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과거 왕징 지역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강을 사이두고 강 동쪽은 대왕징이고 강 서쪽은 소왕징으로 불리웠다. 북경시 도시건설의 수요로 1990년대 중반을 시작점으로 화가지, 남호지역과 이어진 소왕징 지역은 주택 개발 붐이 일면서 중국 부동산업계의 신화를 낳은 곳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주택 개발 붐과 더불어 왕징 지역은 부대시설의 결핍과 교통체증 등으로 일찍 북경시민들로부터 ‘잠 자는 도시’(睡城)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도 달고 다녔다. 이런 상황은 지난 2009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대왕징 개발과 더불어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왕징 지역은 상업, 비즈니스기능을 주도로 하는 도시종합구역으로 거듭났으며 왕징은 쾌적한 주거 및 비즈니스 공간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전의 일로 그 변화를 일으킨 주요기획자의 한사람으로 북경세박투자그룹 박철 회장을 꼽는다. 박철 회장은 지난 2009년 대왕징 개발이 태동기에 처해있을 때 처음으로 소왕징과의 차별화전략을 제기하고 대왕징 개발에 세계 500대 기업을 유치하려는 의견을 선참으로 제기하여 정부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으며 최종 대왕징 개발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박철 회장은 대왕징 개발의 기획 뿐만 아니라 투자유치 및 건설에도 적극 참여하여 탁월한 기여를 한 공로자의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왕징의 새 역사를 쓰다박철 회장의 사무실은 알리바바 등 IT기업들이 다수 입주해 있는 대왕징 과학기술 비즈니스 창신구역의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저기 보이는 포스코 센터와 녹지빌딩이 바로 제가 입주를 성사시킨 겁니다.”
전망 좋은 회사 사무실에서 박철 회장은 우리 일행에게 대왕징의 면모를 일일이 소개했다. 부드러운 겨울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 너머로 아찔한 높이를 자랑하는 포스코 센터와 녹지빌딩이 우리의 눈길을 잡았다.
사실상 2009년까지만 해도 대왕징 지역은 게딱지 같은 허름한 줄집, 울퉁불퉁한 흙길, 잡초가 무성한 미개발지대로 남았다. 2009년 대왕징 촌이 철거에 들어가면서 북경시정부는 대왕징 지역의 개발에 큰 중시를 돌리고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모로 기초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2009년 10월의 어느 날, 조양구 정부는 대왕징 개발 의제를 둘러싸고 젊은 기업가들이 모인 좌담회를 소집하였다. 그날 회의 참석자들은 왕징은 아시아 최대 거주지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부동산신화를 계속하여 써내려 갈데 대해 의견이 모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왕징의 주택가격은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10여년전 왕징에 정착한 이민 1세대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천만부자의 행렬에 들어서 있었다.
“저는 여러분과 다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대왕징 개발은 소왕징과 차별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합니다.”
조용하던 회의장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철 회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만약 대왕징도 소왕징과 똑같이 주택개발을 위주로 한다면 단기적으로는 이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고려하면 우수 기업을 유치하여 향후 이곳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세금을 많이 창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발언은 회의참가자들의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대왕징 개발사업을 책임진 정부의 한 책임자는 그의 이름을 조용히 필기장에 적어 놓았다.
그후 박철 회장은 자주 그 책임자와 대왕징 개발에 대해 담론을 나누었다.
“왕징은 한국인과 조선족들이 많은 지역인만큼 한국의 대기업을 하나 유치해오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될수록 세계 500대 기업을 찾아보겠습니다.”
2011년, 조양구 정협위원으로 당선된 박철 회장은 회의 측에 대왕징 개발에 더욱 많은 세계 500대 기업을 유치할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어 조양구 정부는 북경시 산업 승격 및 발전의 수요에 맞추어 왕징의 구도를 재정립하고 글로벌경제발전에 걸맞는 개발을 본격화하기로 하였다. 2011년부터 대왕징 과학기술 비즈니스 창신구역을 목표로 하고 대왕징 지역에 대한 개발은 외자유치방향을 현대서비스업과 신흥업종으로 돌리고 프로젝트를 토지집약형의 국내 유명 기업본부와 다국적 회사 중국본부를 북경에 앉히는 데로 집중시켰다.
2005년부터 줄곧 투자유치를 해온 박철 회장은 외자유치에 신심이 있었다. 대왕징 개발 시작을 하는 2009년 말, 그는 투자계획서를 작성해가지고 무작정 한국 포스코 북경지사를 노크했다. 사업계획서라고 하지만 부지면적이 얼마이고 용적률이 얼마이고 얼마만큼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간단한 수치들이었다.
한국 포스코 북경지사장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으며 좋은 일이라며 바로 한국본사에 알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금방 퇴직하니 새로 임명되는 사장과 잘 추진해보라는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얼마 후 새로 임명된 한국 포스코 북경지사장이 북경에 도착하였다. 박철 회장은 새로 부임한 북경지사장을 모시고 왕징 지역을 둘러보면서 중국의 경제발전으로부터 왕징 코리아타운의 형성, 북경시의 대왕징 개발전략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설명을 드렸다.
