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칸 영화제에 깜짝 등장한 조선족 최아자 "초심과 효심이 바탕입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8월5일 15시24분    조회:451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아자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칸 영화제는 세계적으로 가장 명망이 높은 영화제의 하나다. 레드카펫을 밟으며 등장하는 배우들의 드레스 또한 80년 력사를 가진 칸 영화제의 볼거리다. 지난해 5월 12일 열린 칸 영화제는 좀 특별했다고 말하고 싶다. 최아자 (본명 최옥)양이 조선족 인터넷스타 최초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섰기 때문이다. 스팽글 소재의 머메이드 드레스를 차려입은 최아자양은 그날 수많은 카메라의 앵글을 잡았다.

 

 

  인터넷스타(网红)란 단어가 요즘은 낯설지 않다. 말그대로 인터넷을 통해 유명세를 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최아자양도 YY플랫폼에서 개인 방송을 하며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개인 방송을 시작한 동기가 자신의 끼를 발산해 출로를 찾기 위함이라면 최아자양의 시작은 좀 달랐다.

  미에 대한 추구가 남달랐던 최아자양의 꿈은 “메이크업, 헤어, 네일을 받고 의상까지 골라 입을 수 있는” 종합 뷰티샵을 차리는 것이였다. 꿈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꿈을 위해 한국에서 전단지를 돌렸고 회사원으로 근무도 해봤고 작은 네일샵을 차려보기도 했다.

 

 

  그러던 2014년 최아자양은 행운스럽게 TV프로그램 ‘비상완미(非常完美)’의 감독을 알게 됐다. 감독이 아자양의 특출한 외모를 보고 프로그램 출연을 제안했고 프로그램 출연이 네일샵에 광고가 되지 않을가 싶어 아자양은 며칠을 고민하다 출연을 결심했다. 표준어를 어정쩡하게 구사하는 반응도 한박자 늦은 ‘어리버리’캐릭터의 조선족 소녀는 생각 밖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프로그램 출연에 이어 상업 홍보용 촬영, 연예 프로그램 섭외가 쏟아졌지만 최아자양은 그때까지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카메라와 마주하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한어도 잘 안됐구요. 저만의 가게를 하면 표정에 항상 신경쓸 필요도 없고 말실수를 저지를가봐 우려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태여나서부터 고생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아자양은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아버지는 장사로 바빴고 덕분에 가정 환경은 풍족한 편이였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최아자양은 가족들만은 돈걱정 없이 지내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뒤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어느날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ICU로 들어갔다. 하루에 몇만원씩 지불해야 하는 곳이였다. 깨여나지 못하는 아버지와 입원비를 지불하지 못해 일반 입원실로 자리를 옮기라는 병원측의 요구 사이에서 당시 스무살도 안된 아자양은 도처로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다. 울 겨를도 없었다. ICU가 밑빠진 항아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누구도 그에게 주머니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숨을 멈추던 날 유년시절 아자양의 행복한 기억도 거기서 멈추었다.

  고중을 졸업한 뒤로 아자양은 가정의 모든 비용을 혼자서 부담했다. 아글타글하는 손녀가 가슴 아팠던 할머니는 늘 한 푼이라도 아끼려 했고 몇킬로 떨어진 마트에 갈때도 교통비가 아까워 걸어서 다니곤 했단다. 그때마다 아자양은 할머니를 향해 웨쳤다.“할머니 할아버지가 넉넉하게 생활하시라고 제가 돈을 버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자양은 더 강해졌다. 가족이 아플 때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해주는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최아자양의 예명 "아자"도 그렇게 지어진 이름이다.

  항주는 인터넷스타들이 집중된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인 언니의 제안으로 아자양은 항주에서 온라인 의류업(淘宝店)을 시작했다. 의류업이 자신의 꿈과 이어질 수 있을가 싶어 ‘고될 것이란’ 언니의 일침에도 아자양은 주저없이 의류업을 선택했다. 당시 인터넷 인기 가게 대부분이 판매자가 직접 모델이 되여 패션쇼를 하듯이 영상을 찍어 올리고 있었다. 아자양도 거기에 합류했다. 하루에도 수십번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바꾸고 하루에도 십여곳을 돌며 촬영을 했다. 그때가 현재의 자신을 키워낸 소중한 재부라고 아자양은 말한다.

 

 

  개인 방송도 온라인몰 홍보를 위해 시작했다. 체계적인 강습을 받고 정식으로 방송에 오른 때가 2015년 8월 10일이였다. 아자양의 방송룸을 찾은 네티즌은 5명 뿐이였다. 방송룸을 찾은 네티즌들과의 소통법, 룸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법, 유머를 더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법... 이 모든 게 한어 표준어를 구사하기에도 바빴던 아자양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였다.

  한번은 휴대폰까지 끄고 사라진 적이 있다. 악플 때문이다. 남들 앞에 나서야 하는 보여지는 직종이다보니 아자양도 악플을 면할 수 없었다. 타격을 크게 받았던 아자양은 한동안 외출도 두려웠고 악플 때문에 악몽도 많이 꿨었다. 지금의 아자양은 굳은살이 생겨 어떤 악플에도 유연하게 대처한다. 아자양에 따르면 현재 자신의 류창한 한어 실력 또한 생방송으로 훈련된 것이라고 한다.

