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5개년계획 임무량을 2년이나 앞당겼었고 중국로력모범에 당선되여 전국군영회(全國群英會)에 참가해 류소기, 주덕, 주은래 등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던 석순희로인(도문시, 71세)은 현재 병마의 시달림으로 힘겹게 보내고있지만 당시 불꽃튀던 생산현장에서 혼신을 다해 일하며 보람찬 나날을 보내던 때를 생각하면 눈에 광채가 돌고 마음에 난류가 인다고 말한다.
그녀가 로투구고무공장(연변고무공장의 전신)제화공으로 들어갈때는 1953년, 18살 되던 해였다. 도시빈민 가정에 태여나 힘든 일에 단련된 그녀였지만 공장일은 상상외로 힘들었다. 코를 찌르는 고무냄새와 휘발유냄새에 질식할것만 같았고 두팔은 쑤시는듯 아파났다. 많은 자매들이 중도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그녀만은 견디여냈다. 부모를 도와 동생 넷을 양육할 의무가 그녀의 두어깨에 놓여져있던것이다. 1955년, 그녀는 반복적인 실천을 거쳐 두손조작법을 고안해냈다. 다른 로동자들이 신바닥을 200~300컬레를 붙일 때 그녀는 600여컬레나 붙였다. 하여 그녀는 제2차 5개년계획기간의 임무량을 2년이나 앞당겨 완수했다. 1958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했고 성《청년붉은기돌격수》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상해에서 있은 전국청년사회주의건설적극분자대회에 참가, 전국《선진생산자》칭호를 수여받았다. 단순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던 녀성으로부터 당과 나라를 위해 일해가는 공산당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였다.
1959년은 그녀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한해였다. 이해 《전국로력모범》으로 된 그녀는 낳은지 100일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업고 《전국군영회》에 참가, 군영회 주석단의 일원으로 류소기, 주덕, 주은래 등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류소기주석은 그녀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면서 《한떨기 꽃은 아름답다 할수 없다. 천자만홍해야 진정 아름다운것이다》고 하며 자매들을 이끌고 더욱 뛰여난 성과를 이룩하라고 격려했다.
군영회에서 돌아온후 그녀는 생산수준을 가일층 제고시킬 생각을 무르익히면서 내심하게 자매들에게 기술을 보급시켰다. 모두가 애써 노력한 보람으로 500컬레를 넘기거나 지어 700여컬레를 붙인 자매도 있었다. 《제2의 석순희》, 《제3의 석순희》가 용솟음쳐나왔다. 이시기 《로동자일보》를 비롯한 국내 유명매체들에서도 석순희 사적을 련이어 게재했고 장춘과 통화시의 형제공장들에서도 《석순희를 따라배우고 석순희를 따라잡자》는 구호를 제기하고 연변 소학교4학년 어문교과서에도 《석순희누나》가 소개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그녀는 《생산유일론자》, 《자산계급이 배양한 씨앗》, 《검은 전형》으로 몰렸고 당소조장, 반장, 당지부위원 등 직책에서 밀려났다. 억울함을 하소연할곳 없었던 그녀는 신경성고혈압에 걸렸고 몸도 마음도 더없이 허약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묵묵히 일만은 견지했다.
드디여 폭풍우가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활기를 띠고 생산에 집념, 한컬레의 오작품도 없이 5만컬레의 신을 생산해온 공장을 들썽해놓았고 1979년에는 1960년에 이에 두번째로 전국《3.8붉은기수》로 당선되였다. 1981년 병으로 퇴직한 이후에도 그녀는 새로 공장에 들어온 로동자들로 새로운 반조를 부어 기술을 가르치며 근 2년간이나 무상으로 일하기도 했다.
1992년 그녀가 58세 되던 해 불행히 당뇨병에 걸렸다. 한주일에 몇천원씩 드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이제는 합병증으로까지 번졌다. 현대 온몸이 퉁퉁 부어있고 시력이 감퇴되고 말초신경염까지 번져 발가락이 빠지고 발바닥이 헐고있으나 그녀는 원망도 후회도 없다고 한다. 당에서 맡겨준 임무를 충실히 리행했기때문에.
김명성기자 jmx@ybrb.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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