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족녀경영인의 멈출줄 모르는 추구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8월11일 07시53분    조회:794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 -목단강시 '새서울불고기'음식점 계렬업체 총경리 채옥씨의 경영담 여기에 농촌처녀가 도시총각과 결혼하여 무직장의 압력에 못이겨 경영에 손을 댔다가 재미를 붙이고 무도장, 음식점, 노래방, 다방, 민박,미용원 등에 손을 대며 성공일로를 내달아온 이야기가 있다. 채옥(44세), 고중을 마치고 고향인 해림시 해남조선족향 홍성촌으로 내려온 그는 목단강시에 들어가 음식점일을 하다가 우연히 목단강시 총각 윤덕호와 사랑담을 나누며 결혼까지 서둘렀다. 말이 도시총각과의 결혼이지 실은 직장이 없다보니 맘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이때 시집친척들이 그에게 장사같은걸 해보라고 권고했다. 그가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자 친척들은 돈 만원을 대주며 뭐든지 해보라고 했다. 이에 맘을 굳힌 그는 남편의 오토바이를 팔아 3000원을 보태여 당시 목단강시조선족문화관의 무도장을 청부했다. 이때가 1990년, 그에게는 이미 두살짜리 애가 딸린 뒤였다. 비록 농촌처녀가 뭘안다고 도시에서 경영을 해보려하는가고 일부에서 비웃는 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그의 무도장은 매일 초만원을 이루는 등 경기호황을 보였다. 입장권 한장의 값이 1원밖에 안되였지만 꼬박 4년을 하고보니 돈이 모아졌다. 그럼 채옥씨의 경영을 성공으로 밀어준 자양분은 무엇일가? 바로 무도장을 경영할때 근처에서 한족할머니가 작은 음식점을 5년을 하루와같이 경영하는것을 보고 '바로 저것이다, 자그마한 벌이이지만 꾸준히 하면 돈을 버는구나!'라고 개탄을 쏟은것이다. 그렇지만 그 리속을 캐보면 역시 당시의 개혁개방정책을 잘 파악한것이다. 그의 경영행적에서 제일 불거지게 나오는것은 뭐나 선손을 쓰고 담차게 새로운것을 추구한것이다. 무도장을 경영할때 그는 근처의 려인숙을 하나 구매해 경영하다가 방을 하나 내여 목단강에서 처음으로 커피숍을 꾸렸다. 커피 한컵에 20~30원하였다고 하니 실로 금싸락줏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뒤 목단강시에 커피숍이 많이 나지자 그는 시누이와 합자하여 노래방을 시작했다. 노래방도 그때 당시 많지 않던 때여서 경영이 잘되였다. 그러나 그는 단연히 노래방을 남편한테 맡기고 집에서 1년을 쉬면서 애를 키우는 일에 정력을 쏟아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자그마한 부동산중개회사 영업허가서를 하나 내여 집에 앉아서 '집'장사를 하였다. '그때 부동산중개를 견지했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움을 표시할 정도로 그때 중개맛이 짭짤했다. 1996년, 1년을 집에서 쉰 그는 그동안 경영길에서 단련된 성격기질로 갑갑증을 참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누이와의 노래방합자경영을 그만두기로 하고 자금을 빼냈다. 그리고 이항목 저항목을 겨루어보다가 접어든것이 목단강에서 불고기집으로는 두번째집으로 장안가에 개업한 '새서울불고기'음식점이였다. 당시 영업면적 400여평방미터의 집을 아예 사들여 시작했는데 한국을 다녀오지도 못한 그였지만 주방용기를 전부 한국에서 사들여오고 월로임 1만 5000원에 한국에서 주방장을 1년 초빙하고 개업식날에 문전에서 손님들이 보는데서 소를 한마리 잡는 등 장거를 보여 일약 음식점치고 손님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곳으로 되였다. 그리고 자금이 얼마간 루적되자 옆집의 불경기에 처한 음식점까지 사들여 '새서울개고기'계렬음식점(영업면적 400평방미터)을 신장개업했다. 지난해 장안가가 목단강시조선민속일조가로 변신하자 그의 장사는 더 불티났다. 여기까지도 성차지 않아 그는 다방, 오락관을 곁들였으며 목단강시로 한국손님들이 많이 찾아드는 시세를 판단하고 방 10개의 '새서울민박'도 경영하고있다. '혼자서 이처럼 여러개 실체를 어떻게 경영하는지?' 기자가 궁금해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는 갓 '새서울불고기'를 경영할때 손님들이 밤에 많이 찾아들어 남편이 새벽 2시까지 주방에서 그릇을 가시고 스스로도 손님을 치느라 바삐 보내던 때를 상기하며 그때는 그만둘가고 생각이 날 정도로 고달펐다고 말했다. 장사가 하도 잘되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했을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오늘의 경영은 신선놀음이라 할가. 사무실에 감시기기를 걸어놓고 각 영업체를 관리하고있는 그의 모습에서 모든 업체를 개인자산으로 만들며 일보일보 달려온 성공의 희열이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의 경영행로가 멈추는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정애미용'(잠정)의 영업허가서를 내놓고 요즘 개업준비를 서두르고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에피소드식 경영이다. 실제로 그가 겨냥하고있는것은 호텔경영이다. 그것도 먼 후날이 아니고 요즘 위치를 물색하고있는 중이라했다. 2006/08/10 흑룡강신문 김태산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1958년, 봄, 김 철은 귀향한다. 그가 맨 배낭에는 전쟁의 초연 속에서 쓴 '전선 시초'1백 여 편이 들어 있었다. 해란 강변엔느 새움이 돋고 있었다. 연변 땅을 밟으며 가슴이 벅찼다. 즉흥시가 떠올랐다. "이른 봄 해란 강에 아지랑이 피는 데/귀환병과 처녀는 고향 길을 거닐었네/담벽 같은 앞가슴에 주렁진 훈장은/결결한...
