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내 남편 백남준 세상엔 위대한 예술가, 나에겐 큰 아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1월23일 11시12분    조회:863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29일 타계 1주기’ 맞아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 단독 인터뷰

“남들은 그이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말하지만 내겐 그저 커다란 아기(big baby)였죠.”

지난해 74세를 일기로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씨의 반려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70) 여사가 오는 29일로 다가온 남편의 1주기를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27일 서울에 온다. 서울 봉은사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참석하고, 지인들과 만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백남준 기념관을 방문할 계획이다. 21일, 22일 두 차례에 걸쳐 뉴욕 맨해튼 소호에 있는 자택에서 본지와 통화한 구보타씨는 “평생 싸웠지만 정말 사랑했다”며 “남편이 떠난 지 1년이 됐지만 아직 내 곁에 있다는 걸 나는 분명히 안다”고 했다.

―지난 1년 어떻게 지냈습니까?

“96년 그가 쓰러진 뒤 10년 동안 나는 사생활이 없었어요. 늘 집에 간병인이 있었고, 할 일이 많았어요. 병원도 모시고 가야 하고, 의사도 만나야 하고, 운동도 도와야 하고…. 10년 만에 생긴 자유시간으로, 나는 그이를 찍은 비디오를 봐요. 그가 살아있을 때 나는 일기 쓰듯 비디오를 찍었어요. 우리 집엔 나와 남편이 서로를 찍은 비디오가 2만7300개 있어요. 아예 ‘자동 반복’ 기능을 설정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하루 몇 시간씩 봐요. 보면서 안 우냐고요? 왜 안 울어요? 울고, 웃고, 화내고, 말 걸고, 별 일 다하죠. 그이 목소리 들으면서 잠 들고 깨요. 그는 살아있을 때 내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 가?’ ‘언제 와?’ 물어봤어요. 그가 간 뒤에도 나는 집 밖에 나갈 때마다 ‘남준, 나 장 보러 간다’ 이래요. 돌아오면 ‘나 왔어, 기다렸지?’ 하죠.”

―대답이 있던가요?

“그이는 늘 내 곁에 있어요. 우리 집에 그가 13세 때 작곡한 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CD가 있어요. 난 그게 제일 좋아요. 들으면 그가 옆에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져요. 독일 방송국이랑 인터뷰한 걸 녹화한 비디오가 있는데, 들을 때마다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멋있는 남자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첫눈에 ‘아, 정말 잘생겼다’ 내가 ‘욘사마 열풍’ 1호였나봐

생전 그의 모습 비디오 늘 틀어놓고 울고 웃고 말도 걸고…


두 사람은 1963년 도쿄에서 처음 만나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연애했다. 70년 백남준씨가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뉴욕을 떠날 때 구보타씨가 “당신 없는 뉴욕에 못 산다”며 따라 나섰다. 둘은 7년간 함께 살다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왜 그렇게 좋았습니까?

“요즘 일본 여자들이 욘사마(배용준)처럼 멋진 한국 배우들 좋아하지요? 내가 1호였나봐. 딱 보고 ‘아, 정말 잘생겼다, 멋지고 똑똑한 남자다!’ 했어요. 그가 유명해서 사랑한 건 아니에요. 내가 사랑한 60년대의 백남준은 가난하고, 무명이었어요. 전위예술가 사이에서만 유명했죠.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몰락해서 유산도 없고, 부모도 돌아가셔서 안 계셨어요. 시댁, 없으면 외롭지만 있으면 골칫거리도 많이 생기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대뜸 ‘당신, 이 세상에 혼자냐’고 묻자, 그가 ‘그래, 나 혼자야’ 했어요. 나는 ‘오, 좋아!’ 했죠. 뉴욕에서 힘들었어요. 그는 침대가 없어서 마루에서 자는 처지에 ‘작품 하려면 TV 100대를 사야한다’고 하는 남자였어요. 77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에 비디오 아트 과목 강사 자리를 얻을 때까지, 그는 일자리가 없었어요. 내가 뉴욕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서 일해서 둘이 먹고 살았죠. 돈 때문에 많이 싸웠어요. 또, 그가 가끔 ‘나, 내 마누라가 오노 요코처럼 유명한 여자 예술가였으면 좋겠어’ 했어요. 그럼 나는 ‘뭐라고!’ 하고 막 화를 냈지요. 나도 비디오 아트를 한 작가지만, 그는 유명하고, 난 아니죠. 그에게 ‘난 유명해질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저 좋은 예술가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야’ 했어요.”

