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로팔균회장-민족사업에는 정년퇴직이 없어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5월15일 11시10분    조회:811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심양시조선족련의회 로팔균회장의 마음다짐 

 60세를 종점으로 때가 되면 좋건 싫건 정년을 맞이해야 하는것은 공직사회의 불문칙이다. 평생의 정력을 몰부었던 정든 사업터를 떠나야 한다는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 더구나 사회적인정과 뭇사람들의 공경을 한 몸에 받아오던 지도적위치에서 물러나야 한다는것은 한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지도적위치에서 물러난 이들중에는 《리직》 또는 《퇴직후유증》이란 병아닌 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지도자로부터 평민으로의 과도기에서 중요한것은 《심리조절》이다. 심리조절이 잘돼야 마음의 평온을 찾을수 있고 여생을 더 보람차게 보낼수도 있다.

심양시 대동구의 원 정협주석 로팔균씨의 경우도 다를바 없다. 금년 2월 정년을 맞으며 허전해지는 마음을 눅잦힐수 없었지만 그는 마냥 소침해질수만은 없었다. 정년후에는 민족사업에 전격투신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기에 새 일터로 가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정년을 맞이할수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전에는 겸직으로 〈련의회〉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전직회장〉이 된 셈》이다. 

1970년 료녕대학 화학학부를 졸업하고 심조1중에 배치받아 교편을 잡은 로팔균씨의 꿈은 훌륭한 교육자가 되는것이였다. 20대 한창나이에 정열적으로 사업해 4년만에 부교장으로 발탁되였으며 2년후인 1976년에는 황고구위에 뽑혀올라갔고 또 2년후에는 심양시 170중의 부교장, 당총지서기직을 담임하였다. 1982년에는 황고구교육국 부국장, 당조부서기로, 1983년에는 황고구부구장으로 발탁돼 련 3기 근무하다가 1993년에 구위부서기, 상무부서기로, 2000년에 대동구위 부서기 겸 정협주석으로 전근했다. 

30여년에 걸친 공직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큰 좌절 한번 겪지 않고 무난히 정년때까지 직무에 충실할수 있었다. 수십년의 공직생활을 돌이켜보며 로팔균씨는 두가지 면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첫째는 《정정당당하게 벼슬한다》(堂堂正正作官)는 자신의 신조에 항상 충직했고 둘째는 본 민족을 위해 나름대로 보람찬 일을 해왔다는것이다. 

정치무대라고 순결하지만은 않고 무릉도원(世外桃園)은 더욱 아니다. 당과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도 인간인만큼 각종 유혹에 로출되여있고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팽창하는 물욕을 억누르지 못해 흔히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는 부정부패에 련루된다. 이 면에서 로팔균씨는 항상 《청렴한 관리》형상을 보여주었다. 수십년의 관직생활에서 그는 경제비리에 말려든적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급을 추기 위해 상급에 회뢰하는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로팔균씨에게는 례외였다. 조선족간부로서 그가 그만한 위치에 오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사업에서 능력을 보여주었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당당하고 할 말을 할수 있었다. 

재직시절 그는 본 민족을 위한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황고구 부구장, 부서기시절 그는 문교위생을 주관했는데 80년대 일제시절 옛건물에서 고생하던 명렴로조선족소학교(현 화신조선족소학교》와 주강가조선족소학교는 그가 직접 나서 자금문제를 풀어주어 새 교수청사를 지을수 있었다. 명렴로학교는 그의 도움으로 교원사택까지 일부분 해결할수 있었다. 모교인 심조1중에도 경제적으로는 크게 도와주지 못했지만 교원전근같은 문제로 찾아오면 발벗고나서 해결해주었다. 우홍구 《화신그룹》(원 화평촌)태생이라 심양에 그를 잘아는 사람들도 많아 그의 사무실에는 항상 찾아오는 조선족들이 많았는데 그는 싫은티를 내지 않고 자기의 능력범위에서 해결해줄만한 일은 밀어버리지 않았다. 아빠트재개발로 인한 파가이주(動遷), 교원의료비결산문제 등으로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얼마나 접대했는지 그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그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회장으로 추대되였다. 《련의회》회장단 출범시 그는 《련의회》는 심양지역조선족들을 묶어세워 민족의 전통문화를 발굴, 발양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고 얼을 지켜가는 리드역할, 교두보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련의회》의 취지를 력설하였다. 

정치무대라고 순결하지만은 않고 무릉도원(世外桃園)은 더욱 아니다. 당과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도 인간인만큼 각종 유혹에 로출되여있고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팽창하는 물욕을 억누르지 못해 흔히 권력을 빌어 사리를 도모하는 부정부패에 련루된다. 이 면에서 로팔균씨는 항상 《청렴한 관리》형상을 보여주었다. 수십년의 관직생활에서 그는 경제비리에 말려든적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급을 추기 위해 상급에 회뢰하는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로팔균씨에게는 례외였다. 조선족간부로서 그가 그만한 위치에 오를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사업에서 능력을 보여주었기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당당하게 할 말을 할수 있었다. 

