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하늘을 날아예던 조선족쌍둥이 형제의 어제와 오늘
쌍둥이 비행사 최광인씨
전설1: 서성중학교 상공에 나타난 전투기
1984년 4월9일 오전 9시쯤의 일이였다. 건교일(4월 10일)을 하루 앞둔 화룡현 서성중학교 상공에 문뜩 공군전투기 한대가 나타났다. 전투기는 서성중학교 상공에 이르러 큰 원을 그리면서 서너고패 돌다가 10여분동안 멋들어진 각종 공중묘기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였다. 미구하여 비행기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더니 아쉬운 작별이라도 하듯 서서히 멀어져 갔다.
당시 서성중학교 운동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 희귀한 비행묘기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고 무시로 터져나오는 찬탄과 박수갈채를 멈추지 못했다. 그때 서성중학교 상공을 배회했던 그 전투기가 바로 서성중학교를 다니다가 공군비행사로 입대한 쌍둥이 비행사중의 한명인 최광인이 몰고 온 비행기였다.
쌍둥이비행사가 서성중학교 건교일에 즈음해 그리운 모교를 잊지 않고 비행기를 몰고 찾아 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는 그후 서성중학교력사에 기록될만한 자랑스런 화제로 널리 소문났다.
훈련장에 나선 최광인(좌) 최광윤(우)쌍둥이 비행사
전설 2: 천부적으로 타고난 비행사
1976년 5월, 공군부대의 비행사모집시험이 있었는데 당시 화룡현 서성공사 서성중학교 고중1학년에 다니던 최광윤, 최광인 쌍둥이 형제가 4차례의 엄밀한 신체검사와 엄격한 정치심사를 통과하고 합격되였다.
연변에서 20명을 모집한 그번 비행사모집합격자 명단에는 조선족이 7명 들어 있었다. 모집된 20명 신병은 그해 11월부터 선후로 백성과 장춘에 있는 항공학교에 가서 항공리론학습을 시작으로 그토록 힘들다는 비행사훈련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연변의 조선족집거지역에서 자란 쌍둥이형제에게 가장 힘든 것은 한어에 익숙하지 못한 것였다. 부끄러움도 마다하고 신문을 찾아 읽으면서 한어를 배웠고 배짱이 두둑한 성격탓에 한어를 빠른 시일내에 익힐수 있었다.
리론시험은 60점만 맞으면 되기에 악을 쓰고 공부해서 그 관을 넘겼다. 군사훈련의 체능실기는 워낙 신체조건이 좋았기에 늘 우수했다. 공군비행사 훈련은 어려운 훈련과정에서 조건에 부합되지 않으면 가차없이 도태시켜버리는 잔혹한 훈련이였다. 함께 모집되였던 7명의 조선족들중 4명이나 이미 도태되였다.
그 어려운 비행사로 되는 훈련과정에서 대담하고 배짱있고 반응이 민첩했던 최광인 최광윤 쌍둥이 형제를 만나본 당시 공군부사령원이였던 리영태 장군은 이들의 어깨를 힘있게 다독여주면서 “너희들은 꼭 성공할 것이다”는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것이 또한 쌍둥이 비행사 형제가 그 후의 힘든 공군훈련과정을 이겨내고 어엿한 비행사로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되였다.
가족 편지를 읽고있는 최광인(뒤) 최광윤(앞) 쌍둥이 비행사
장춘항공학교를 나온 후 쌍둥이 형제는 호북성에 가서 비행실기를 배웠다. 그때 전국적으로 146명의 예비 비행사들이 실기 배우러 왔는데 총 50여개 과목시험을 보아야 했고 매 과목시험을 볼 때마다 10여명씩 도태시키는 잔혹한 훈련이였다. 실기훈련에서 반년이 지나니 겨우 3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담이 작고 신체조건이 차하고 반응능력이 차한 학원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1978년 윁남 자위반격전 참전준비로 1년반동안의 학습과정을 10개월로 압축해 완수하는 10명 명액의 속성반도 최광인은 수석으로 졸업했다. 전 공군에서 10명을 뽑는 정예비행원에도 들었다. 1980년 최광인은 감숙성에 있는 공군부대 고급항공학교를 졸업할 때3등공을 따냄과 동시에 “우수비행학원”으로 보관서류에 기록되면서 졸업했고 “천부적으로 타고난 비행사”(天生的飞行员) 라는 미명을 퇴직할 때까지 들었다.
