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윤동주시인의 동생 윤혜원할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3월2일 09시00분    조회:908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면서 고단한 삶을 꾸렸던 북간도. 북간도가 낳은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가 뜬금없이 시드니로 온 까닭이 도요새를 닮은 그 할머니에게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윤동주 시인 만큼이나 정갈하게 한 평생을 살아오신 할머니가 2005년부터 아프시다. 심장수술과 뇌수술을 몇 차례씩 할 정도로 많이 아프시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 2월 중순 중국 길림성 룽징(龍井)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이번이 마지막 중국여행일 것 같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8회째를 맞고 있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10여 년 동안 윤동주 무덤의 봉분을 새로 단장하고, 남편과 함께 <윤동주문학상>을 손수 제정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할머니가 거주하는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1995년에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비롯하여, 2005년의 60주기 추모행사가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에 관한 각종 소식이 전 세계로부터 시드니로 전해진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가 바로 그 할머니다. 윤씨는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혈육이다. 일곱 살 터울이지만 바로 밑의 동생이어서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오빠의 짧은 생애를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이기도 하다.

윤혜원씨한테 지난 13년 동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를 들어왔다. 가끔은 입을 꼭 다문 대학생, 흑백사진 속의 윤동주가 끼어들어 자기가 쓴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날.

지난 2월 16일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옥사한 62주기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윤동주, 그가 '영원한 청년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 경향신문에 발표된 <쉽게 쓰여진 시>.
2월 16일 밤, 시드니에 거주하는 몇몇 한인동포 문인들이 스트라스필드의 한 카페에 모여서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그의 시를 낭송했다. 낭송된 시 중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도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시를 낭송하다보니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구절이 목에 걸렸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뇌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뜰로 나가서 지구남반부의 별들이 총총하게 박혀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뇌를 되뇌어보았다.

60여 년 전, 그 당시의 민족적 절망과 뿌리 뽑힌 조선백성의 고단한 삶이 흑백영화 장면들처럼 스쳤다. 장장 13년 동안 들어왔던 얘기들이 영화장면처럼 되살아난 것. 그럼, 지금부터 6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증언해준 윤혜원씨를 소개한다. 

철들지 않는 84세의 '윤少女'



"마음에 티끌 하나 없는 만년 소녀다." 윤혜원(84)씨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하물며 6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편 오형범(84. 시드니우리교회 장로)씨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도무지 철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윤혜원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항상 똑 같은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 동생이고요, 나이는 열여덟 살!"하면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웃는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싫으시냐?"고 물어보면 "동주 오빠가 나이 먹는 걸 스톱 했으니까 나도 덩달아서 중단시켜버린 거야. 동생이 오빠보다 더 늙으면 안 되잖아. 난 늙으면 안돼!"

기자는 같은 파평 윤씨라는 이유로 윤혜원씨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처럼 지낸다. 윤씨의 80세 생일날, 기자는 '윤소녀(尹少女)'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윤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별명 값으로 한 턱 내겠다"며 북간도식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거의 소금수준인 짜디짠 달걀찜(뒷맛이 아주 고소하다)과 국물이 거의 없는 된장찌개, 하얀 무김치와 옥수수 등이 식탁에 올랐다. "음식이 짜다"고 했더니, "일제 강점기의 북간도 음식이니 그냥 참고 먹어 달라"면서 "우린 평생 이렇게 먹었다"고 말했다.

부엌 쪽으로 식탁이 놓여있는 거실의 벽에는 윤동주 관련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 유명한 학사모 사진 주변에는 해마다 중국 연길에서 열리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 문학상> 행사사진이 여러 장 걸려있다.

지난 2005년 12월 박철 시인이 한국에서 방문했을 때, 그에게 고구마와 옥수수를 삶아주면서 "마치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면서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오누이처럼 도란거렸다. 박철 시인의 '고요한 분위기'가 오빠의 생전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항상 윤동주 분위기에 묻혀서 지내는 탓인지, 윤혜원씨는 오빠에 대해서 얘기할 때 마치 오빠 옆에 앉아서 얘기하듯 한다. "항상 골똘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어, 그러다가 나를 만나면 장난을 걸어오고... 그러니 나한테는 그냥 오빠이지 뭐!" 이런 식이다.