돈 때문에 많이 싸웠어요 ‘내 아내가 오노 요코처럼 유명한 예술가면 좋겠어’

가끔씩 그러면 전 막 화를 냈죠

―개인 백남준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소녀처럼 깔깔 웃고) 스마트하고 달콤하고 재미있고 섹스를 잘하는 남자였어요.”

―다정했습니까?

“96년 쓰러지고 나서 2001년에 그가 내게 편지를 보냈어요. ‘시게코, 넌 젊어선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선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라고 했어요. 그걸 읽고 내가 깔깔 웃으면서 ‘남준, 당신 정말 웃겨요. 불교도도 아니면서’ 하고 놀렸죠. 그 편지, 늘 가지고 다녀요. 자주 꺼내보죠.”

―지난 1년간 언제 가장 힘들었나요?

“그이가 더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할 때.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당뇨를 앓았어요. 그도 47살에 당뇨 진단을 받았죠. 병세가 악화되지 않게 조절했어야 하는데, 그는 그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아무리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도 늘 주머니에 단 걸 갖고 다니며 아이처럼 먹었죠. 나는 일본 니가타에서 자랐어요. 친정은 화목한 대가족에, 중산층이고, 장수 가족이에요. 부모님은 모두 교사였죠. 어머니는 100세이시고, 피아니스트인 언니랑 여동생도 살아있어요. 그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슬픔을 졸업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언젠가 졸업하긴 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어요.”

구보타씨는 “우리 부부는 자주 서울에 갔지만 한번도 한국에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행자처럼, 집시처럼 살았지만 남편의 나라 한국이 좋다”고도 했다.

“그는 무가(巫歌)를 좋아했어요. 그가 죽은 뒤 뉴욕 한인타운에 가서 무속음악CD를 사다 들었어요. 그가 왜 좋아했는지 알았어요. 굉장히 영적인 음악이에요.”

