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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호 선생의 예술인생을 찾아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9월20일 09시30분    조회: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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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명한 조선족작곡가 김봉호(金鳳浩)선생을 처음 만나 뵙게 된 것은 아마 2004년 여름도 다가고 있던 초가을쯤으로 기억된다. 내가 연변작가협회에서 주석으로 있으며 문단의 사무를 맡아 볼 때였다.

어느 날 오후, 연변문련 산하에 있는 연변음악가협회의 비서장 류영근(柳永根)씨의 안내에 김봉호 선생이 연변작가협회 사무실로 찾아왔었다. 우리는 예술과 노래창작에 관련된 일로 두루 대화를 나누다가 모아산기슭에 자리 잡은 려산화원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하였다.

김봉호 선생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성격도 너무 조용하고 겸손하였다. 어쩌면 내성적이기까지 했다. 술은 나처럼 소주 한잔이면 얼굴이 인차 홍당무가 되는 유형이라 구태여 권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 좋았다. 그래서 상대하기 편했으며, 서로 관심하는 화제가 있어 분위기가 어울리고 한결 즐거웠었다.

“어떻게 보양을 잘 하셔 그렇게 젊어 보입니까?”라고 거듭 묻는 나의 말에 김봉호 선생은 그저 사람 좋게 웃기만 하였다.  음악예술가로서 다년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세월의 갖은 시련과 세파 속에서도 항상 마음에 아름다운 선율을 담고 사는 인생이기에 실제 연령에 비해 엄청 젊어 보이고, 청춘의 낭만이 생명과 함께 시시각각 약동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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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호 선생은 연변출신이자 저명한 조선족작곡가여서 연변의 큰 문화행사에는 거의 초청을 받아 참석하시는 상황이다. 근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주최하는 허다한 문화행사를 통해 전국에 연변을 홍보하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져 예술가들이 꽤나 중시를 받고 대접을 받는 시기이다.

그래서 김봉호 선생은 해마다 몇 번씩 북경에서 연변으로 다녀갔다. 김봉호 선생이 작곡하고 연변 주 인민정부 부주장 이결사(李潔思) 여사가 작사하였으며 중국의 저명한 여가수 오벽하(吳碧霞)가 부른 ‘장고소리 둥둥 울려라’(長鼓咚咚敲起來)란 노래가 요즘 한창 히트를 치고 있어 인기화제로 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 하에 난생 처음 내가 쓴 가사 ‘장백송’(長白頌)이 중국의 저명한 조선족작곡가 장천일(張千一)씨가 작곡하고 저명한 조선족가수 김학봉(金學峰)씨가 열창해서, 2000년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가지게 되는 ‘중국조선족민속문화관광박람회’의 주제가로 줄곧 선정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나와 김봉호 선생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도 끈끈이 이어져 갔다. 매번 연변에 오게 되면 김봉호 선생은 나부터 찾았고, 우리는 어느덧 망년지교(忘年之交)가 되었다.

우리는 창작에서도 손을 잡았다. 내가 작사하고 김봉호 선생이 작곡하여 근년에 연변노년협회의 회가로 선정된 ‘격졍에 불타는 세월’과 ‘권주갗 등 노래작품들은 꽤 히트를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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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호 선생은 1937년, 조선함경남도함흥시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에 부모님을 따라 전 가족이 중국 길림성의 화룡현으로 이주하게 되였다.

김봉호 선생은 1957년에 화룡현문공단에 시험을 쳐 합격되어 배우 ․ 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6월, 그는 중국 음악가협회 연변분회의 회원에 가입하였고, 1974년에 길림성 문화국 부국장으로, 1978년에는 길림성음악가협회 부주석 겸 길림성문련 위원으로, 1984년에는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 정치부문공단의 예술지도로 승진, 임직하였다. 그간 그는 중국 음악가협회 제4기 상무이사, 중국조선족 음악연구회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 은퇴 후 지금은 중국 음악저작권협회 이사, 중국 음악문학학회 회원, 중국 소수민족성악학회 이사로 활약하고 있는 중이다.

김봉호 선생의 대표작품으로는 무용음악작품 ‘홍매송’(紅梅頌), ‘장백산아래의  대채사람들’(長白山下大寨人), 노래 대표작으로는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延邊人民熱愛毛主席), ‘붉은 태양 변강 비추네’(紅太陽照邊疆), ‘떼목 노러 (我爲革命放木排), ‘당의 빛발 연변 비추네’(黨的光輝照延邊), ‘위대한 조국은 어디에나 백화만발’(衛大祖國百花吐艶), ‘아름다운 마음’(美麗的心靈), ‘금북과 은북’(金梭和银梭), ‘작은 썰매’(小爬犁), ‘쫭족아가씨’(壯家妹)등이 있다.

