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캐나다 한인 약사 1호 최신근씨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8월1일 11시23분    조회:1756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많은 한인들이 이민을 가서 현지사회에서 성공했다고 믿을 수 있는 직업이라면 소위 ‘사’자 로 끝을 맺는 전문직종들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보면 의사, 변호사, 그리고 회계사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사’자 돌림의 전문직종들은 오랜 정규 학습과정과 꾸준한 실습의 세월이 필요한 직업들이라 하지만 일단 나오기만 하면 그 인내의 대가가 명예와 선망의 대상으로 보여지게 된다. 캐나다로 이민을 왔었던 초창기 이민 1세대들에 대한 얘기를 거론할 때 주로 상업이나 법률, 아니면 의료계에 종사해 왔었던 사람들이 여러 매체에서 소개되어 왔으나 아직까지 약사로서 알려진 한인들은 거의 전무하므로 그리고 여러 ‘사’자 전문직종들 중에서 대학에서 약학과를 나와 약국이나 제약업계에서 일하는 약사라는 직업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므로 이런 점들에서 볼 때 1968년에 BC주에서 최초로 약사자격증을 취득한 캐나다 최초의 한인약사 최신근씨 (66세)는 우리가 짚고 넘어 갈 수 있는 한 사람이다. 1965년에 서울 약대를 졸업한 후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 그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외국에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원래는 아버지를 따라 브라질로 이민을 갈 예정이었다고 하나 그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대신 캐나다로 간 친구들의 권유로 인해 1966년 영국대사관을 통해 캐나다 이민 신청을 하게 된다. 이듬해 신체검사를 마치고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와 함께 밴쿠버로 가려 했으나 이민 심사 인터뷰 때 이민관들로부터 아내는 아이를 낳고 안정을 찾은 후에 들어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고 그는 결국 200불 가량의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 홀로 캐나다로 먼저 날아간다. “한국이 너무 좁아서 외국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서도 하는 젊음의 고생을 타국에서 하기로 마음먹었던 최씨는 캐나다에서 약사로 일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계획을 세웠다. “BC주에서 직장을 잡겠다는 것이 첫 번째 캐나다 정착목표였다”고 밝힌 그는 만약 잘 안 될 경우 제약회사들이 많은 토론토로 갈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약학 공부도 좀 더 하기를 원했던 그는 1차로 약사가 된 다음에 캐나다에 한 대학원에서 약학을 좀 더 공부할 예정이었으며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브리티시 컬럼비아 (UBC) 의과대학에서 약리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입학 준비를 하였고 BC주 약사회에 연락도 하여 외국인으로서 캐나다 약사가 될 준비도 동시에 해 왔다고 한다. 먼저 BC주 약사회에서 요구하는 약대 졸업증명서를 제출한 후 협회에서 요구하는 소정의 견습과정을 마친 후 자격증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그가 캐나다에서 약사면허를 취득한 것은 1968년. 한국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캐나다에 와서 정식으로 약사 자격증을 취득한 첫 번째 한국인이 된 것이다. 2년 후 한 약국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게 되고 1992년 에 은퇴를 하였으나 강제로 은퇴를 권유하는 캐나다는 아니기에 그는 아직도 한 약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다. 늘어나는 환자들에 비해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여러 의료업계 인원들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로 인해 그는 은퇴한 약사들 중 20~25% 정도가 아직도 일을 계속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자기 다음으로 70년도쯤에 약사 면허를 취득한 박충남 목사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함), 그리고 자신의 서울약대 선배인 김삼열씨가 뒤를 이어 캐나다에서 약사자격을 취득했다고 그는 조심스럽게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근래 4명 정도의 서울약대 출신의 후배들이 밴쿠버에서 약사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한다. 최씨 같이 당시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민국가로 잘 알려진 미국과 달리 캐나다와 캐나다 사회에 대해 생소해 했었다. 그는 한국에서 캐나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 대사관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가 캐나다에 대한 지리와 산업 구조 그리고 사회 모습에 대해 전반적으로 정보 습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캐나다에 도착하여 직접 살아 보고 그는 한국에서 이해했던 캐나다에 대한 지식과 달리 많이 다른 현지 사정 때문에 이민 생활이 힘들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최씨가 이민을 갔던 60년대 후반에 이주했던 밴쿠버 한인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바로 한인연합교회와의 연관성이다. 1966년 에 창립하여 초창기 밴쿠버 한인 이민사의 중요한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던 그 곳에는 힘들게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당?모든 한인들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이상철 목사가 있었다. 이 또한 중요한 연관성이다. 최씨는 “캐나다에 올 때 캐나다에 대한 정보를 여러 사람을 통해 얻으려고 하였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연합교회의 이상철 목사에 대해 우연히 들을 기회가 있었고 전화번호와 주소를 받았다”고 말하며 밴쿠버에 도착하여 머물렀던 YMCA 호텔에서 연락을 하여 그와의 첫 만남을 이루게 되고 그의 인도로 UBC에 있는 한 신학대학인 유니온 칼리지의 지하실에서 매주 열렸었던 한인연합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하게 된다. “교인이던 아니던 한국사람이라면 모두 모였던 곳”이라고 한인연합교회에 대한 첫 인상을 말하는 최씨는 “밴쿠버에서 한국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은 교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후에 예배 보고 강당에서 체육활동 아니면 날이 좋은 날에 공원으로 소풍을 가서 배구도 하고 저녁을 먹고 귀가 하곤 했다”고 당시 즐거운 기억을 회상한다. 현재도 약사로 활동하며 활기차게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그는 매일 한 시간씩 인터넷과 신문을 통해 한국 소식과 역사를 접한다고 한다. 2 년 전에 한국에 가서 설악산과 보길도, 그리고 하회 마을 등 평소에 가고 싶었던 한국의 절경을 둘러보기도 했었다는 그는 39년 동안의 이민 생활에 대해 “외국에서 사는 것이 굉장히 힘들 때가 많고 때로 여기에서 한인 사회가 갈라지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기도 하지만 나는 한국과 한국사람을 굉장히 사랑한다고 한다.” 며 오랜 타국생활에서 절대 자신의 뿌리를 잊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6,70년대에 이민을 왔던 한인들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자랑스럽게 밝히는 한국사랑 그리고 동포에 대한 애정.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어렵게 이민 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착도 강하게 살아 함께 그들과 같이 있어 오지 않았는가 싶다. 그 애정을 바탕으로 꿋꿋하게 타국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신의 꿈을 이뤄내며 제 2의 고향으로 자리 잡아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이들. 최신근씨도 분명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엄문현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11월 8일 북경에서 열린 중국보도상, 장강도분상, 전국우수보도사업일군상 발급대회에서 연변보도사업일군협회 주석이며 연변일보사 사장, 주필인 리영이 전국우수보도사업일군 칭호를 수여받았다.이번 표창활동은 중앙선전부, 중앙대외선전판공실, 국가라지오텔레비죤총국, 신문출판총서, 중국기자협회에서 조직한것으로서...