북경지사장은 이튿날도 그와 약속을 잡고 차를 마시면서 투자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담화도중에 한국 포스코 본사 회장과 직접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여기에다 포스코 센터를 세울 것을 강력하게 제안합니다. 미래가 보이는 지역이며 포스코의 중국전략에 엄청 부합되는 지역입니다. 젊은 박철이를 만나보았는데 진짜 마음에 들고 일 잘하는 친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업을 맡게 되였을 때 박철 회장은 33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어깨의 짐이 무거워 남을 느꼈지만 문제점들을 척척 잘 해결해 나갔다. 그때 당시 외자기업이 중국의 부동산시장에 진출할 경우 투자금 등 여러 방면에서 정책적 제한을 받게 되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해 녹지그룹과 한국 포스코가 제휴하는 방식을 고안해냈으며 여러모로 되는 노력 끝에 끝내 한국 포스코, 상해 녹지그룹의 북경진출을 동시에 성공시켰다. 대왕징 3호부지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지상면적이 45만평방메터, 지하면적까지 합하면 도합 70만평방메터에 달한다. 2010년 세계 500대 그룹인 한국 포스코 센터가 5억딸라, 상해녹지그룹이 40억 원 투자한 빌딩입지가 최종 확정되었다.
초창기 10년간 북경시에 200억원 외자 유치박철 회장은 업계에서 외자유치의 ‘선봉’으로 이름 높다. 조양구 정협상무위원, 북경시 정협위원을 역임한 그는 북경시 경제문화건설에 큰 기여를 해온 주인공이다. 2005년부터 10여년간 북경시를 위해 무려 200억이 넘는 기업투자를 유치해왔다.
“중국국제신탁투자회사에서 근무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으며 글로벌 경영감각을 키우는 토대가 되였습니다.”
고향이 길림시 영길현인 박철 회장은 2001년 중국인민대학 재정금융학원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이름 높은 중국국제신탁투자회사에 취직했다. 이 회사는 국무원에서 직접 관할하는 국영기업으로서 우리 나라 개혁개방이후 가장 일찍 설립된 회사이며 외자를 유치하고 자금을 운영하고 선진기술을 인입해 들이고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경영방식과 관리방식을 갖춘 회사이다.
박철 회장은 대기업에서 시작한 첫 사회생활의 경력이 훗날 창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신입사원 기간 그는 회사가 주도하는 국내 고속도로 건설, 도시철도 건설 등 대형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여러모로 경력을 쌓았다. 한편 한국과 일본 등 나라의 기업들과 빈번하게 접촉했으며 일본의 외자를 유치하여 요녕성 안산시 경전철 철도건설 프로젝트에서 요직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때 그는 평일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이면 한국투자자분들의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한국손님이 북경에 공장을 투자 건설할 의향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였다. 그 손님이 바로 진공 펌프 영역에서 세계 4위를 차지하는 한국우성진공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그 사장님의 말을 귓등으로 흘러 보내지 않고 마땅한 파트너를 찾아 주기 위해 기업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당시 북경의기공장은 구조조정을 앞두고 기술개발과 경제 효익, 노동자 재취업 등 여러 방면에서 난제에 봉착했으며 여러모로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는 쌍방의 합작을 달성 시키기 위해 제기되는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씩 풀어나갔고 《중외합자경영법》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국측에 제공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2002년 10월 중한 합자회사인 북경북의우성진공유한회사가 설립되었다.
“북경에서 첫 한국합자기업을 성사시킨 후 창업에 신심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되여 박철 회장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창업을 시작하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서 가슴이 벅차 오른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서 배운 금융지식을 바탕으로 2005년 북경세박투자고문유한회사 설립에 이른다.
그의 회사는 북경시정부가 지정한 외자유치 단위로 되여 수십 명 지어는 수백명이 참가한 대형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해마다 북경시정부의 유관인원을 조직하여 한국, 일본에 가서 투자유치설명회를 가지고 한국, 일본 대기업과 섭외를 하였다. 박철 회장은 한국삼성그룹과 한국 포항그룹의 중국본부 설립 프로젝트를 북경시 조양구에 성공적으로 유치하였으며 2011년 한국삼성생명보험과 삼성물산은 연합으로 7억딸라를 투자하여 북경 조양구 CBD 핵심구에 삼성빌딩을 지었다. 그외 한국의 우성 진공, 삼진정공, 광진상공 등 제조업체들과 한국증권거래소, 한국 신한은행 등 현대금융기업들을 성공적으로 북경에 유치해왔다. 투자유치, 합자협력 등 방면의 뛰어난 성과로 인해 박철 회장은 지난 2005년부터 2015년 사이에 외자유치특별고문, 우수청년인재, 기술이전특별공로상, 창업청년수도공헌금상, 외자유치특수기여상 등 많은 영예를 받아 안았으며 북경시정부로부터 ‘외자유치 특별공헌상’을 수여 받았다.
