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류 대학생들의 선두인물 권정
김호림ㅣ중국국제방송국 기자
jinhulin@hanmail.net
권정(權靜), 그 이름에 사람들은 거개 생소함을 느낀다. 그러나 북경 대학입시 수석합격자라고 하면 대뜸 “아, 그 애 말이예요”하고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한다. 북경에서는 2000년에 아주 드물게 2000년에 대학입시성적 성적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는데, 그때 권정이가 바로 북경지역 수석합격자였던것이다. 이때 언론에서 수석합격자를 대서특필한데도 있겠지만 그가 조선족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속에 더군다나 깊숙히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북경시 조양구정부에서는 권정의 집을 북경시에 특수기여를 한 가구로 명명하고 증명서를 발부하기까지 했다. 중국의 언론은 물론 한국의 KBS, MBC 등 언론에서도 권정이가 북경시 대학입시에서 수석합격자로 된 소식을 실었다. 권정은 아닌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영예를 떨친 어여쁜 꽃이였다.
아쉽게도 집에 축하전화가 그칠새 없던 그때가 어제 같은데 권정은 벌써 옛날 옛적의 “신화”속으로 멀리 사라지고있다. 어느덧 거목으로 커가는 권정의 모습은 인제 눈씻고도 언론에서 찾아볼수 없다. “냄비”처럼 금방 끓다가 또 금방 식어버리는 우리 언론의 “열정” 때문이다.
“수석을 했다고 해서 대단한게 아니예요. 중요한건 향후 발전이죠.”
수석합격 통지서를 받은후 의외로 차분했던 권정의 반응이 새삼스럽다. 대학 입학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대학 입학한후에도 닫는 말에 채찍질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그의 도담한 야망을 엿보이게 하는 순간이였었다.
과연 권정은 그 약속을 착실히 지키고있었다. 얼마전 권정의 부친 권기홍씨를 만나 그?nbsp;“물위에 드러나지 않은 내막”들을 알아본 결과가 바로 그러했던것이다.
권정은 북경대학에 입학한후에도 코기러기처럼 내처 뭇 학생들의 앞장에서 달리고있었다. 그는 입학 첫해에 중국 대륙의 대학생치곤 드물게 대만에 단기견습을 다녀왔고 지난해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미국 대학에 반년간 교환학생으로 있었다. 이런 화사한 경력에는 반급에서 성적이 앞 3위권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사실 그건 아주 가혹한 조건이였다. 입학할때 권정은 수석합격자로 대학과 학부를 선택할수 있었는데, 그가 선택한 대학은 최고의 학부 북경대학이였고 학부는 금융학부였다. 경제화시대에 놀라운 비전을 하던 중국에서 그때 금융학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있었던것이다. 그해 북경대학 광화학원 국제금융학부에 중국 13개 성의 13명 수석과 차석 40명이 집결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시사해준다. 바로 그런 일등 수재들가운데서 권정의 모습은 여전히 코기러기처럼 유표났던것이다. 올해 6월 권정은 북경대학 광화학원에서 유일한 북경시 최우수 졸업장을 받고 졸업했다. 올해 8월부터 북경대학 경제학부 석사연구 과정을 밟게 되였는데, 그것도 지난해 9월에 학교의 추천을 받아 미리 선정된것이다.
“꼭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한건 아니지만, 이 방향으로 노력한건만 틀림없습니다.”
권기홍씨는 솔직하게 옛날의 심경을 고백한다. 사실 부모의 생각이야 어떠했든, 딸애의 어린 시절은 일찍부터 범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는듯 했었다.
“될성 부른 나물은 떡잎부터 알아본다.” 진짜 옛말 그른데 없다는 말은 권정의 몸에서 엿볼수 있는듯 하다.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릴 네살 나이에 권정은 벌써 “수호전”, “삼국연의” 등 고전소설을 독파했던것이다.
“…애의 기억능력을 우연하게 발견한거죠.”
권기홍씨는 행운의 녀신이 딸을 총애했다고 말한다. 활을 들고있지 않고서야 어찌 날아가는 새를 맞힐수 있겠냐만 그는 자꾸 딸이 행운아라고 우긴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세살때 권정은 수두때문에 유치원에 잠시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권기홍씨는 집에서 애와 함께 있으면서 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권정이는 하루에 80자씩 기억하더란다. 권정은 눈을 감기만 하면 머리속에서 장난꾸러기처럼 마구 뛰어다니는게 한자투성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권정은 그때 잠을 자주 설치군 했단다. 그러든말든 그가 단 한달동안에 2500자를 익힌 결과는 경이로움이 아니면 믿기 어려울 정도.
