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 첫 조선족 첩보극 작가 전용선씨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3일 09시59분    조회:450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전용선

      2012년 한편의 드라마가 여러 채널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전용선 작가가 극본을 쓴 “벼랑(悬崖)”이라는 드라마다. TV드라마권 관계자들 모두 드라마 “벼랑”은 2012년 첩보극의 대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드라마 “벼랑”은 알아도 이 드라마의 극본을 창작한 전용선(全勇先)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2015년 12월 26일 전용선 작가는 제1회 단군문학상 시상식 무대에 올라 “어머니께서 제가 한복 차림으로 시상무대에 오른 것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가요”라며 수상소감을 전했다. 그렇다. 중국의 주류문단과 드라마계에 진출해 모두를 놀래운 그는 다름 아닌 조선족이다.

  1966년 흑룡강성 이춘시에서 태여난 전용선 작가는 간부나 기술일군들이 많이 사는 층집에서 살았다. 단층집에 사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자주 당했지만 똘똘하게 생긴 소년을 어른들은 무척 귀여워했다. 한어를 류창하게 구사했던 그의 어머니는 교양있는 집 자식으로 보이게 하려고 동북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표준어를 아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전용선

  소년의 소학교 시절 꿈은 료리사였다. 그러다가 18세 때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가수가 되고 싶어 했다.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른 경력도 있고 강습반을 꾸리기도 했다.

 
  전용선 (좌1)

  1985년, 흑룡강성 가목사시 제2중학교를 졸업한 19살 소년은 커다란 배낭 하나를 메고 전국 각 지를 누볐다. 해남, 심수, 무한... 장강과 황하를 끼고 방랑하며 그곳에 살고있는 젊은 남녀들의 생활에 무한한 호기심과 동경을 품었다. 똑같은 하늘아래 살고있지만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그들을 알고 싶었다.

  그때의 전용선은 활달한 열혈 소년이였다. 언젠가는 어디선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시절이였다. 자유로운 “협객” 생활은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런 자유로운 생활과 문화의식이 후날 전용선 작가에게 풍부한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전용선 (좌2)

  스무살이 되던 해 생일은 호북성 서부의 신농가(神农架)에서 보냈다. “중국야인고찰연구회”의 일원으로 신농가의 정글속에서 꼬박 3개월을 지냈다. 거기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이제는 모두 련락이 끊겼지만 전 작가는 지금도 그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는 전신무장을 하고 야인 고찰을 하던 그 시절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때의 경력이 자신이 극본 “벼랑”에서 항일련군의 이야기를 쓸수 있은 원인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조선족 답게 축구애호가인 전용선 작가

  과거 석간신문 편집으로 있을 때부터 전용선 작가는 퇴근후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만의 소설 창작을 즐겼다. 낮에는 사무실에 나가 원고를 편집하고 시간이 나며 동료드로가 한담을 즐겼다. 전 작가는 책에서 읽었던 내용중 한 단락을 뽑아서는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엮어서는 동료들에게 들려주곤 했는데 동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야인 고찰도 해봤고 기자도 해봤고 시도 써봤고 소설도 써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 작가는 영화에 대해 남다른 흥미를 갖고 있다. 일찍 한국에서 지낼 때 그는 공영방송사에서 방송하는 세계적 경전 영화를 즐겨 보았다. 전 작가는 한국어에 대해 그닥 익숙하지 않지만 그것이 영화에 몰입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1993년 한국에서 돌아온 후 반년간 일보사에 취직했다가 갑자기 북경영화학원에 취학했다.

첩보극 “벼랑”으로 제2회sohu 영상tv축제에서 상을 받고 있는 전용선 작가

  “벼랑”은 그의 네번째 극본 작품이다. 동북에서 근 30년간 생활한 전 작가는 어렸을적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얘기와 많은 시간을 들여 수집한 력사자료들을 하나하나 엮어나갔다. 그는 이 작업을 즐겼고 관중들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고모가 할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고모가 자주 저를 데리고 할빈에 왔었지요. 작은 마을에서 태여나 자란 저에게는 할빈이란 도시가 꿈의 도시였습니다. 처음 할빈에 왔던 때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하늘에서 눈이 날리고 있었지요. 그 외에 거리에서 울리는 음악이나 서점에서 파는 책들이나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 모두 어린 저에게는 그저 무료할 뿐이였습니다. 그 뒤로 80년대에 제가 다시 할빈에 왔을 때 저는 크게 놀랐습니다. 과거의 중앙거리가 활기로 차넘쳤습니다. 나팔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청년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손에든 록음기에선 디스코 음악이 흘러 나왔습니다. 소녀들의 헤어스타일도 크게 바뀌였습니다. 금발의 외국인들도 볼 수 있었구요. 1978년 전에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거든요. 그 뒤로 저는 저의 기억속 할빈에 대해 무언가는 남겨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장편소설 <홀 와트(霍尔瓦特)거리>를 쓰게 되였고 이 소설이 첩보극 <벼랑>으로 촬영 제작되였습니다.”
  70년대 할빈의 모습

  언어가 쉽고 해학적이며 대범하고 평온함 가운데서 인생의 참뜻을 나타내고 인간의 모든 감정을 아우르며 진정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전용선 감독의 문풍은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었다.