전설3 : 쌍둥이 비행사형제 조선족의 영예 떨쳐
알고보면 최광인씨 가족은 영광스런 군인가족이였다. 그의 아버지 최호준은 1944년에 참군하여 1954년까지 군인으로 있으면서 국내해방전쟁은 물론 항미원조전쟁에까지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잔페군인으로 퇴역했다. 최광인, 최광윤 쌍둥이 형제가 군인으로 되여 갖은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참다운 군인의 직책과 영광스런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그런 강인한 아버지의 군인정신 영향이 매우 컸다. 그러했기에 최광인씨는 학교를 졸업한후 공군비행사학원에 교원으로 남기려고 하는것을 기어이 전투기를 몰고 전쟁마당에 나서겠다고 탄원해 나서기까지 했다. 전투기를 배웠으니 전투기를 몰고 전쟁마당에 나서야 떳떳한 군인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후 윁남자위반격전이 끝나면서 그의 전쟁마당에 나서려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고생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가족의 고상한 정신을 엿볼수 있었다.
최광인(우) 최광윤(좌)쌍둥이 비행사와 그들의 부친 최호준(중)
항공학원 졸업후 최광인은 광주공군에서 공군 야간비행단 창단 및 비행사양성에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 전 공군의 첫 야간비행단이 1989년도에 세워졌는데 최광인은 비행능력을 검증해보려는 사장을 비행기에 태운채 낮은 다리기둥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갈만큼 대담했고 정교한 비행기술을 선보여 크게 주목받았다. 최광인은 대담하고 침착한 심리자질과 탄탄한 비행실력을 모두 겸비한 합격된 공군간부로 인정받았으며 금후 광주공군 핵심기술지도일군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공군전투기 비행원 시절의 최광인
특히 최광인은 29살 젊은 나이에 벌써 퇀참모장으로까지 승급했다. 주위에서 젊은 참모장을 깔보는듯한 눈치들도 있었지만 하늘에 올라가서는 모두들 두손두발 다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해평면 비행고도가 낮에는 최저 100메터이고 밤에는 최저 200메터인데 최광인은 전투기를 몰고 최저고도 5메터에까지 근접해 비행하니 그 엄청난 대담성과 준확하고 능란한 비행기술에는 누구나 찬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83년에 공군항공학교의 교관을 맡아서부터 2005년 전업하기까지 20여년간 최광인은 우리 나라 공군비행사업을 위해 수많은 우수한 비행사들을 양성해냈다. 그가 양성해낸 비행사들중 현재 이미 소장급 이상의 군사직함을 가진 군인이 16명, 중장급이상 군인이 2명이나 배축되였다. 돌출한 사업성과로 최광인은 공군비행전문가, 우수비행교관, 우수전투원, 전사 기술검사주임, 전군 군사기술주임 등 수많은 칭호들을 수여 받았으며 금질상 2차와 2등공 4차, 3등공 다수 등의 많은 영예들을 수여받았다.
군사직급도 중대장에서부터 시작해 부대대장, 대대장, 퇀참모장, 사 기술검사주임, 군 기술검사주임, 사 참모장으로까지 승급했다. 최광인은 다년간 전 공군에서 유명한 비행사와 우수한 교관으로 크게 각광받았으며 조선족군인의 위상을 널리 떨쳤다.
쌍둥이비행사 형인 최광윤씨도 란주군구공군 운수퇀의 최고직급인 운수퇀 퇀장으로까지 승급하면서 57세까지 운수기를 운전한 전설적인 조선족비행사이다.
최광인씨는 1987년도에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도 비행사로 키우고 싶어서 이름까지 날아옐 상(翔)자를 붙여 최상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가석하게도 아들애가 근시안때문에 비행사로 되지 못하고 경찰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 광서 류주시에서 공안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최광인씨는 아들에게서 이루지 못한 꿈을 손자한테서 이루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자의 이름도 승우(承宇)라고 지었고 2살때부터 비행사로 키우기 위한 조기수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전설 4 : 고향마을에서 과수농사 짓는 비행사
흘러가는 세월속에 기억들이 하나둘 색바래져갈 무렵 쌍둥이 비행사중의 한사람인 최광인씨가 고향 서성에 돌아 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8월20일 오전, 기자는 화룡시 서성진의 진달래촌 서쪽 산언덕 과수원에서 최광인씨를 만났다. 60세가 넘었지만 젊은이처럼 다부지고 튼튼해보였다.
