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채미화--중국 100대 명교수의 한사람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8월29일 21시06분    조회:2217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국 100대 명교수의 한사람-채미화 교수 인터뷰 정리 내용- 중국 100대 명교수의 한사람으로 불리우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채미화 학부장, 교사생활에 종사한지도 어언 22년이다. 채미화 학부장을 만나 그녀가 그동안 걸어온 길들에 대해 알아본다. 기자(이하 기로 약칭):22년간 교사사업에 몸담아 오면서 그동안 걸어온 길들이 달고 쓰고 여러가지가 많을 것 같은데, 22년전 처음부터 연변대학에서 교사직에 종사한건가? 채미화 학부장(이하 채로 약칭): 22년전에 석사를 졸업하고 연변대학에 교원으로 남았다. 연변대학 제1기 석사졸업생이다. 기:당시 석사졸업생은 몇명? 채:18명이었다. 우리 학과에 6명, 기타 학과 화학, 역사 석사생 모두 해서 18명이었다. 그중 제가 유일한 여성, 유일한 학생출신이었다. 기:당시 학교에 남은 석사는 몇명? 채:2명정도가 사회로 나가고 나머지는 다 학교에 교원으로 남았다. 기:학부장님은 당시 어느 학과 교수를 했는가? 채:조선문학석사연구생 졸업이었기에 곧바로 조선고전문학사연구와 교수에 종사했다. 기:22년전 첫 강의 인상은? 채: 생생하다. 지도교원이었던 허문석 교수님은 이미 타개하셨다. 아주 근엄하시고 자애로우신 분이었다. 졸업후 실습교학이 있었는데 실습교학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보시고 일일이 깨우쳐주셨다. 기:그 때 강의한 과목은? 채:조선고전문학사였다. 박지원의 소설 <호질>에 대해 강의했던 기억이 난다. 기:그 때 학생은 몇명? 채:학생은 약 40명되는걸로 기억된다. 학생대부분이 저보다 나이가 연상이었다. 조금 긴장했다. 90분 강의를 했었다. [img count='1' wudth='350'img] 기:강의후 지도교수의 평가는? 채:첫마디 말씀은 잘했다, 그런데 몇곳은 사투리를 썼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열심히 표준어를 쓰려고 했는데 그래도 사투리를 썼던겉 같다. 기:22년간 가장 많이 강의한 분야가 조선고전문학사였는가? 채:나중에는 조선현대문학사, 조선당대문학사 등등 전부다 했다. 저의 학부는 석, 박사수여권이 있는 학부이고 조선문학 교연실이 중점 교연실이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서 전부다 석,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사람들이다. 교연실의 선생님들은 교학량이 아주 많다. 금년부터 명년까지 조선미학을 큰 과제로 연구하려 계획중이다. 기:박사학위는 언제 획득? 채:94년에 받았다. 10년전 박사입학 수속을 할때 8살난 딸애도 소학입학수속을 함께 했다. 아주 감회가 깊다. 기:22년간 손길을 거쳐 나간 제자들은? 채:직접 논문을 지도하여 석사생 15명 정도를 졸업시켰고, 현재는 박사생 6명의 지도교원을 담당하고 있다. 기:22년간 손길을 거쳐 나간 제자들은? 채:직접 논문을 지도하여 석사생 15명 정도를 졸업시켰고, 현재는 박사생 6명의 지도교원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제가 맡은 과목-조선한국 당대 문학사는 국가 정예학과 과목으로 추천되었다. 2003년 길림성 정예학과로 추천되었고, 올해는 교육부에까지 추천되었는데 아직 결과가 내려오지 않았다. 기:박사공부는 몇년 했는가? 채:4년했다. 기:딸애도 입학시키고 박사공부를 하면서 여러가지 곤난들이 많았겠는데, 그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채: 건강이 안 좋았다. 워낙 건강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애를 키우고 학교에 데려가고, 박사공부 새벽까지 하면서 참 힘들었다. 기; 당시 박사논문의 테마는? 채: 고려문학 미의식연구이다. 그때까지 미적연구는 그때까지 공백이었다. 그래서 저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에서 두번 출판되었다. 문학에 대한 미학적인 연구가 공백인 상황에서 이루어졌기때문에 어려웠다. 하지만 어려운만큼 인기도 있었다. 기: 고전미학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하고 있는가? 채: 현재 박사생지도연구분야가 주로 고전미학연구이다. 기: 학부장을 하면서 학술연구도 하고 여러가지 시간조절이 필요할 것 같은데∼ 채: 당연히 시간이 딸린다. 하지만 중점학과의 학부장으로서 학술연구는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활용하는 시간은 방학시간이다. 지난 방학기간에는 논문을 두편 발표했다. 올해만 이미 3편 발표되었다. 겨울방학은 활용 많이 했는데, 여름방학에는 학술활동이 많아서 좀 힘들었다. 기: 22년간의 교사종사생활가운데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채: 글쎄∼글을 쓰고 가르치는 사람의 기쁨이라는 건 내가 써낸 글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태어날때 큰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가르친 제자들인 사회에서 씩씩하게 활약하고 있을 때 아주 큰 힘을 느끼게 된다. 가정적으로 편안한 환경이다. 남편이 많이 지지해주고, 딸애도 이미 대학에 갔다. 기: 계몽선생님은? 채: 박사지도교수는 이미 타개하신 정판룡 교수님이다. 한국에서 해외동포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아주 훌륭한 분이셨다. 기: 지금부터는 선생님이 민족 문화와 교육을 이끌어가야 할때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학술성과를 많이 올리고, 많은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길 바란다. (끝) (취재, 정리:이명란) * 본 기사는 2004년 12월 2일과 8일에 나누어 방송된것입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1958년, 봄, 김 철은 귀향한다. 그가 맨 배낭에는 전쟁의 초연 속에서 쓴 '전선 시초'1백 여 편이 들어 있었다. 해란 강변엔느 새움이 돋고 있었다. 연변 땅을 밟으며 가슴이 벅찼다. 즉흥시가 떠올랐다. "이른 봄 해란 강에 아지랑이 피는 데/귀환병과 처녀는 고향 길을 거닐었네/담벽 같은 앞가슴에 주렁진 훈장은/결결한...