  • 2009-11-09
  •   연변의 첫 불학대사- 수월스님    지난 10월 26일 길림성 도문시 일광산에서 “일광산 화엄사 대웅보전 락성 및 불상 개안 경축법회”가 열렸다.중국불교협회부회장 명생스님, 국가종교국 장견영부국장, 김기덕 도문시 시장과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에서 온 불자 등 2만여명이 참여한 가운...
  • 2009-11-08
  • 인재와 기술유치로 유기비료업계 주름잡는 여강자흑룡강성달풍과학기술개발유한책임회사 김희선리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 최성림 기자 = 1997년에 6명 주주가 사회자금을 모아 세운 흑룡강성달풍과학기술개발유한책임회사(리사장 김희선, 58세)는 주로 유기비료를 생산하는 회사이다. 할빈시 아성구에 위치한 이 회사가 ...
  • 2009-11-06
  • 가는 곳마다 민족교육의 꽃 피워 《제5차 전국민족단결진보선진모범개인》의 영예를 받은 리종성교장의 사업담일전 장춘시조선족중학교의 리종성교장은 국무원에서 조직, 선발한 《제5차 전국민족단결진보선진모범개인》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리종성교장은 1974년에 사업에 참가하여 35년래 선후로 5개 중소학교에서 교장사...
  • 2009-11-06
  • 그는 원래 일본어교사였다ㅡ태강(TAIKO심수)전자유한회사 제조부 부장 량성춘씨를 만나 10년전 화룡시 투도광흥중학교에서 일본어교원으로 사업하다가 일본어반급이 취소되자 관내진출을 선택한 30대의 젊은이가 있었다.  독특한 일본어 과당교수로 화룡시는 물론 연변주에서도 소문이 높았던 량성춘씨는 배운 전...
  • 2009-11-06
  • 꿈 하나로 열심히 뛴 24년 전국우수교원 정향란교원의 사업담1985년 8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살 꽃나이에 길림성 왕청현 쌍하향 화신소학교에 배치받았을 때 정향란은 인민교원의 자부심으로 이 세상을 혼자 독차지한듯 싶었다. 합격된 교원으로 되려는 꿈을 안고 기쁨은 잠시였다. 그를 맞아준것은 헐망한 단층...
  • 2009-11-05
  • —어통천하중국번역총사 연변번역쎈터 사장 전정옥씨 역경을 딛고 성공의 희열을 만끽 “꿈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 꿈은 인생의 희망이다. 희망이 있어야 노력이 있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따르기마련이다. 성공은 언제나 희망을 품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있을뿐이다.반대로 꿈이 없다면 희망도 없...
  • 2009-11-03
  • 중국 말대황후 완용(婉容)의 이미지라면 아마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금의옥식과 질투의 화신, 사치함 등 단어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사실 역사적 유물주의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완용은 용모가 아름답고 품행이 단정하며 외유내강함과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중국전통미덕 및 서양사상교육을 겸비한 여성이다. 완용은 ...
  • 2009-11-03
  • 중국의 미사일 연구와 우주개발의 대부격인 원로 과학자 전학삼 박사가 31일 북경 자택에서 향년 98세로 별세했습니다. 언론들은 전학삼 박사의 별세 소식을 일제히 주요 뉴스로 다루면서 그의 업적과 생애, 지도부와 얽힌 일화 등 각종 소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항주에서 1911년 출생한 전학삼 박사는 상해교통대학과...
  • 2009-11-02
  • 1932년 11월, 일본침략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이듬해 2월 11일 밤, 룡정, 로투구방면의 일본수비대와 이도구의 무장자위단 및 10여명 일본경찰 230여명으로 조직된 토벌대는 밤도와 왕지평으로부터 어랑촌유격근거지를 향해 출발했다. 이날 밤 일본수비대 대장 쯔루오까...
  • 2009-11-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