재직시절 그는 본 민족을 위한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황고구 부구장, 부서기시절 그는 문교위생을 주관했는데 1980년대 일제시절 옛건물에서 고생하던 명렴로조선족소학교(현 화신조선족소학교》와 주강가조선족소학교는 그가 직접 나서 자금문제를 풀어주어 새 교수청사를 지을수 있었다. 명렴로학교는 그의 도움으로 교원사택까지 일부분 해결할수 있었다. 모교인 심조1중에도 경제적으로는 크게 도와주지 못했지만 교원전근같은 문제로 찾아오면 발벗고나서 해결해주었다. 우홍구 《화신그룹》(원 화평촌)태생이라 심양에 그를 잘아는 사람들도 많아 그의 사무실에는 항상 찾아오는 조선족들이 많았는데 그는 싫은티를 내지 않고 자기의 능력범위에서 해결해줄만한 일은 밀어버리지 않았다. 아빠트재개발로 인한 파가이주, 교원의료비결산문제 등으로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얼마나 접대했는지 그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그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회장으로 추대되였다. 《련의회》회장단 출범시 그는 《련의회》는 심양지역조선족들을 묶어세워 민족의 전통문화를 발굴, 발양하고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고 얼을 지켜가는 리드역할, 교두보역할을 충분히 해야 한다고 《련의회》의 취지를 력설하였다.  

지난 수년간 그는 《련의회》의 이 취지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였다. 우선 조선족사회 각 계의 열성을 충분히 발동시키기 위해 산하단체들을 많이 내왔는데 《련의회》의 버팀목으로 되여주고있는 《심양시조선족기업가협회》를 발족하였고 이어 《교육협회》, 《예술가협회》, 《태권도협회》(민속운동협회), 《료식협회》, 《골프협회》, 《시조문학회》 등을 선후로 발족시켰다. 원래 있던 《녀성협회》 등을 합치면 산하에 2급 《협회》들이 13개에 달한다. 공식등록을 한 《심양시조선족로인협회》와 《심양시조선족문학회》도 자금난으로 고생하다가 《심양시조선족련의회》를 큰 집으로 삼았다. 이외 일찍 세워진 소가툰분회외 동릉구, 황고구, 우홍구분회가 설립되였다. 

《련의회》의 새 회장단이 출범한 지난 몇년 심양지역의 조선족활동은 전례없는 호황기를 맞았다. 2004년 12년간 중단되였던 《심양시조선족 6??북릉유원활동》이 회복되였다. 조선족의 모임날이면 400년전 청조의 왕실공원이였던 《북릉공원》안의 소나무숲에는 조선족천지다.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학교별, 직장별, 촌과 로인협회를 단위로 모여앉아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우수교사표창식이 거행되고 문예공연이 펼쳐져 민족적정서를 만끽해본다. 여러가지 뜻을 담아 펼치는 《북릉유원활동》은 심양지역 조선족들이 기다리는 명브랜드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양지역의 가장 큰 조선족행사인 《민속축제》가 해마다 원만히 펼쳐졌다. 민속축제에 기업, 농촌, 학교 그리고 각 사회단체들이 적극 동참, 60여개 팀이 나와 수천명에 달하는 겨레관중들앞에서 씨름, 그네, 널뛰기 등 30여개 전통민속운동항목을 두고 각축을 벌리며 학교, 로인협회 등은 춤과 노래실력을 겨룬다. 시조선족기업가협회축구단과 재심양한국인협회축구단의 친선경기도 펼쳐진다. 실로 겨레들의 마음을 들뛰게 하는 축제다. 

《련의회》는 우리 민족 어린이들의 글재주를 키워주자는 취지하에 해마다 즉석작문콩클을 진행해오고있으며 얼마전에는 《심양시조선족꼬마작가협회》를 발족, 그 회원이 100명에 달한다. 

지난해 《련의회》는 교사절을 맞아 《련의회》이름으로 성대한 우수교원표창대회를 열었다. 심양지역 각 조선족중소학교(사범)에서 추천한 8명의 《명교원》 및 2006년 전 성 문과장원 박정영학생과 담임교원이 푸짐한 물질장려를 받았다. 각 분회에서도 지역학교의 빈곤학생과 빈곤호부축활동을 꾸준히 해오고있는데 동릉분회에서는 해마다 설이면 수십세대에 달하는 빈곤호들을 방문해 보조금을 전달해주고 수십명의 빈곤호학생들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준다. 