  • 2005-10-25
  • 북경 킹스카이정보기술휴한회사 김호동사장 중국의 “실리콘벨리”로 불리는 북경의 중관촌, 중국 IT시장을 선도하는 북경시장에서 민족기업가인 김호동사장도 중한 상무교류를 바탕으로 프로그램 개발, 사이트 개설 등으로 선두역할을 하고있다. 길림성 도문시 출신인 김호씨는 1988년 7월 중앙민족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
  • 2005-10-24
  • 1700여개 한국기업 입주 상주 한국인 8000여명 대련은 중국 동북3성의 대외개방 및 경제개발의 창구로서 가장 큰 해안무역도시이다. “대대련건설”(大大連建設) 가속화와 중한량국간 경제관계의 진일보 발전으로 한국굴지기업들의 대대련투자가 발빠른 행보를 거듭하고있다. 특히 올해 한국 조선업계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 2005-10-24
  • [원제: 일반인도 “항천꿈”실현 가능] 할빈공대 김영덕교수 신주시리즈 우주선 청사진 그려 최근 기자의 취재를 받은 할빈공업대학 항천학원 김영덕교수는 “몇천년후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실험을 하고 일반인들도 우주려행꿈을 실현할수 있게 된다”고 하면서 향후 중국항천사업발전의 미래를 전망하고 우주선이 우주를 비...
  • 2005-10-24
  • 김상기 일가는 길림시 교외의 가반가에 눌러 앉았다. 길림시에서 서북쪽으로 공장구역-하다만을 지난 송화강 나루터를 지나면 불과 십리도 못 되는 시골이었다. 일명 북길림이라 했다. "길림시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신길림이 있었죠. 일본인 마을이었지요. 만주석유회사도 있고,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신길림에 사는...
  • 2005-10-24
  • 전남-곡성군 입면 삼오리, 넓지 않은 벌판, 옥답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김상기는 유년기, 엿 궤짝을 둘러메고 정처 없이 흘렀다. 그러다 거지가 됐다. 울산에서 또래 거지를 만나 친구가 됐다. 부둣가로 놀려 갔다가 일본의 화물선과 인연이 된다. 화부다 됐다. 화물선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큰 화물선 회사 소속이었다...
  • 2005-10-21
  • [원제: 어려움속에서 성공한 행운아] 2005-10-20 10:21:37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마음씨 고운 뭇사람들의 도움으로 끝까지 학습에 노력하여 중국의 명문대학인 절강대학에 입학한 정춘매학생은 참으로 행운아였다. 집이 흑룡강성동녕현삼차구진에 있는 정춘매학생의 가정은 본래 생활형편이 괜찮았다. 그런데 자녀의 공부뒤바...
  • 2005-10-20
  • 중국은 요즘 101세를 일기로 지난 17일 세상을 떠난 원로 문학가 바진(巴金) 중국작가협회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하다. 그가 오랫동안 살았고 숨을 거둔 상하이를 비롯해 그가 설립을 주도했던 현대문학관이 있는 베이징, 1904년 그가 태어난 쓰촨성 청두 등에서 추도 행사가 한창이다. 중국 신문들은 엄청난 지면을...
  • 2005-10-20
  • 유년 시절의 대가족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에 외할머니가 파금을 안고 있고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금의 모친이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17일 세상을 등진 파금(巴金)은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1904년 11월24일 사천(四川)성 성도(成都)에서 태어났다. 본...
  • 2005-10-20
  • 항미원조시기 파금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작가였다. 1952년 3월 31일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4월이후로는 개성 제1선으로 나갔다. 그는 친히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영웅들속에서 생활》하였고 10월에야 귀국하였다. 그후 1965년까지 그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에 대해 노래하는 글들을 많이 썼다. 이 시...
  • 2005-10-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