13년 동안 진행된 인터뷰

윤혜원씨와의 인터뷰는 주로 윤씨가 윤동주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다녀온 다음이나 윤동주에 관한 새로운 뉴스가 전해졌을 때 이루어졌다. 만나는 장소는 대부분 윤씨의 집이나 윤씨가 출석하는 교회, 그리고 호주한인동포 문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철마다 한두 차례 만났으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는 거의 다 들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윤씨는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이면 "우리 윤동주 얘기 그만하자!"면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대개는 가슴 아픈 대목으로 넘어가면서.

사실 윤동주 스토리는 여러 권의 <윤동주 평전>과 관련기사 등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하여, 오늘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 그중에서도 답변하기 껄끄러운 내용 중심으로 13년 동안 이어져온 인터뷰를 1문1답 형식으로 재구성 해본다. 인터뷰엔 꼭 남편 오형범씨가 동석했다. 그의 답변도 함께 담았다.

▲ 작년 연변에서 열린 제7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장면.
-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요. 동주오빠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있고 밤새워 책을 읽고 뭔가를 대학노트에 쓰던 사람이었으니 삶의 모습이 바뀐들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다만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시를 쓰는 조용한 모습의 교사나 목사말예요. 단짝이었던 문익환 목사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한국의 한 시인단체가 매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20년 가까이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서시(序詩)'가 가장 애송되는 시로 선정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싶지만, 한동안은 잘 믿기지 않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의 고결한 성품이나,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읽히는 <서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과대평가 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윤혜원) "나는 문학의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평가하면 그게 어디 문학작품인가요? 종교의 경전쯤 되겠지요. 또한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형범) "그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27년 2개월입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쉽게 쓰여진 시'인데 그 시를 1942년 6월 3일에 썼습니다. 정확하게 25살 때였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시가 모두 25살 이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대평가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동주오빠가 미워져요"

-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뚜렷한 항일활동의 흔적이 없는데.
(윤혜원)"당시의 북간도는 항일운동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난 어리고 여자라서(?) 잘 몰랐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 이후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빠라고 해서 뭐가 달랐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오빠의 꼭 다문 입술과 고뇌에 찬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만 오빠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오형범)"적극적인 항일활동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분위기의 일본에서 계속해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것은 윤동주 항일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는 운명적인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동갑내기로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은 감옥에서 사망함) 항일에 대한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사람입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가 모두 시인인데 왜 시를 쓰지 않는지요?
"그게 참 속상해요. 남자들은 다 똑똑하고 잘 생겼는데, 왜 나만 시도 못 쓰고 못난이로 태어났는지.(웃음) 그런데 동주오빠가 나에게 아동 문학지를 읽게 하고 동화를 들려준 것은 나의 글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 재작년 연길의 동포학생들이 연 윤동주 시인 60주기 행사.
- 그동안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1942년 6월 3일 쓴 '쉽게 쓰여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정정됐는데.
(윤혜원)"'쉽게 쓰여진 시'가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오형범)"우리 부부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청진에 머물다가 윤동주의 일본유학생 친구들인 박춘애와 김윤립을 만났는데, 그들이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시 한 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혼란이라서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를 전해 받았다면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을 텐데."