  • 2005-10-25
  • 북경 킹스카이정보기술휴한회사 김호동사장 중국의 “실리콘벨리”로 불리는 북경의 중관촌, 중국 IT시장을 선도하는 북경시장에서 민족기업가인 김호동사장도 중한 상무교류를 바탕으로 프로그램 개발, 사이트 개설 등으로 선두역할을 하고있다. 길림성 도문시 출신인 김호씨는 1988년 7월 중앙민족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
  • 2005-10-24
  • 1700여개 한국기업 입주 상주 한국인 8000여명 대련은 중국 동북3성의 대외개방 및 경제개발의 창구로서 가장 큰 해안무역도시이다. “대대련건설”(大大連建設) 가속화와 중한량국간 경제관계의 진일보 발전으로 한국굴지기업들의 대대련투자가 발빠른 행보를 거듭하고있다. 특히 올해 한국 조선업계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 2005-10-24
  • [원제: 일반인도 “항천꿈”실현 가능] 할빈공대 김영덕교수 신주시리즈 우주선 청사진 그려 최근 기자의 취재를 받은 할빈공업대학 항천학원 김영덕교수는 “몇천년후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실험을 하고 일반인들도 우주려행꿈을 실현할수 있게 된다”고 하면서 향후 중국항천사업발전의 미래를 전망하고 우주선이 우주를 비...
  • 2005-10-24
  • 김상기 일가는 길림시 교외의 가반가에 눌러 앉았다. 길림시에서 서북쪽으로 공장구역-하다만을 지난 송화강 나루터를 지나면 불과 십리도 못 되는 시골이었다. 일명 북길림이라 했다. "길림시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신길림이 있었죠. 일본인 마을이었지요. 만주석유회사도 있고,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신길림에 사는...
  • 2005-10-24
  • 전남-곡성군 입면 삼오리, 넓지 않은 벌판, 옥답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김상기는 유년기, 엿 궤짝을 둘러메고 정처 없이 흘렀다. 그러다 거지가 됐다. 울산에서 또래 거지를 만나 친구가 됐다. 부둣가로 놀려 갔다가 일본의 화물선과 인연이 된다. 화부다 됐다. 화물선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큰 화물선 회사 소속이었다...
  • 2005-10-21
  • [원제: 어려움속에서 성공한 행운아] 2005-10-20 10:21:37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마음씨 고운 뭇사람들의 도움으로 끝까지 학습에 노력하여 중국의 명문대학인 절강대학에 입학한 정춘매학생은 참으로 행운아였다. 집이 흑룡강성동녕현삼차구진에 있는 정춘매학생의 가정은 본래 생활형편이 괜찮았다. 그런데 자녀의 공부뒤바...
  • 2005-10-20
  • 중국은 요즘 101세를 일기로 지난 17일 세상을 떠난 원로 문학가 바진(巴金) 중국작가협회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하다. 그가 오랫동안 살았고 숨을 거둔 상하이를 비롯해 그가 설립을 주도했던 현대문학관이 있는 베이징, 1904년 그가 태어난 쓰촨성 청두 등에서 추도 행사가 한창이다. 중국 신문들은 엄청난 지면을...
  • 2005-10-20
  • 유년 시절의 대가족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에 외할머니가 파금을 안고 있고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금의 모친이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17일 세상을 등진 파금(巴金)은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1904년 11월24일 사천(四川)성 성도(成都)에서 태어났다. 본...
  • 2005-10-20
  • 항미원조시기 파금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작가였다. 1952년 3월 31일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4월이후로는 개성 제1선으로 나갔다. 그는 친히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영웅들속에서 생활》하였고 10월에야 귀국하였다. 그후 1965년까지 그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에 대해 노래하는 글들을 많이 썼다. 이 시...
  • 2005-10-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