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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화백 장철주] "미술은 내 생의 동력이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6월21일 08시36분    조회: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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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장철주
미술은 내 생의 동력이다
 
장철주 화백
 
중국미술가협회 회원이며 길림성 조선족 미술인협회 사무 부총장인 장철주 화백(1962년생)은 2006년에 작품 “춘하추동”과 “량산의 자매”로 중국미술가협회 19차 신인신작전시에 입선되였으며 그의 작품 “기억을 잠그다”는 2010년 상해박람회 중국미술작품전에 입선되는 영예를 지녔다. 우리 나라 서부지구의 자연과 인문을 주제로 예술활동을 활발히 벌리는 장화백은 국내 미술계에서 자신의 독특한 화풍으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이웃들에게 화투를 그려주는 소년
 
장화백이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소학교를 다닐 때였다. 어느 하루 옆집에 놀러갔는데 그집에서 화가 한분을 청해와 이불장 유리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80년대까지 조선족 가정들은 이불장이나 찬장에 소나무, 학, 과일 같은 그림을 그려넣었는데 바로 그런 그림이였다. 호기심이 동한 어린 소년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곁에서 그림 그리는 걸 지켜보았다. 
 
그림을 그리던 분은 길림지구에서 유명한 강완규 선생이였다. 선생님의 붓끝에서 서서히 완성되여가는 학은 마치 진짜 살아움직이는듯 했다. 한마리는 바위우에 도고히 앉아 멀리 바라보고 있고 다른 한마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려고 했다. 며칠간 그는 밥술 놓기 바쁘게 옆집에 가서 그림 그리는것을 구경하였다. 그는 미술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후로 장철주는 시간만 나면 혼자서 그림을 그렸고 방학간이면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다. 방학기간은 그가 회화기초를 닦는 좋은 시간이 되였다.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힌 그는 화투를 그려서 이웃에 나누어주었고 친구들에게도 선물로 주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꼬마 미술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에 힘을 얻은 그는 더욱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강완규 선생을 모시고 그림을 배우는 한편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자신의 미술 실력을 키웠다. 
 
작품감상
 
그가 초중 2학년을 다닐 때 길림시에서 전시청소년회화시합이 있었다. 신심은 없었지만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그는 “우리 반주임”이라는 그림을 그려 시합에 참가하였는데 생각밖에 1등상을 받았다.
 
“성숙지 못한 작품이지만 1등이란 영예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였어요. 미술이 저에게 안겨준 큰 영예였지요. 아마 올가미였는지도 몰라요. 저는 그 올가미에 완전히 걸려들어 지금까지 헤여나오지 못합니다.허허…”
 
图片작품감상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줄곧 회화를 견지하였다. 그의 마을에서는 이미 그를 화가라 불렀고 린근 동네에서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가끔씩 그림을 그려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반급과 교정의 선전란을 꾸리는 일 모두 그의 몫이였다.
 
“1982년에 고중을 졸업하게 되였어요. 졸업을 앞두고 교장선생님이 저를 찾아와 학교에 남아 미술과목을 가르칠걸 건의해왔어요. 굴러온 복이지요. 물론 그 건의를 선뜻 받아들였지요. 그렇게 학교에 남게 되여 미술교원이 되였지요.”
 
 
3년간 미술교원으로 있던 그는 차츰 실력의 한계를 느꼈다. 1986년,그는 대학입시를 통과하고 길림예술대학에 진학했으며 졸업후도 기업에 배치받아 공회의 선전화를 그렸다. 그 시기인 1995년 그는 전국방직업체 미술시합에서 1등상을 받았으며 회화에 더욱 매진하였다.
 
 
 
시들해질 때 “희망”의 불꽃이 지펴지다
 
90년대 말, 장철주 화백은 30대의 한창 나이였다. 그 시기 많은 작품을 창작하여 전국적인 시합 조직위원회에 보냈지만 번번히 바다에 던진 돌마냥 회답이 없었다. 
 
그때 그의 안해는 이미 한국에 나가있었는데 안해는 이틀건너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 그 쥐꼬리만한 월급 받는 직장 때려치우고 한국에 나와요. 한국에서 무슨 일 해도 그 월급보다 많이 벌어요.”
 