-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린다면, 오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 2006 월드컵 재독 동포 응원 지휘 선경석씨] [동아일보 2005.12.31 03:00:37] “세계가 깜짝 놀랄 응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내 집보다 편안하게 독일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쏟겠습니다.”‘2006 독일 월드컵 재독동포 응원단’을 조직한 선경석(58·사진) 씨는 월드컵이 5개월 이상 남았지만 벌...
  • 2006-01-03
  • [원제: 창업인생 - 수놓는 녀자 정미향] 젊고 아름다운 정미향이 5년전 길림에서 상해에 와 처음 찾은 일거리가 사발씻는 일이였다. 그러던 그녀가 십자수놓이와 인연을 맺은 1년전 한국관광때이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가지고 놀았는데 어느날 비지니스를 하는 친구가 독일에서 십자수놓이 수입대리를 하고있다기에 그것...
  • 2006-01-03
  • [원제: 창업 취업도 작은것부터 시작해야] 길림성조선족기업가협회 리규광회장의 일가견 길림성조선족기업가협회 리규광회장(장춘대화그룹 리사장)은 현재 우리 성 조선족민영기업 발전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우리 성 조선족민영기업들은 아직 저마다가 그룹형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각자의 선정항목에선 성공,...
  • 2006-01-03
  • 연예인직업은 인기를 중요시하는데 인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힘들고 바쁜 일상을 보내고있는 대신 수입도 자연히 높아지게 돼있다. 지난 년도 중국연예인 수입순위표를 보면 30년을 한결같이 영화계, 광고계 등에서 많은 인기를 받아온 성룡의 한해 수입이 인민페로 2억 3000여만원을 넘어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일년에 7편...
  • 2006-01-03
  • 을유년을 보내고 바야흐로 병술년을 맞는 새해의 벽두에 훈춘시인민정부 김상진시장과 지난해를 총화하고 새로운 청사진을 펼치는 중대과제를 가지고 대화를 가질수 있었다. 김시장은 우선 지난 《10.5》기간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였다. 그에 따르면 훈춘시는 지난 5년간 국민경제와 사회사업 제반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
  • 2005-12-30
  • 재일동포무용가 서울·동경정명자한국예술연구원 정명자원장 6세때부터 현재까지 춤만을 위해 살아온 서울·동경정명자한국예술연구원 원장 정명자(48세)씨, 춤으로 인한 그녀의 수많은 희로애락은 진정 그녀의 힘이자 아픔으로 발전, 승화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4일 중한문화교류행사차로 처음 할빈을 찾은 ...
  • 2005-12-29
  • 지난 22일, 많은 우량종벼를 육종해내여 연변은 물론 전국에 명성을 날렸던 농민벼육종재배전문가 류창은(69세)로인의 저택을 찾았다. 1957년 류창은은 안도현 만보진에서 벼재배와 벼육종연구에 달라붙어 만보6호, 만보11호와 장풍 등 3가지 벼우량종자를 배육해냈고 새로운 벼재배법을 보급시켰다. 하여 헥타르당 벼생산량...
  • 2005-12-29
  • 자기 식당을 활동관으로 예술단도 조직 길림시 강북 밀하참(蜜哈站)에 살고있는 박명분(56세)은 자기의 음식점을 중년들의 오락활동관으로 내놓고 현재는 예술단을 조직하기에까지 이르러 미담이다. 그는 원래 1999년부터 밀하참에서 420평방메터에 달하는 금수산민속관 음식점을 경영하였다. 주위에 모여살고있는 많은 조선...
  • 2005-12-29
  • 북경발 신화통신 12월 26일 중앙정법위원회는 최근 통지를 발표하여 전국 각 급 정법기관과 전체 정법사업자들이 김계란(녀, 조선족, 흑룡강성 녕안시 인민법원 동경성 법정 법관)을 따라 배우는 활동을 전개할것을 호소했다. 통지는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각 급 정법기관과 전체 정법사업자들은 김계란동지의 당과 국가...
  • 2005-12-28
  •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양력설문예야회에서 방송하게 되는 연변가무단의 가무 가 26일, 중앙텔레비죤방송국 공개홀에서 록화됐습니다. 록화중 무대중앙에서 아름다운 자태와 짙은 감정으로 연변의 주화로 불리우는 를 부른 가수가 바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변영화학생입니다. 양력설야회뿐만아니라 올해 문화부에서 조직한 음...
  • 2005-12-2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