광서 계림에서 살다가 지난해 12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사과배과수원을 재미삼아 다루고 있었다. 안해인 박금화씨도 남편과 함께 전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농촌생활을 하나하나 적응해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수수한 작업복차림에 해볕에 그을린 얼굴, 겉으로 볼바엔 두분 모두 영낙없는 농사군모습이였다. 전투기를 몰고 하늘을 씽씽 날아예던 전문 비행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최광인씨는 농학을 배운 동생이 옆에서 과수원일을 많이 도와준다고 했다. 아무리 과수원일이 쉽다고 해도 여태껏 농사일을 못해본 사람이 과수농사를 지으려면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안해와 함께 농촌전원생활을 즐기고있는 최광인씨
최광인씨가 다루는 과수원은 연변의 사과배 재배에 큰 기여를 했던 유명한 사과배전문가 최일선이 50년대에 일군 과수원으로서 사과배나무는 거개가 다 60년이상 되는 고목들이였다. 고목에서 달리는 사과배는 맛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로목이다보니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인 재배법으로 과일이 계속 열릴수 있도록 소생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최광인씨는 소개했다. 사과배밭이 여러해째 관리를 하지 않아 처음에는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무성했는데 지금은 가는곳마다 알뜰히 정돈되여 있었다. 그렇게 정리하기까지 로무비용도 적잖게 팔았다. 살초제를 쓰면 품을 적게 팔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사과배가 농약에 오염되기 때문에 돈과 품이 들어도 친환경적인 농사를 견지한다고 했다. 사람이 먹을 과일이고 농산품이기 때문에 눈앞의 리익과 편안함 때문에 자연을 속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최광인씨가 사과배를 재배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그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나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성격때문이다. 일이라도 손에 있어야 움직일 수있고 일에서 삶의 재미와 생활의 보람을 느낄 수있기 때문이였다.
과수원을 맡아 하면서 최광인씨는 촌민들에게 부업으로 일 시키려해도 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냥 단순한 풀베기 작업이여도 모두들 힘들다고 꺼려하더라고 말한다. 하는수없이 룡정에 가서 일군을 찾고 고용해서 썼는데 반년새 8만원이나 인건비로 내주었다. 최광인씨는 그 돈이 아깝다고 말했다. 원래는 마을 촌민들이 가까이에서 부업으로 벌수있는 돈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려하지 않으니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 돈을 벌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광인씨는 과수원을 다루면서 촌민들과 서로 어울려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따뜻한 농촌인정을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전설5 : 고향떠나 44년…락엽귀근의 귀소본능
고향을 떠난지 44년이 되였으니 오래됐고 퇴직하게 되자 락엽귀근의 귀소본능이 생각되였다고 최광인씨는 말했다. 최광인씨에 따르면 그들은 도합 6남매인데 누님과 동생이 룡정과 연길 등 가까운 연변에서 살고 있는 외 나머지 4명은 모두 계림, 서안, 브라질 등 여러곳에 흩어져 살고있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사이에 함께 모일 시간과 장소도 마땅치 않고 더우기 후세대들이 남남처럼 서먹서먹하고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형제자매가 태여나고 자란 고향에 구심점을 두고 고향에서 모여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
태여나서 자랐던 서성촌의 옛집터에 큰 집을 하나 짓고 형제들은 물론 사촌 등 집안친척들까지도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하면서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최광인씨가 산좋고 물맑은 많은 지역도 마다한채 굳이 황페해져가는 고향마을의 옛 집터에 새집을 짓고 살고 싶은 것도 원인이 있었다. 그곳이 형제자매들이 태줄을 묻은 곳이라는데도 있겠지만 그곳에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동년이 묻어있고 추억이 묻어있고 성장과 희망의 꿈이 깃들어있는 의미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취재를 받고있는 쌍둥이 비행사 최광인씨(오른쪽)
최광인씨는 옛 집터가 풍수 또한 좋은 집터인 것 같다고 말했다. 70년대 그 집터에서 쌍둥이 비행사는 물론 남매중 5명이나 대학생이 되였고 병으로 아픈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도 친척이나 마을애들이 아프면 최씨네 집에 보내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와서 살다가면 신기하게도 병이 낫는 일이 많았다고 최광인씨는 회억했다.
좋은 소식은 더 있었다. 란주공군 운수퇀의 퇀장으로 있으면서 57세까지 운수기를 몰았던 쌍둥이 비행사 최광윤도 이제 곧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고 했다. 원래는 언녕 돌아와서 살고 싶어 했으나 오는 국경절에 아들의 잔치가 있기에 그 잔치를 마치고 곧 고향에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에 로무송출을 나갔던 매형도 곧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서 살고 싶다는 소식이 왔다…
이렇게 되면 서성중학교의 전설이였던 최광윤, 최광인 두 쌍둥이 형제가 모두 고향에 돌아 오는 것으로 된다. 손꼽아 세여보면 두 사람이 모두 고향에 돌아오기까지는 꼭 44년만의 일이다.
모두들 떠나가는 고향에 돌아와 태줄묻은 옛 집터에 새집을 짓고 일가친척, 친우들이 모여 정을 나누면서 살기를 꿈꾸는 쌍둥이비행사 형제의 마음은 무엇일가? 오랜 시간동안의 타관객지 생활에서 오는 락엽귀근, 귀소본능이라는 진부한 낱말로만은 그 해석이 명쾌하지 않을 것 같다. 고향에 돌아온 쌍둥이 형제가 고향마을에서 또 어떤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낼지 기대된다.
/길림신문 안상근 김성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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