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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초원에 뿌리내린 불로송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5월12일 07시33분    조회:18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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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몽골자치구 건설환경보호청 전임 청장 렴호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근 반세기를 내몽골 초원에 뿌리 내리고 초원에 정들고 초원에 미쳐서 초원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자신의 청춘과 힘과 지혜를 깡그리 바친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내몽골 자치구 원 건설환경보호청 렴호 청장이다. 미래를 향한 충전 렴호는 1929년 연길시 평안향 동명촌에서 태여났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생산로동에 종사하다가 선후로 연변 고급사범학교(1946년 4월-1951년 4월), 동북공학원 건축학부(1952년 10월-1956년 10월)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했으며 졸업후 야금공업부 북경강철설계연구원 난방통풍과 기술원으로 사업했다. 1957년 말에는 포두강철설계연구원으로 전근되였고 선후로 통풍수로과 기술원, 난방통풍공정사, 통풍수로과 부과장, 공사관리과장, 정치부 부주임, 과학연구처 부처장 등 직을 맡아 하면서 리이론과 실천을 결부하여 실무수준을 제고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아무런 조직에도 참가하지 않은 그였지만 자기관점을 고집한 ‘잘못’으로 보수파, 수정주의로선의 집행자로 인정받아 비판을 받기도 했다. 흑백이 전도된 사회가 조만간에는 바로 잡힐 날이 돌아오리라는것을 확신한 렴호는 아예 정치를 불문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여러 방면의 서적들을 걸탐스레 탐독하여 향후의 발전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다졌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여 1980년 6월에는 52살의 나이에 고등교육부의 통일시험에 합격되어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학 환경과학연구센터에서 2년간 연구원으로 공부하면서 환경보호에 관한 지식을 더욱 깊이 장악하였다. 뛰여난 기여 렴호는 1957년 말 야금공업부의 배치에 따라 북경에서 포두강철설계원으로 전근된후 선후로 포두강철공사, 청해 서녕특수강공사 및 황중(煌中)강철공사, 감숙 서북 철 합금공사, 신강 우룸치강철공사 및 화정(和静)강철공사, 섬서 금퇴성(金堆城) 몰리브덴 철 합금공사, 수도 강철공사, 하남 531공사 등 강철기업의 설계와 시공현장의 관리사업을 맡았다. 이때로부터 그에게는 고정된 집이 따로 없었다. 건설현장이 바로 그의 집이였고 장장 24년을 하루와 같이 내리쬐는 뙤약 볕, 이악스레 기승을 부리는 황사바람을 무릅쓰고 렬악한 자연환경과 박투하면서 야금공업부에서 맡겨준 강철공장 설계 시공임무를 원만히 완수했다. 그중 서녕특수강공사의 설계는 1981년 야금공업부 ‘70년대 국가 우수 설계상’을 수여받았다. 1982년 일본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렴호는 당시 환경보호부문이 없어 야금공업부와 련계하여 천진에 가려고 생각했는데 내몽골자치구에서 환경보호인재로 점찍고 놓아주지 않아 내몽골에 주저앉게 되였다.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중국도 환경보호를 중시하게 되였다. 내몽골자치구에서 둘도 없는 환경보호인재로 점찍힌 렴호는 내몽골자치구 환경건설보호청 청장(83년 부청장, 87년 정청장)으로 발탁되였다. 렴호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신이 배운 지식을 마음껏 실천할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당시 내몽골에는 큰 오염이 없었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지말고 오염을 원천차단하여 자연의 원 상태보전이 중요하다고 인정하고 내몽골자치구 자연보호구 총체계획을 세우고 하나 하나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제의하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린골맹(锡林郭勒盟), 커얼친초원(科尔沁草原), 훌룬벨맹(呼伦贝尔盟), 달래호(达赉湖) 등지에 초원자원 보호구를 설치했고 자치구에 환경보호소, 환경감측소를 세우고 토양, 오수, 환경 등을 감독했으며 여러 차 일본전문가를 초청해 내몽골자치구를 고찰하고 학술교류를 진행했고 대표단을 무어 일본, 미국, 몽골 등 국가를 방문하여 환경보호, 건축업, 건축자재 등 방면의 과학기술합작관계를 건립했다. 