 새로 오픈한 식당에 가보았고 어떤 류형의 식당에는 어떤 상품이 수요되는지를 판단하여 제때에 물건을 구입하는데 신경을 썼다.

조선족도매상들이 한국물품을 구입해 돈을 많이 번다는것을 알게 된 한국상인들도 심양에 와서 쿠크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하게 되자 전복녀씨에게는 더욱 많은 경쟁자가 생겼다. 이런 환경에서 쿠크생산판매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신제품을 연구개발해야 했다. 영결쿠크생산공장의 기술자들은 어디에서 신제품이 나왔다고 하면 제시간내에 신제품을 만들어내며 상품갱신연구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은 상하향식 사각, 원형 숯불로스타, 한식, 일식 하향숯불로스타, 각종 불고기판, 불수강석쇠 등을 비롯해 각종 “영결”표 로스타를 연구개발하여 판매해 고객들의 환영을 받게 되였다. 현재 영결쿠크공장은 4,000여평방메터의 건물을 갖고있으며 서탑 등지에 3개의 가게도 성업중이다.

가정화목은 사업성공의 기반

전복녀씨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은 가난이였다. 엄마가 허약하여 모든 가정생계는 아버지의 수입에 의거해야 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새옷이 생기면 맏이가 먼저 입다가 형제가 차례로 물려받아 입어야 했고 명절이면 동생들에게 새옷을 사입히다보니 둘째인 그는 항상 낡은 옷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너무나 곤난하여 형제 여섯이 한이불을 덮다보니 늦게 이불속에 들어가면 이불도 덮지 못하고 잘 때가 많았다. 이런 환경속에서 생활하면서 두터운 형제의 정을 길러왔고 강한 의력을 키워온 전복녀씨는 성미가 시원시원하고 소탈하였으며 승벽심이 강했다.

지금 그의 큰언니와 다섯째녀동생과 여섯째녀동생은 그의 가게에서 함께 일하고있고 셋째동생은 복장사업을 하고있으며 넷째녀동생내외도 쿠크생산판매를 하고있다. 항상 서로 보듬어주고 단결우애하는 그들 여섯형제를 서탑지역의 이웃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들 형제 여섯은 늘 사우나도 같이 다니고 상점도 같이 다니며 공원놀이도 함께 다니므로 서탑지역에서는 그들 형제들을 “화목한 형제”라고 부러워하고있다.

전복녀씨는 이렇게 상호간 단결우애하는 형제들이 있는것이 일생에서 제일 큰 재부라면서 장사가 호황을 누리고있는것도 다 그 덕이라고 말한다.

전복녀씨는 가정과 사업이라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웠다. 현재 큰딸은 대련재정학교를 졸업하고 상주시 오금구초상국에서 일하고있고 둘째딸은 엄마처럼 훌륭한 기업가로 되고싶다며 일본에서 경제관리에 관한 공부를 하고있다.

신체건강은 사업의 밑천

전복녀씨는 무슨 장사를 하든지 신체가 건강해야만이 기업을 더욱 크게 발전시킬수 있다고 한다. 왜소하고 연약한 그는 신근한 노력으로 성공한 기업을 일떠세우고 “영결”을 창조해냈지만 자신의 건강을 잃었다. 건강이 밑천이라는것을 뒤늦게 안 그는 건강에 좋고 사회에도 유익한 각종 사회활동에 참가하면서 건강관리에 소홀히 하지 않고있다. 몇해전부터 그는 심양시조선족부녀협회 리사로 활약하면서 부녀협회에서 조직한 무용조에 들어가 무용을 배우고있으며 화신예술단에서도 무용배우로 활약하고있다. 사업을 하는 짬짬이 시간을 내여 춤을 련습한 그는 여러가지 시합에 참가했는데 2006년에는 “덕예쌍형”전국문예전시활동에서 단체무용 “달빛아래”로 금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전국로년“재예의 새별” 무용경기에서 단체무용 “장고춤”으로 금상의 영예를 안아왔다.

나이에 비해 젊어보이고 활력이 넘치는 전복녀씨,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다 발휘하여 심양에서 영결쿠크생산판매의 기적을 이루어낸 그가 현재 품고있는 소망은 “영결쿠크”를 자식들에게 물려줘 쾌속 발전해가는 사회속에서 한층더 발전시키는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늘 상업관리와 관련된 지식을 자식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도 가끔 다니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있는 쿠크도매상과도 교류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있다. 

최수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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