정년퇴직후의 타산을 묻자 로팔균씨는 산하 기업가협회 기업들을 틈틈히 방문해 정감을 교류하는 한편 《련의회》이름으로 발간하는 《심양조선족》을 더 잘 꾸리고 《료녕조선문보》의 발전에 저그만한 힘이라도 보태고저 《코리안타운》을 합작해 꾸리기로 했다며 이젠 《잡지》와 《신문》의 총편집으로 되였으니 《문인》생활을 해봐야 할것 같다고 하였다.

 리덕권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주말 또는 휴식일이면 경상적으로 변방파출소에 찾아가 청소도 해주고 옷도 빨아주고  맛나는 음식도 해주는 그녀를 두고 변방경찰들은 우리 누이, 우리 아주머니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있다. 그가 바로 훈춘변방대대 영안변방파출소 소장 윤창길의 안해 리화씨이다. 경찰의 안해가 힘들다면 변방경찰의 안해는 더욱 힘...
  • 2007-08-01
  • '민족적 사명감으로 나섰습니다." 단마디로 이렇게 서두를 뗀 할빈경공림펌프유한회사 박성공리사장은 후리후리한 키꼴에 깎은 바위같은 인상을 주는 나젊은 조선족기업가였다. 동북조선족축구련의회 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성공씨는 이번 제5회전국조선족중소학생축구운동회에 거금을 협찬했다. "조선족축구...
  • 2007-07-31
  • 7월 27일, 제4회 윤동주컵 장사씨름경기대회가 펼쳐진 룡정시지신진 명동촌에 위치한 윤동주생가 씨름터에서 한국의 유명한 씨름선수이며 천하장사인 리준희(51세)씨와 만나게 되였다. 현재 한국씨름협회 민속씨름위원회 경기위원장직을 맡고있는 리준희씨는 이번까지 두번째로 연변을 방문하게 됐다면서 올까지 4회째 열리...
  • 2007-07-30
  • 지난 7월 중순,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중국전통 약석발마사지 샵 ․ 학원’이 개업을 시작하였다. 넓은 홀과 아늑한 마사지실 ․ 학원에 개업축하 화분들이 놓여있다. 약석발마사지 전문가 이상규씨가 중국동포 최초로 한국에 투자 ․ 운영하는, 발반사요법으로 각종 병환까지 치료를 겸해 발 관...
  • 2007-07-27
  • 20여년간을 부동한 사업터에서 당사업을 해온 한 《평범》한 당사업일군이 있어 당지에서 존경을 받고있다. 바로 단동시석유공사 금산만석유저장고 당지부서기 배월명(53)씨다.고향이 관전현 하로하조선족향 통강촌인 배월명씨는 일찍 1972년 군부대에 입대해 선후하여 3등공 2차를 따냈고 1980년에 윁남자위반격전에...
  • 2007-07-25
  • ㅡ한국 전통음악학회 서한범회장을 만나 일전2007년 중한전통음악교류회차로 연변대학예술학원을 찾은 한국전통음악학회 서한범회장 일행은 연변대학예술학원 음악학부의 사생들과 더불어 전통음악예술교류의 한마당을 성대히 펼치면서 우리의 선률과 가락으로 한민족의 정서와 정을 통합하는 대단원을 이루었다. 이 행사의...
  • 2007-07-24
  • 오성촌 림상록씨 《 5000무 마을토지를  되찾아 최대 농장주가 되는것이 꿈》 류하현 강가점조선족향 오성촌의 림상록(42세)은 일본에서 벌어온 돈으로 지난해 농촌에다 식당을 꾸린데 이어 올해부터는 600여무의 벼농사를 지으면서 고향땅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있다. 오성촌은 518호에 2238명의 인구, 6000무의 논...
  • 2007-07-21
  • 2006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2006년도 세계로봇경연에서 특수공헌상을 수여받은데 이어 올해 금방(7월 1일)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린 2007년도 세계로봇경연에서 1등상을 수여받은 할빈시문화소학교 로봇서클소조가 최근 국내외 매체들에 집중 보도되였다. 그중 두번 모두 최년소 소조성원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큰 ...
  • 2007-07-19
  • 《최고는 아니여도 최선을 다한다.》 이는 연길애득백화유한회사 안마원 최정옥경리의 경영리념이다. 2004년, 오래동안 정부기관에서 사업하던 그녀가 이 안마원 경리로 초빙받았을 때는말그대로 안마란 안자도 모를 때였다. 하다보니 이튿날 9명의 직원이 다른데로 가겠다고 선언했고 몇십명의 직원들은 아예 그녀의 말을 ...
  • 2007-07-18
  • 《우아한 환경,알뜰한 서비스,고객이 만족하는 식단으로 승부를 걸었지요.》 연길애득백화유한회사 한식관의 남청설(38세)경리는 이 한식관이 연길시의 명소로 자리잡게 된 리유를 이렇게 몇마디로 개괄하였다. 2003년 11월,이 한식관의 경리로 초빙받은 그녀는 한식은 비싸서  서민들의 발길을 잡지 못한다는 시장정세...
  • 2007-07-1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