그중 일본과 내몽골과학기술자가 합작한 ‘실린골(锡林郭勒)초원 자연보호구 초원생태보호’ 과제 연구, 내몽골과 미국 국제 학류기금회 학류 보호 과학기술합작, 내몽골과 몽골의 건축업과 건축자재업분야의 과학기술합작 등은 내몽골의 생태자원을 보호하고 건축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렴호는 당시 자금이 딸리는 상황에서 만주리, 통료, 제녕 등 세 곳에 돈이 적게 들고 자연지세를 린용한 산화늪(氧化塘)을 세우고 도시 오수를 침전시켜 관개용수로 쓰는 방법을 실시, 도시 오수처리에서 좋은 효과를 보았다. 그는 또1987년부터 1988년까지 전 자치구적으로 천연 방사수평조사를 진행했다. 7년간 내몽골자치구 행정부문에서 사업하는 기간 전면사업을 틀어쥐는 외 환경오염처리, 법규건설, 환경보호 조사연구, 자연보호 등 면에서 큰 성과를 올려 1989년 4월 국무원 환경보호위원회로부터 ‘전국 환경보호사업 선진사업자’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렴호는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켜 생태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가운데서 많은 우수한 론문과 연구성과를 책자로 내놓았다. 일본류학기간 일본인(加腾龙夫) 교수와 합작하여 석탄연기의 암유발물질 분석기술 과제를 연구, 일본환경부문이 환경질량에 대한 감독관리문제, 오염처리기술, 환경과학연구상황 및 일본의 ‘4대 공해’의 과거와 현재 상황 등을 고찰했다. 그가 발표한 기타 석탄 연기에 관한 론문은 일본 환경보호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 렴호는 내몽골자치구 교수, 전문가들과 ‘내몽골자치구 자연보호요강’을 집필했고 자치구 6개 청(국)을 조직하여 ‘내몽골자연보호구 총체 규획’집필에서 편찬위원회 주임직을 맡았으며 ‘내몽골 환경 생태문제 및 그 대책’, 자연보호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등 문장을 집필하여 내몽골환경보호사업에 뛰여난 기여를 했고 ‘내몽골 조선민족’을 출판하여 조선족을 위한 보귀한 사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1984년이래 렴호는 선후하여 중국 환경과학학회 제2회, 제3회 리사, 내몽골 환경과학학회 리사장으로 활약했고 1987년 내몽골 생태학회를 설립했으며 1988년에는 내몽골 조선족 연구회를 건립했다. 1983년 7월 렴호는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로동인사부, 중국 과학협회로부터 '소수민족지역에서 장기간 과학기술사업에 종사한 영예증서'를 발급받았다. 청렴한 간부 실력으로 청장이란 고위관직에 앉은 렴호는 청렴한 간부였다. 그는 아첨이 무엇인지 몰랐고 뢰물을 줄줄도 받을줄도 모르는 간부였으며 언제나 공산당원의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고 당성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꼬물만치도 하지않았다. 부허(布赫)가 내몽골자치구 당위서기직에 있을때의 일이다. 아무런 수준도 능력도 없는 부허의 손자를 인맥관계를 통해 건설환경청 소속의 한 중등전문학교 당위서기로 배치하려는 것을 렴청장이 딱 막는 바람에 끝내는 성사되지 못했다. 렴 청장의 말대로 한다면 학교는 인류령혼의 공정사를 키우는 전당인만큼 차질없이 인재를 양성할만한 령도를 배치해야 한다는것이다. 상급의 비위를 거슬러 놓아 향후 자기에게 차례질것은 랭대밖에 없다는것을 번연히 아는 렴청장이였지만 상대가 누구이든 원칙앞에서는 에누리가 없는 청렴한 간부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 렴호는 내몽골 조선족연구회의 창시자이자 초대 리사장이였으며 재직시 사업이 다망한 가운데서도 조선족의 사업을 착실히 떠밀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뒤 더욱 많은 시간을 조선족을 위해 일하게 되였다고 말하는 그는 여러모로 조선족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산재지역에 살면서 언어와 민족습관 고수가 어렵다면서 민족의 얼을 잊지말자는 고집으로 조선족의 모임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민족전통을 후세에 전하는 일을 잊지 않고 있다. 1995년 ‘내몽골조선족’을 편찬했으며 ‘21세기를 지향하는 중국 조선족’, '당대 중국 조선족 화첩 인물록'등의 집필에 내몽골부분을 제공하기도 했고 '조선족의 성씨 족보전서'를 출판하였다. 현재 77세 고령에 정력을 몰부어 ‘내몽골 민족지’집필에 전력하고 있다. 2006/05/11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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