그림을 포기한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가 우왕좌왕할 때 수채화 “희망”이 아시아실력파 작품집에 입선되였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희망”은 꺼져가던 미술의 꿈에 밝은 불이 되여 타올랐다.
 
작품감상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열기를 뿜기 시작하였다. 2005년부터 그는 수상 전문호로 되였다. “추곡인가(秋谷人家)”는 제3차 려창컵청년중국그림전시에서 우수상,“춘하추동(春夏秋冬)”, “량산의 자매(凉山姐妹)”는 중국미술가협회19차신인신작전시에 입선되였으며 “취추도(醉秋图)”는 중국미술협회원컵 제3차 북경쌍년(双年)제명자격전에 입선, “절주(节奏)”는 중국미술가협회 도시산수화전에 입선,“류금세월(流金岁月)”은  중국미술가협회 전국소폭공필중채작품전시회 입선, 2007년 작품 “수회청장합(水回青嶂合)”, “운도록계음 (云度绿溪阴)”은 제5회 려창컵청년중국회화전에서 동상 수상,“한추(寒秋)”는 중국미술가협회 2009년중국미술전시회에 입선,“기억을 잠그다(封存记忆)”는 중국미술가협회 상해박람회 중국미술작품전에 입선,”판자구(棚户区)“는 제2차중국미술가협회선묘전시회에 입선,“청말신정(清末新政)”은 중국미술가협회에서 주최한 신해혁명100주년기념 중국미술전시회에 입선,“추수(秋收)”는 중국미술가협회 제7차 중국서부대지정 중국미술전시회에 입선되였다. 
 
화산처럼 터지는 성과앞에서 장철주 화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중국국가화원,중국예술연구원의 연수과정을 거쳤으며 2010년에 중국미술가협회에 가입하였다.
 
앞으로는 고향의 풍치를 화폭에 담으련다
 
장철주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중국 서부 주제가 많다. 그는 처음으로 서부지역에 다녀갔을 때 서부는 그가 살아온 동북지구와 너무나 대조된다는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은 사람이 살기에 무척 척박한 환경이였으며 기후는 건조하고 강수량이 적어 무연한 누런 고원만 면면히 뻗어갔다. 차를 타고 멀리 달려도 인가가 극히 적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다른 미를 발견했다. 서부지구는 순자연적이면서도 사나이다운 느낌이 푹푹 풍기는 바로 그 멋, 그는 그림으로 서부의 미를 반영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번 다녀온후 마음은 자꾸 그곳으로 가있었다. 이렇게 자연히 발길이 잦아지면서 그의 그림 대부분이 서부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주제로 되였다. 그는 “서부는 저의 미술인생을 살린 은인과도 같은 곳이라 할수 있습니다.”고 말한다. 
 
필자는 장화백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의  인생담을 처음  들어보게 되였다. 그의 고향 길림성  장백현조선족자치현은 경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러나 그가  태여난  60년대  초는  가난하기로 이름난 무서운 산골짜기였다. 허기를 달래기가 급선무였던 그 시기 그의  아버지는 촌의 회계를  맡고  있었지만 가족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그때 동네사람들은 외지로 많이 이사를 떠났는데 그의 아버지도 이사를 뜰 생각을 줄곧 했다. 그러다가 고모가 살고 있는 길림시 교구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였다. 그때 장철주 화백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세살배기 어린이였다고 한다. 
 
2010년 장화백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전업화가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현재 심수보안화원의 초빙화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작품을 창작함에 있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이 그림속에 체현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창작무대를 동북의 설경에 맞출 타산이라고 한다. 옛날 가난하여 부득불 떠나야만 했던 고향 장백현으로 돌아가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화폭에 담는다는것은 장철주 화백의 앞으로의 사업계획이라고 한다. 그림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그림속에 그려넣는 그런 미술을 추구하는 그는 미술이야말로 가장 친근한 벗이며 생명의 마지막까지 놓지 않을 끈이라고 말한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리상학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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