그는 국가급, 성시급 여러 가지 상을 무려 100여 차나 받았다. 그중 ‘아름다운 마음’은 1980년 국가문화부에서 평선한 8수의 ‘전국인민이 즐겨 부르는 노러에 선정되었고 1980년에 유엔아시아태평양지구 음악교재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가 작곡하고 이재린이 작사한 ‘친선의 꽃 길길이 피여나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86년 년감(年鑒)에 수록되기도 했다. ‘당의 빛발 연변을 비추네’는 몇 해 전 김봉호 선생의 고향인 화룡시의 시가로 확정되어 널리 애창되고 있다.

김봉호선생은 이미 ‘당의 빛발 연변을 비추네-김봉호 가곡집’, ‘김봉호 가곡선’, ‘김봉호 성악작품집’, ‘아름다운 마음-저명한 작곡가 김봉호 작품 전집’ 등 작품집과 CD 음반을 중국어와 우리 민족어로 출판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음악 이론을 고심히 탐구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선후로 중앙방송국, 중앙 TV방송국, 인민일보, 광명일보, 민족단결 등 중국 국내의 매체와 중일신문, 조선노동보, 조선TV방송국 등 국외의 신문매체의 전문 취재를 받았으며 1996년에는 ‘빛나는 중국 노래 20년’의 작곡성과상을 수여 받았다. 김봉호 선생의 업적은 ‘중국예술가사전’, ‘중국대백과전서’(음악권), ‘중국당대문화예술명인 사전’, ‘음악 감상’등 권위적인 사서(辭書)에 수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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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호 선생이 다년간 끈질긴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는 줄곧 세인들의 절찬을 받아왔고 음악계의 높은 평가와 충분한 긍정을 받아 왔었다.

그는 자기의 훌륭한 작품으로 하나하나의 영예를 취득하였고 예술탐구의 확실한 발자국으로 중국 음악계에서 가장 우수한 음악가 중의 한분이라는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연변을 훌륭히 홍보했고 중국조선족의 위상을 크게 떨쳤다. ‘장백산’, ‘해란강’, ‘연변’, ‘조선족’ 등 이러한 지명과 인명들은 최초로 김봉호 선생의 노래작품에 의해 전 중국에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전국각지에서 모명이래(慕名而來) 연변을 찾고 장백산을 찾는 관광유람객들이 늘어나 전국을 놀라게 하였다.

필자는 어렸을 때 중앙방송국 라지오방송에서 김봉호선생의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와 ‘붉은 태양 변강 비추네’를 들으며 자랐다. 문화대혁명시기 그 노래 절주에 맞춰 전 중국인민들이 곳곳에서 ‘쭝즈우’(忠字舞)를 추던 정경들을 생각하면 그 당시 그 노래가 지녔던 지대한 영향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봉호 선생이 작곡한 그 몇 수의 노래는 당시 전 중국과 중국의 전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율로 부상되어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극좌 착오노선으로 오늘에 와서 가사들은 가능하게 비난 받을 수 있겠지만, 선율만은 여전히 수많은 중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성대한 국가급 문예행사나,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중앙TV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춘절만회에서도 애창가로 선정되곤 하였다.

최근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와 ‘붉은 태양 변강 비추네’는 일찍 문화대혁명 전에 이미 한윤호 선생이 작사하고 김봉호 선생이 작곡한, 순전히 우리말로 창작된 고향산천을 노래하고 새 농촌건설을 구가(謳歌)한 노래였었다.

그러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김봉호 선생과 한윤호 선생은 다시 노래의 제목과 내용 및 선율을 수정하였고, 한어와 가사에 능한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거듭 다듬어 지금까지 유행을 타는 노래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한창 열광적으로 진행되던 1968년 겨울,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와 ‘붉은 태양 변강 비추네’는 길림성 당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중앙인민방송국의 중점방송프로로 낙찰되었다. 엄청나게 까다로운 최후의 결정은 주은래 총리가 ‘동의’라는 친필 회피(會批)를 해서 확정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인민일보’에서는 ‘붉은 태양 장백을 비춘다’(紅日高照長白山)라는 뚜렷한 제목으로 사론을 발표하여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성립을 축하하였고, 노래도 날개를 단 듯 전파를 타고 전국과 세계에로 퍼지기 시작하였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김봉호 선생은 청춘과 자유분방한 예술기질을 되찾았었다. 그가 열심히 작곡한 ‘금북과 은북’, ‘아름다운 마음’ 등 노래작품들은 또 한 번 전국적으로 히트를 치게 되었다. 금방 문화대혁명이라는 재난 속에서 헤어 나온 전 중국인민들은 김봉호 선생의 노래작품에서 영혼의 깊은 곳을 울려주는 충격을 받았고 엄동을 지나 봄을 맞는 인성의 격정과 랑만을 때 늦게나마 감지(感知)할 수 있게 되었었다.