  드라마 “벼랑”은 일찍 2012년에 동방위성TV, 천진위성TV, 흑룡강위성TV와 CCTV-1채널 황금시간대에 방영됐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이 “소리소문 없던” 소설가는 대뜸 수면우로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제18회 상해국제TV절 백옥란상 극본상을 수상했다.
 
첩보극 “벼랑”으로 제18회 상해tv절 백옥란상 극본상을 수상한 전용선

  전용선 작가의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러나 쟝르는 많다. 소설, 시가, 산문, 그리고 띄염띄염 써두었던 수필들까지... 그는 일년에 겨우 한 두 편의 소설과 2~3수의 시, 예닐곱편의 수필을 쓴다고 했다. 다산 작가가 아닌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 자신은 합격된 작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전용선은 조선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겸연쩍게 고백했다. 조선어는 떠듬거릴지라도 유머 한방을 날릴만큼의 재치는 있다. 그의 마음속 가장 완미한 조선족 녀성상은 어머니다.

  “정신적 상품이란 금전으로 가늠할 것이 아니라 독특한 가치관으로 판단해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전용선 작가, 그래서 그의 첫번째 영화가 유난히 기대된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 매편의 기사 모두 작품처럼] 《훌륭한 기자, 편집이 되려면 우선 신문사업이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사업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문화대혁명》이전부터 신문 기자, 편집 사업을 해온 김경석선생은 신문사업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기자, 편집을 하기 어렵다고 력설한다. 김경석선생은 1960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
  • 2005-11-09
  • 중앙 1호문건이 시달되자 농민들의 농사열정이 크게 제고되여 왕년에 버려져있던 묶은 경작지마저 다시 부치고있다. 그런데 경작지 면적에 비해 농촌의 로력이 딸리여 농망철이 되면 모두가 인력난으로 쩔쩔매고있다. 이를 감안한 화룡시 투도진 룡원촌 제2조의 황명선 촌민은 대담하게 7만 5000원의 돈을 들여 종합수확기 ...
  • 2005-11-08
  • [원제: 중국 진출 선진기술 앞세워라] 중국 진출 4년만에 발을 붙였다는 소문을 듣고 방문을 갔더니 대화 첫 머리부터 “중국은 시장이 큰만큼 기회도 많지만 그래도 진출시에는 반드시 선진기술을 앞세우고 들어 와야 한다”며 총화발언을 하는 김인규사장, 그는 건축도료 전문회사인 장춘(주)코미톤건자재유한회사의 주인...
  • 2005-11-08
  • [원제: 인생은 끝없이 일하면 사는것]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큰 사업이 아니더라도 창업이란 얼마나 신고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있다. 그리고 우리는 쉽사리 창업의 마음을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넉넉한 퇴직금에 자식들마저 잘 되고있어 아무런 뒤근심이 없다 할수 있는 퇴직자가 창업에 뛰여든다면 리해를 하지...
  • 2005-11-08
  • 상해 미술 전문학교 우등졸업 한낙연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이란 큰 목표 아래 국공합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한낙연에게 상부로부터 특별한 임무가 부여됐다. 그것은 국민당에 위장 입당해 대외적으로는 국민당으로 활동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중국공산당당적은 비...
  • 2005-11-07
  • 10월 21일 오전, 도문시 량수진 량수촌 21촌민소조의 조장 문영금씨로부터 시동생 최동원일가에 대한 소개를 듣고 그들을 찾았다. 《정말 그들처럼 착실하게 살면 외국에 돈벌러 가려고 아득바득 할 필요가 없습니다.》 량수촌권복순서기도 문영금조장의 말에 동을 달았다. 《부부가 손잡고 올해 논과 밭을 5헥트를 다루고있...
  • 2005-11-07
  • [원제:12살 연변소년 리소명 하버드대학생으로]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 꿈, 올 대학입시서 660점 6월에 있은 전국고등학교입학통일시험에서 12살밖에 안되는 연변조선족소년 리소명이 66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따낸 뒤 7월 그리고 8월에 있은 2차례의 하버드대학 중국류학생선정시험에서까지 계속 우수한 성적을 확보해...
  • 2005-11-07
  • [원제:비룡실업의 진로밑에 깔린 《문화감각》] 박성룡총경리의 남다른 속궁리를 적어본다 1997 년 3 월18 일에 중국광전부의 허가를 받고 길림성광전청에서 전문 국내외 위성설비판매설계설치허가증을 취득하여 설립된 길림성비룡실업유한회사(간칭)는 현재 중국내에서 유일하게 국내외위성방송설비 판매, 설계,설치, 권한...
  • 2005-11-05
  • [원제:력사를 알아야 자존심 지킨다] [img count='1' img] 20여년간 조선인혁명가들을 조사연구해온 최룡수교수를 만나 9월중순, 길림대학 조봉빈교수로부터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가 쓴 글을 받았는데 그것은 혁명과 예술을 결합시킨 한락연의 사적을 담은 글이였다. 그 글에서 우리 민족혁명가들의 사적을 발굴하기 위해 ...
  • 2005-11-05
  • [원제: 79세로인 웅변대회에 참가해] 발표시간: 2005-11-03 오후 3:33:10 주당위 선전부 문명판공실에서 주최한 전주 선진사적 웅변대회가 어제(2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있었습니다. 이는 올해 67세에 나는 훈춘시교육국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인 량조희가 전주 선진사적 웅변대회>에서 한 말입니다. 전...
  • 2005-11-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