  강습 당시 강사는 아자양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방송을 오래한 방송인들은 모두 원활한 처세술을 갖고 있다며 그것이 생존의 길이라고 했다. 아자양은 그 말에 수긍하지 않는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가장(假装)’과 ‘연기’는 엄연히 다른 것이며 팔로워들이 자신의 방송룸을 찾아주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아자양은 말한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진실된 모습이 저는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방송룸을 찾는 네티즌들도 그런 저의 모습이 좋아서 찾아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꾸밈없는 캐릭터가 좋은 거죠”

  네티즌들의 지지속에서 2016년 아자양은 400만표로 YY생방송 플랫폼 년도 금상을 받았다. 그렇게 아자양은 인터넷 생방송 플랫폼의 최고 영예를 1년 4개월만에 받아 안았다. 2017년에는 YY플랫폼 최우수 종합연예인상, 2017년도 TOP1에 올랐다.

 

 

  아자양은 1년 365일에서 360일을 방송한다. 매일 새벽 12시를 넘겨서야 방송을 끝낸다. 네티즌과 새로운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공유자전거를 타고 숨은 곳을 찾아 다니고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을 때면 휴대폰으로 이야기거리를 찾는다. 생방송 기간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신다. 방송이 끝난 뒤에는 커피의 여독으로 빨라야 두 세시간 뒤에 잠이 든다.

  갑자기 불어난 재부와 하루 아침에 유명 무대에 올라 팬들의 환호성을 받기까지... 아자양은 자신의 자그마한 생방송 작업실에서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서게 됐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생방송을 하는 기타 방송인들을 단순히 인터넷스타라고 한다면 아자양은 만능 예능인에 가깝다.

  현재 아자양은 고향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에 작업실을 차리고 생방송 재능을 갖춘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미래에는 영화계에 진출하는 등 더 큰 가능성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하루 아침에 부가 크게 늘었다고 초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효심이 많은 사람이 정도 많잖아요, 가족을 생각하면 흐트러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견지와 초심, 효심이 바탕이 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른 자세로 자신부터 발전해야겠지요. 이를 바탕으로 저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고향 분들에게도 자체로 길을 열어갈 수 있게 도움을 주도록 저의 능력을 키워나갈 겁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img count='1' width='400' img] 200 5카이로 세계유도선수권대회 57킬로그람급에서 금메달을 딴 조선선수 계순희가 17일 오후 평양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있다.
  • 2005-09-21
  • 고훈(연변세기팀 감독): 오늘 경기는 아주 어렵게 이겼다. 대방팀이 방어를 견고하게 하고 수시로 역습을 노렸기에 우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선수들은 난공불락에서 아주 내심했고 끝내 한번의 기회를 잡았다. 지금 한번 승리를 거둔다는것은 정말로 쉬운일이 아니다. 경기에서 위협적인 진공을 많이 했으나 안타까운것은 소...
  • 2005-09-19
  • 주 건설국에서 사업하고 있는 오기준씨가 4만여원을 내 고향마을인 조양천진 다촌에 다리를 놓아주어 촌민들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조양천진 다촌은 16호세대에 50여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마을인데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촌민들이 외출하려면 마을앞 개울물을 지나야 했는데 다리가 없어 고생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
  • 2005-09-19
  • 한국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06년 독일월드컵을 지휘할 딕 아드보카트 감독(58)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스타일의 지도자다. 무엇보다도 경기를 지배하는것을 중시하고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털사커의 교과서를 철저히 적용하고있다. 네덜란드 토털사커의 창시자이자 1988년 유럽축구선수권에서 네덜란드를 사상 처음으로...
  • 2005-09-19
  •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중국에 와 투자한 외국기업이 날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사회, 중국인들과 어울리면서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기여하고 있고 서로 융합되고 있습니다. 베이징 석경산구역 영락서구에 자리잡고 있는 베이징신기 세라젬 의료계기유한회사가 바로 그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베이징 석...
  • 2005-09-18
  • [원제:효심 애심 량심이 낳은 휘황-전국우수인민경찰 임장하식 공안국장 김동화를 보다] 안도현공안국, 1995년부터 1999년사이 집체3등공과집체2등공을 세우면서 전국우수공안국과 길림성로동모범집단이라는 휘황을 안아온 전투집단이다. 허나 2001년부터 이 공안국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주적으로나 성적으로 뒤...
  • 2005-09-18
  •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에 룡정에서 태여났다. 한락연이 최초로 참가한 항일활동은 1919년 룡정에서 있은 《3 13》운동이다. 이 시기 그는 초기 고려공산당활동에 참가, 《3 13》 시위자들이 들었던 태극기 대부분이 한락연이 만든것이다.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락연은 이때로부터 반제국주의, 반봉건주...
  • 2005-09-18
  • 조선족 작가 장혜영의 저서 가 한국의 인문학계렬의 대학교재로 선정되였다. 흑룡강성 출신인 장혜영씨는 5-6년간 한국에서 장편소설 , 을 출판하였고 2002년에 인문도서 를 펼쳐내였다.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한 많은것들을 짬짬이 글에 담아온 소설가는 엄연한 로 변신되여 민족문화학과 사회문화학의 시각에서 한...
  • 2005-09-15
  • 조선족민속학자 천수산씨의 일가견- 1952년 9월3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설립시는 구)가설립되였다는 의미는 조선족이 진정 이 땅의 주인이 되여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양하고 조선족의 민족전통을 대대로 이어나가자는 것이 근본적인 취지이다. 그리하여 많은 유지인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단순히 길림성에만 국한되...
  • 2005-09-15
  • 조선족 최군 흑룡강성 '10대걸출한 쳥년'후선인에 당선 흑룡강성 고급인민법원 민사제2재판정 재판장 최군(41세)이 흑룡강성 '10대 걸출한 청년'후선인에 당선되였다. 최군은 사업에 참가한 18년래 부지런히 사업하고 고심히 연찬하며 청렴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전성 법원의 심판수준제고와 량호한 경제법제환경을 조성...
  • 2005-09-1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