‘봄의 도시’ 곤명에서의 새로운 도전삼면이 아름다운 경관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운남성 곤명시는 사시장철 화초가 만발하고 초목이 울창하고 온화한 기후로 하여 ‘봄의 도시’라는 미명을 갖고 있다. 유서 깊은 사원과 특색 짙은 건축들 사이로 난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분위기가 근사한 책방과 까페가 발목을 잡고 베란다마다 계절을 잊은 화분들이 꽃을 피운다. 우리 나라에서 최적의 주거지로 자부하기에 손색없는 곤명, 이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꿈이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곤명은 기회의 도시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남아시아, 동남아를 연결하는 교두보에 위치해 있으며 신속한 경제 및 사회 발전에 힘입어 지역성 국제화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제14차5개년계획기간 국가에서는 5만억원을 운남성의 기초시설건설에 투입하게 되며 곤명은 향후 서남지역의 가장 큰 냉동식품 저장, 운송, 수입식품 체험, 가공 등을 통합하는 콜드체인 종합물류기지로 될 전망이다.
“처음 곤명에 가서 시장조사를 하면서 20년전의 왕징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상업기회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금과 인구가 모이는 기회의 땅 곤명에서 박철 회장은 부동산업계로의 화려한 전환을 실현했으며 이곳에서 새로운 꿈을 펼쳐가고 있다.
곤명시 정공신구는 곤명과 운남성에서 가장 유망한 투자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경시로 말하면 통주와 맞먹는 곤명시 정공신구에 곤명시위와 시정부가 새로 이전해오면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박철 회장이 추진하는 곤명시 부동산개발프로젝트가 바로 정공신구에 위치해 있으며 고속철도역과 불과 3킬로메터 상거해 있고 두 갈래의 지하철이 개통되어 있다. 총투자액이 70억원, 지상건축면적이 72만평방메터에 달하며 주택, 상업시설, 오피스텔 복합형부동산개발프로젝트로 향후 건물높이가 260메터인 오피스텔이 일떠서게 되면 이곳은 곤명시 도시 랜드마크 타워로 부상하게 된다. 전부 공사가 이미 시공에 돌입하고 주택은 작년 6월 분양에 들어갔다. 주거와 비즈니스공간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이 부동산프로젝트는 출범된 후 곤명시 부동산업계에 신선한 돌풍을 몰아왔으며 소비자들의 큰 환영을 받고 있다.한편 곤명시 경제사회건설에 대한 기여로 작년 년초에 곤명시정협위원으로 새로 당선된 박철 회장은 정협위원으로서의 사회적 직책을 짊어지고 세계 500대 기업의 곤명 입주를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으며 곤명의 지역성국제화건설을 위해서도 많은 효과적인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금년 2월에 개최된 곤명시정협회의에서 박철 회장은 곤명시 지역성 국제화도시건설에 관한 의안을 제기하였다. 그는 곤명시의 경우 글로벌화 건설, 글로벌 경영환경 구축, 산업추진정책 출범을 위해 해마다 한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외자유치설명회를 개최할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이를 통해 곤명의 도시 이미지를 대외에 널리 홍보하고 곤명시가 지역성 국제중심도시건설에서 더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곤명에서의 부동산투자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처음에는 근 2년동안 교섭한 한국회사와의 합작투자가 막바지단계에서 무산되어 큰 시련에 봉착했지만 박철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사업을 추진하여 최종 상해의 5대 상장회사인 붕흠그룹과 성공적으로 제휴관계를 맺음으로써 부동산개발에로의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책상우에는 두툼한 자료집이 있다. 그가 손글씨로 작성한 국내외 회사의 주식가격, 매출액 점검, 업무범위 등 경영실태를 조사한 그래픽이다. 매일 뉴스를 시청하고 국가경제 정책을 연구하고 시장과 회사들에 대한 조사를 수집 정리하는 것은 그의 일상사로 되어왔으며 이는 그가 업계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비결의 하나로 된다.
“만약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본인은 일개 창업청년으로부터 언론 매체들이 호칭하는 외자유치 ‘선봉’으로 불려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박철 회장은 창업 10여년간 외자유치라는 힘든 일을 해오면서 언젠가 자신이 직접 자본투자에 뛰어들 꿈을 키웠다고 한다. 한편 꾸준한 실천 끝에 2015년부터 제조업, 영상문화산업과 부동산개발로 업무를 넓혀가고 그의 회사는 다원화에로 발전했다.
“저 북쪽으로 알리바바 북경본부건물이 또 하나 일떠서고 있습니다. 저쪽으로 보이는 부지를 현재 우리 회사가 개발하려고 조양구 정부와 전면적인 협상 중입니다.”
북경세박투자그룹 사무실의 북향 창문 가에 서면 북5환로에서 분주히 오가는 차량들이 눈에 띄이고 백양나무숲 사이로 건설현장의 중장비들이 우중충 보인다.
북경의 대왕징 개발은 현재진행형이였으며 박철 회장의 사업도 북경시와 곤명시를 아우르며 더 큰 목표를 위해 성큼 매진하고 있었다.
《중국민족》조선문판, 글/서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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