그는 유명한 남성 작가와 산 무명 여성 작가였다. 남편과 함께, 혹은 따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1997년을 마지막으로 남편을 간병하느라 더는 개인전을 열지 못했다. 오는 9월 뉴욕에서 여는 개인전은 10년만에 ‘아내’ 구보타에서 ‘작가’ 구보타로 돌아오는 자리다. 그는 “나는 야심적인 여자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도쿄에서 고교 교사를 했을 거예요. 그를 만나서 정말 재밌고 행복했어요. 그는 평생 어려서 죽은 누이를 애틋하게 그리워했어요. 우리는 부부였지만, 동시에 오누이같았어요. 가난하던 시절, 한번은 그에게 ‘나같은 평범한 일본 중산층 집 딸 말고, 전시회 척척 열어주는 부잣집 딸이랑 결혼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가 딱 한마디 했어요. ‘그런 여자 건방져서 싫어.’ 우리, 40년간 굉장히 사랑했어요.”
[김수혜기자 goodluck@chosun.com]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그는 평범한 소방관이였다. 하지만 화재현장에서는 불길속을 날아드는 전기식 인물임에 손색이 없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한 조선족젊은이다. 하지만 긴급구원현장에서 뜨거운 손길로 65명이나 되는 생명을 구출했다. 그는 어릴적부터 량친의 사랑을 잃은 ‘고아 아닌 고아’였다. 하지만 장장 8년간 독거로인들을...
  • 2007-08-27
  • 얼마전 기자는 지인의 소개로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80주년을 맞는 기회에 중국인민해방군 총병원 (이전 해방군 301병원)의 이비인후과 주임의사인 한동일박사를 만났다. 소박한 농민의 아들 끈질긴 노력가 찾아간 날 약속한 시간이 한시간반이나 기다려서야 문진을 끝내고 들어오는 한박사를 만날수 있었다. 박사이고 군병원...
  • 2007-08-16
  • 17차 당대회 대표로 선거된 조선족 리명성 ◈ 중국의 대외개방, 경제글로벌화, 다국적산업합작 등에서 중요한 성과◈ 25만자에 달하는 《중국의 경제전략》 개혁개방의 성공◈ 경험 총화 중국경제발전의 전략적구상 전망 제시◈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 중앙국가기관걸출청년, 귀국류학생선진개인 등 영예 안아 중국기업련합...
  • 2007-08-14
  • 조선족유치원들이 어린이류실로 고심하고있는 최근년간 해림시조선족유치원은 오히려 해마다 어린이수가 늘어나 금년들어 어린이수가 240여명(올해 졸업한 70여명 포함)으로 늘어났다. 또한 1000평방미터의  새 교수청사에 갖가지 대형 놀이기구 등을 구전히 갖춘 규모화한 유치원으로, 민족의 꽃봉오리들의 요람으로 ...
  • 2007-08-14
  • 그의 매일 일과는 축구 관련사항들로 꽉 차있다.  푸름하게 밝아오는 새벽 5시 반이면 벌써 애들을 이끌고 아침훈련에 나서고 오전이면 체력훈련, 기전술훈련에 그도 함께 땀동이를 쏟는다. 애들이 문화과 수업을 하는 날에는 훈련계획을 짜고 경기총화도 짓는다. 이토록 축구에 푹 빠진 사나이―그가 바로 연길시제2고...
  • 2007-08-09
  • 아르헨띠나 최대 민영방송인 《텔레페 TV》의 뉴스 앵커를 지낸 황진이(30) 씨는 동양인 녀성으로 아르헨띠나 언론계에서 쉽지 않게 성공을 거두어 주변의 시선을 모으고있다.미국, 카나다 등 북미지역에서 아시아계 앵커들이 주목받는것과는 달리 남미언론계에서는 동양인을 거의 찾아볼수 없다. 황씨는 1998년 대학졸업직...
  • 2007-08-07
  • 연변성보국제상무빌딩유한회사의 정영채회장이라면 연변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을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가로서가 아니라 우리 연변 사람으로서의 정영채회장이라면 잘 안다고 자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정영채회장에 대한 필자의 인상도 워낙 연변에 와 사업에 성공하여 돈도 많이 벌고 여러가지 사...
  • 2007-08-06
  • ——— 로전사 최경애할머니의 참군일기에서  산골마을에서 참군한 처녀 1946년 4월초 연변의 봄은 일찍도 찾아왔다. 마을 앞산에는 진붉은 진달래가 떨기떨기 피여났다. 로투구 마을밖에는 전선으로 떠나는 청년들을 전송하는 마을사람들로 분비였다. 두 오빠와 같이 전선으로 떠나는 경애는 꼭 공을 ...
  • 2007-08-02
  •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 사람이 자기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낸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인재인것이다.애득백화점에는 그런 인재가 많기에 애득의 오늘과 같은 발전이 있다.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며 즐겁고 신나게 일하는 사람들이 인재인것이...
  • 2007-08-02
  • 군대는 하나의 특수집단이다. 군대는 사람을 양성하고 사람을 단련시키며 사람을 키우는 대학이다. 군인이란 이 특수직업은 곤난을 이겨내도록 의지력을 키워주고 인생을 더 보람있고 더 알차게 보낼수 있는 토대를 닦아준다. 1969년 19세 나이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37년간 부대생활을 해온 박성진은 《군영은 강한...
  • 2007-08-0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