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림업기계 연구 개발의 선두주자, 국무원 특수수당금 향수자 김태현 로옹
최근 동북림업대학 건교 70주년 경축행사차 산동성 청도에서 비행기편으로 할빈에 오신 김태현 로옹을 만났다. 85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력이 왕성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박식한 분이였다. 이야기를 통해 김 옹은 중국 립업기계 연구 개발에서 선도역할을 했던 분이고 국무원 특수수당금 향수자임을 알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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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로옹.
1938년 한국 경상북도 안동군 태생인 김 옹은 당시 일제 강점기시대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살길을 찾아 1941년 봄 아버지의 등에 업혀 중국에 건너왔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동북림업대학 림업기계전업을 졸업한 김 옹은 국가 림업부 림업기계연구소(북경)에 배치받았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66년9월 흑룡강 이춘에 있는 동북림업기계연구소로, 1969년에는 흑룡강성림업총국 산하 림업기계연구소로 옮겨다녔다.
김 옹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림업기계연구에 대한 의욕은 식을줄 몰랐다. 당시 중국은 생산력이 락후해 묘상 만들기, 묘목 육성과 식목 등 림업 관련 거의 전부 일을 인공으로 진행해 효률이 매우 낮았다. 국가의 림업기계 연구 개발 중임을 떠멘 김 옹은 팀을 이끌어 림업기계 연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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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로옹(뒤줄 왼쪽 첫번째)은 지난7월10일에 진행한 동북림업대학 건교70주년 기념행사 참가차 할빈에서 졸업한지57년이 되는 동창들과 반갑게 만나 기념사진을 남겼다.(사진 본인 제공)
그의 주도하에 연구팀은 드디여 축상기(묘포의 묘상 축조기 修筑苗圃苗床的机械-筑床机)를 연구 개발했다. 김 옹은 "당시의 생산조건에서 수종 묘목을 키우는 묘상(苗床)을 인공으로 축조하고 갈퀴(耙子)로 정지하여 트리밍성형(修整整形)을 실현한 후 파종하는데 이렇게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률이 떨어지며 품질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산작업의 개인차이로 인해 정지성형을 거친 묘상 또한 불규칙하며 묘상 지면의 평탄도도 부족하여 물을 준 후 지면이 낮아 물이 고인 부분은 활착률에 영향을 준다"고 소개했다.
그가 연구 개발한 이 기계는 생산효률을 100% 이상으로 끌어올려 국가 림업부의 높은 중시를 받았으며 1966년 국가림업부에서 흑룡강성 림업총국에 위탁해 진행한 기술검증에 통과되여 량산에 들어갔다. 이 기계는 주로 동북 3성과 내몽골지역 림업국의 락엽송, 홍송, 장자송(樟子松) 등 수종 재배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김 옹에 따르면 부동한 지역에 따라 자연조건이 다르고 나무를 심는 방식과 종류가 달라 사용하는 기계도 틀린다고 한다. 김 옹은 전국 각 지의 림업국을 다니며 현지 고찰을 하고 현지 실정에 맞는 림업기계 연구에 집념했다. 서북지역 림업국을 고찰하고 현지 림업국 실정에 맞는 서북 사황기계(西北沙黄机械)를 연구 개발하여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림업건설에 크게 기여했다. 이 항목은 또한 국가 6차 5개년 계획 림업항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어 김 옹은 개구식수기(开沟植树机)를 연구 개발해 박양나무 재배 등 작업효률을 70%이상 제고했고 1978년 국가 과학기술대회상을 획득했다.
1983년-1985년 김 옹은 대흥안령에서 반복적인 실험을 거쳐 또 락엽송 재배에 사용되는 선택식식수기(选择式植树机)를 연구 개발해 락엽송 재배 히트상품 인기를 누렸고 1987년 국가 림업부 과학기술 진보 3등상을 획득했다.
1986년-1990년 사이 김 옹의 연구팀은 또 국가 7차 5개년 계획 항목을 접수하여 용기모재배기(容器苗栽植机)를 연구 개발해 광서쫭족자치구 림업청 과학기술처의 검증에 통과되였으며 1992년 국가 림업부 과학기술 진보 3등상을 획득했다. 그가 연구 개발한 림업기계는 오래된 것은 수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량산되고 있다고 한다.
김 옹의 연구팀(그를 포함해 총 5명 팀원)은 1975년 흑룡강성 립업총국 모범로동자 집체 기준병상을 획득했다.
김 옹은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부터 국무원 특수수당금을 향수하고 있다.
1998년에 정년 퇴직한 김 옹은 농기계전문업체인 신태(新太)회사를 도와 한국에서 이앙기, 련합수확기 등 선진적인 농기계를 수입하여 중국에 보급하는 사업에 10년여간 종사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기계를 연구 개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김 옹은 “사업에서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생활에서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같은 뚜렷한 목표의식이 그가 림업기계 연구 개발에서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은 원동력이 되였다.
2004년 자식을 따라 청도로 간 김 옹은 청도 조선족교사친목회에서 상모춤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다. 지금도 긴 칠색띠를 돌리며 3분 넘게 상모춤을 추는 일은 례사로운 일이라고 한다.
항상 평온한 심리상태를 유지하는 김 옹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며 지금도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접촉한다. 그만큼 박식하다보니 누구와도 평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매너와 수준이 갖추어져 있다. 동북림업대학에서 10년에 한번씩 진행하는 경축행사에도 빠짐 없이 참가한다. 올해에도 코로나의 영향과 고령을 념려하여 학교에서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모교에 대한 련민과 동창들과 만난다는 기쁨을 안고 서슴없이 할빈에 왔다.
김 옹은 이같이 생활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일을 만들어 가며 오늘도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만년을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흑룡강신문 /남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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