한 수의 노래가 불러일으키는, 일망무제한 수림과 바다의 묵중한 설레임과도 같은 정서와 정열! 그에 따른 한 세대, 한 시대를 지대하게 영향 줄 수 있는 가능성들이 김봉호 선생의 그런 노래작품들에서 생동한 현실로 재현되고 있음을 세인들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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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민족이 음악에 대한 감지와 이해에 천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민족과 더불어 다원적인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이렇게 거대한 중국이라는 통일체 나라에서, 조선족은 인구가 겨우 200만 밖에 안 되는 한낮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 중에서 이미 전 중국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음악가들이 나타나 세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는가. 정률성은 중국과 북한,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저명한 작곡가이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외에도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음악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사람들로는 김정평, 김봉호, 장천일 등이 있다. 그이들의 음악작품은 민족성을 바탕으로 하고 중국의 여러 민족이 모두 접수할 수 있는 통속적인 음악요소를 활용해 전국 인민들의 마음을 울리는 우수한 음악작품들을 창작해낸 것이다. 한개 민족의 정열, 감정, 성격 내지 전반 정신적 기질은 가능하게 음악이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생동하고, 가장 완미하게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김봉호 선생은 중국 음악예술계의 출중한 음악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이기에 우리에게 더 큰 긍지감과 자신심을 가져다준다.

중국에는 ‘덕예쌍형’(德藝雙馨)이라는 성구가 있다. 봉호선생과의 상종에서 나는 그의 음악천부와 그의 소박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인간미를 충분히 보아낼 수 있었다. 김봉호 선생의 작품과 인품이 쌍벽을 이루어 제두병진(齊頭幷進)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 민족 음악예술분야나 전국적인 음악예술분야를 막론하고 모두 입 모아 극찬하고 있는 현실이다. 

시장경제의 부대낌 속에서 배금주의로 하여 초래되는 핵심적인 주류사회의 가치관이 혼돈되고, 기본적인 시비계선마저 뒤죽박죽이 되는 오늘, 우리는 양심과 영혼을 팔아 금전과 이득을 챙기는 소위 예술가와 문화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봉호 선생은 네온등이 반짝이는 황홀한 외부의 유혹에 곁눈 한번 팔지 않고 명리를 뒷전으로 착실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끈질기게 예술에만 심취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처장으로 임직하고 있는 김봉호 선생의 부인 임오정(任烏晶) 여사는 봉호 선생의 인생관과 처사에 대해, 항상 꾸지람과 푸념 섞인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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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는 옛적부터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성구가 있다. 올해는 김봉호 선생 탄생 70주년이다. 일흔 고개에 올라선 김봉호 선생, ‘고래희’를 맞은 김봉호 선생은 자기의 인생길을 돌이켜 보며 감개무량을 금치 못한다. 어제와 같던 청춘시절은 점점 멀리 사라지고 있지만, 인생의 앞날을 전망하면서 그는 민족과 나라와 시대에 마냥 감동과 감격과 감사의 마음에 흠뻑 젖어 젊은이와 같은 흥분을 도저히 감추지 못한다.

올해 여름의 어느 하루, 일흔 생일날을 맞은 김봉호 선생은 연변의 화룡시 아동저수지 산봉우리에 올라 청산녹수로 꾸며진 아름다운 산천을 마주하고 푸르른 청천을 우러러 목청껏 노래 부르며 인생의 회포를 한껏 풀었었다.

옛적부터 ‘생유애 예무애’(生有涯 藝無涯)라고 하였지만, 예술이 지경이 없듯 예술가의 인생도 예술처럼 멋지게 살아가면 역시 지경이 없는 것이다. 김봉호 선생의 인생이 바로 지경이 없는 그런 인생이 아닌가! 예술창작을 위하여 그는 오늘도 부지런히 연변의 금수강산을 누비고 있다.

그렇다, 그는 오로지 예술작품으로 세계와 우리와 대화를 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 정력이 왕성하고 창작력이 왕성하고 생명력이 왕성한 젊은 김봉호 선생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9월 12일

 연길 신원아파트 일촌재(一村斋)에서

 김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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