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조선족문화예술중심 국가1급연주원 박미화는 당시 옥류금과의 만남이 실로 뜻밖이여서 꿈만 같았다고 한다.
1979년, 전 주 중학생음악콩클이 연길에서 있었다. 당시 왕청현의 한 중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한편 가야금을 열심히 익힌 박미화는 콩클에서 그간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당연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행운이 뒤따라 연변1중에서 공부를 하면서 가야금을 전공할수 있는 기회까지 따랐다. 7명의 전도유망한 학생이 연변1중에서 문화과공부를 하면서 연변예술학원의 조예깊은 교원들의 강의도 받았다. 졸업뒤 연변예술학원 입학까지 약속되여있었으나 그해 명액이 없어 박미화는 연변예술학원 진학이 물 건너가 버렸다.
1982년, 도문시가무단에 배치받은 박미화는 1년간 도문시가무단에서 가야금연주원으로 있었다. 꿈같은 행운의 신이 그에게 손짓했다. 당시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리록순부단장이 북경의 국가민족사무위원회를 통해 조선에서 옥류금을 구입해들여왔는데 마땅한 연주자를 고르던끝에 박미화를 지목했던것이다.
가야금은 23줄, 옥류금은 33줄이고 현재 37줄로 개량되였다. 옥류금은 조선에서 개량된 악기인데 1970년대초 평양의 한 첼로연주자가 개발했다고 한다. 옥류금은 그뒤 빠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는데 주로 독주용으로 쓰인다. 서양악기인 하프소리를 닮았고 연주법은 가야금과 비슷하다. 페달을 밟으면 변조가 되는데 소리가 옥이 구르는 소리같다고 해서 옥류금(玉流琴)이라 이름지었다. 박미화는 옥류금은 처음 만져보지만 결국 눈과 손에 설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옥류금재주를 익히고 익혔다. 1985년 전 주 전업단체기악콩클에서 얼마동안 다루지 못한 악기 옥류금으로 그래도 3등상을 수상했고 그 이듬해 성청년기악콩클서는 2등을 따냈다. 그의 옥류금기량은 나날이 향상되여 1990년 길림성신인작품음악콩클에서 드디여 1등의 월계관을 받아안았다. 중한수교전에 박미화는 옥류금을 가지고 한국에 갔었다. 출입경검사를 받을 때 한국의 검사일군이 무슨 악기인가고 물었다. 박미화는 가야금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한국에는 옥류금이라는 악기가 없었다. 박미화는 한국국립국악원에서 7개월간 거문고를 배웠다. 옥류금연주에 도움이 되는 공부였다. 그뒤 한국KBS방송의 《국악춘추》프로에 출연하여 옥류금을 선보였고 또 울산 KBS홀에서도 독주회를 가졌다. 그는 옥류금을 한국국립국악원에 기증했고 선물로 거문고를 받았다. 1993년 9월부터 그는 또 장학금을 받으면서 국립국악원에서 1년간 더 공부를 할 기회를 가졌고 초청을 받고 한국 리화녀대, 한양대, 서강대, 국립국악원, 전남 광주대, 목포대 등에서 옥류금특강을 했다. 한국학생들은 옥류금에 대해 차츰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다. 박미화는 또 1996년 서초 예술의 전당에서 있은 MBC문화방송송년음악회에서 김덕수사물놀이패와 안치환, 리선희 등 한국유명음악인들과 함께 무대에서 공연했고 1995년에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립초창기에 악사들에게 가야금연주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전통악기의 연주에서 달인이 많다. 경제가 발달한 나라치고 전통악기의 보존이 그렇게 잘되여있는것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박미화는 연변의 일개 악사인 자기가 한국에서 가야금강의까지 하려니는 생각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박미화는 그뒤에도 2001년 대구시립예술단과, 2003년에는 전북도립국악원과 협연으로 옥류금독주를 했고 특히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10돐맞이 동남아 12개 나라 악사들이 모인 아시아음악제에서 옥류금독주를 해 한국에 옥류금을 선보이고 옥류금의 아름다운 소리를 전파하는데 큰 몫을 했다.
박미화는 2005년 10월초 심양에서 열린 제2회전국소수민족특색악기콩클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작년에는 국가1급연주원으로 되였다. 박미화의 옥류금연주는 기량의 향상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선물할것이다.
김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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