글에 대한 권정의 욕심은 부모에게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인테리인 부모는 권정이가 두살되던 때부터 날마다 만화책 한권씩 사들였다. 날마다 글을 읽어주는 엄마, 아빠 옆에서 또 날마다 글무지에 빠져있는 엄마, 아빠에게서 권정은 책에 남다른 흥미를 보여주었다. 권정은 그 나이에 드물게 책을 찢는 법이라곤 전혀 없었다고 한다.
“초기교육이라고 무작정 좋은건 아닙니다.” 권기홍씨는 무슨 일이나 한쪽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기억력이 월등했던 권정은 초등학교때 공부를 아주 쉽게 했다고 한다. 암기 하나로만도 과당 수업내용을 그때그때 굅?nbsp;기억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자체적인 사고가 따르지 못하는게 폐단으로 나타났다. 초기교육은 어린이의 기억력을 빨리 개발할수 있었지만, 논리사고방식이라든가 추상적인 사고방식은 줄어들게 되는 허점이 있었던것이다.
권정은 정말 “복이 있는 행운아”였다. 사람 역시 애목 가꾸듯 자주 바로잡아야 한다는게 권기홍씨의 지론이다. 권정이의 뒤에는 언제나 부모가 원예사처럼 지켜주고있었다. 부모들은 중학교때부터 의도적으로 권정의 공부의 중심을 수학에 옮겼다. 권정이의 수학성적은 날로 높아갔다. 그가 나중에 대학입시에서 점수를 제일 높게 맞은 과목은 수학이였다. 만점 150점에 144점을 맞았던것이다.
초등학교때 권정은 영어과외를 다녔는데, 자청 영어경연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때 권정은 북경시초등학교 영어경연에서 2등을 했다. 북경시 한 유명 실험중학교는 영어중심의 학교였는데, 교장은 이 소식을 듣자 직접 권정네 집으로 찾아와 권정을 이 학교에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남들 보기에는 입에 들어온 떡을 차버리는 격, 그러나 부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영어는 인재로 되는 하나의 수단일뿐이며 유능한 인재로 자라자면 어느 한 과목이 위주가 아닌 종합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그들의 고집이였다.
애가 크면서 마냥 그 뒤를 쫓아다니듯 할수 없는 일이다. 권기홍씨는 애에게 공부하는 자각성을 길러주는 방법은 강박이 아니라 인생의 큰 꿈과 비전을 심어주는것이라고 곱씹었다.
“권정이의 어릴 때 꿈은 최고의 유능한 인재로 되는것이였어요.”
최고의 유능한 인재로 되려면 지식이 기반이고, 그러자면 남보다 몇곱절 더 노력해야 한다. 권정이는 중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밤 12시전에 자리에 들어본적 없다고 한다. 밤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15시간이상 꼼짝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권정은 의지력을 기르기 위해 어느 한 여름철에는 아이스크림을 하나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일을 소개하는 권기홍씨의 말에도 저도몰래 놀라움이 묻어나고있었다.
그럼 권정이가 그리고있는 확실한 장래는 무엇일가?… 그의 대답이 정말 궁금했다. 이럴 경우 인터뷰 대상들은 대개 과학자나 장군, 성공한 기업인 등을 속마음을 빤히 펼쳐보이군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는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아직 몰라요. 공부가 아직 끝나자면 멀었잖아요.”
동심일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쓰이는 말일가? 권기홍씨는 이 말은 딸애의 뜻이라고 특별히 힘을 주었다. 이러니저러니 그들 부녀간의 마음은 언녕 하나같이 이어진듯 했다. 권정은 석사과정을 마친후 또 외국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혹여 그냥 지식장악과 기능향상을 앞세우는 그에게 확실한 대답을 요구한 내가 우둔한지 몰랐다. 아니, 사실 권정의 대답 자체가 훨씬 더 확실한지도 모른다. 최고의 유능한 인재로 되여야 한다는 발발한 야심… 권정의 남다른 화려한 경력은 바로 그 목표물까지 인생에 연장선을 확실하게 쭉 긋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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