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토벌의 진달래(1)
새 중국 빙속 일인자 조선족 라치환의 이야기
만물이 파릇파릇 소생하는 지난 3월말, 취재팀은 ‘새 중국 창건 70주년’기획보도 취재차로 라치환 선생의 저택을 방문했다. 라선생은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운동건장의 모습을 보여주듯 민첩한 몸놀림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포만된 정신과 또렷한 기억력으로 말문을 열었다. 1963년 라치환선생이 중국 나아가 아시아에서 첫 동계종목의 세계 우승을 따낸 뒤부터 2015년 북경동계올림픽이 성공하기까지 반세기 려정에서 라선생은 중국의 빙속운동 사업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다.
라치환선생이 1963년 2월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제57회 세계 빙상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 최초, 동양인으로 처음 우승을 따내고 시상대에서 환호하고있다. /자료사진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 재능 선보여
올해 79세(1941년생)인 라치환 선생은 흑룡강성 해륜시 조가툰에서 태여나 1956년 수화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속도스케트에서의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연변대학 체육학부를 졸업한 계몽스승인 장봉룡선생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8년, 교내는 물론 시급, 성급경기 그리고 전국대회에까지 출전하여 1등의 월계관을 죄다 도맡아버리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 이듬해 치치할시체육학원에서 즉시 그를 교내빙상속도팀의 기둥선수로 차출해갔는데 그것도 잠간, 얼마 안돼 흑룡강성 빙상속도팀에서 재차 그를 성팀의 기둥선수로 뽑아갔다.
성팀에서 직업선수로 뛰면서 성적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자 국가빙상위원회에서는 그를 세계대회에 출전시키기에 이른다. 1960년 2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54회 세계남자빙상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 4명중의 유일한 조선족으로 처음 출전했지만 500미터 15위, 1500미터 29위, 5000미터 22위라는 성적을 내며 유럽선수들이 독주하는 세계빙상운동의 높은 벽에 마주쳤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 하룡원수가 금의환향한 라선생(좌1)을 옆자리에 불러들이고 고무격려했다. /자료사진
하지만 그는 이후 더욱 훈련에 매진했고 62년 2월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00미터 5위와 1500미터 4위 등을 기록, 48명 참가 선수 가운데 개인종합 6위를 차지하면서 일약 세계적 선수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라선생은 제54회, 제55회, 제56회 세계남자속도빙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루적했고 우승의 그날을 위해 한번 또 한번 빙판우에 피땀을 쏟아야만 했다.
‘동아병부’가 세계기록 타파
1963년 2월, 일본 나가노에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인 제57회 세계빙상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 중일 량국은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로 국제사회에서도 새 중국에 대한 료해가 아주 부족해 라치환 선생을 비롯한 중국대표팀은 오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각종 어려움과 도전에 부딪쳤다.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홍콩을 경유해 일본으로 가야만 했는데 대표팀 단체 비행기 표를 사전에 다 구매했는데 비자를 내주지 않았어요. 홍콩에서 사흘 체류하다가 리륙 두세시간 전에 겨우 비자를 발급받아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게 되였지요.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오니 주숙조건이 아주 렬악했고 훈련시간도 이른 새벽 아니면 심야에 배정해놨으며 림시로 고용한 운전기사를 억류하고 지어 동아병부가 여기와 뭐하냐, 올 필요도 없는 녀석들이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지요. 가장 긴장했던 것은 일부 적대세력들이 중국선수들을 랍치하겠다고 공갈했어요. 다행이 재일본 백여명 화교들이 매일 우리가 주숙한 려관에서 경비를 서고 밥을 배달해주었기에 대회에 무사히 출전할 수 있었어요.”
취재팀의 인터뷰에 응하고있는 라선생. /한동현 기자
하지만 이런 불공정한 처우는 중국선수들의 애국심과 승벽심을 더 불러일으켰다. 남자 1500미터 속도스케트 경기 총성이 울리자 라치환은 빙상우의 은제비마냥 쏜살같이 출발했다. 당시 속도스케트 분야 ‘황제’로 불리우는 노르웨이 이와얼 선수를 처음부터 20여 미터 따돌리다가 결승코스에서 점차 따라잡히면서 막상막하의 긴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종점이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지만 라선생은 우리민족의 강인한 의지력과 능란한 기술로 스퍼트(冲刺)를 선제 감행하는 전술로 2분 9초 2의 우월한 성적으로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고 세계기록을 쇄신했다.
랭전이 본격화돼 줄곧 서방사회의 봉쇄를 받은 새 중국 그 년대에 운동원을 파견해 국제무대에 출전하고 국제고수들과 같이 경기한다는 자체가 하나의 승리였기에 라선생이 따낸 금메달은 가치가 더 높았다. 선생은 경기에 앞서 코스에 들어선 뒤 감독님이 다가오면서 “치환아, 가슴에 뭐가 새겨져 있는지 잘 봐라. 운동복 앞 가슴에는 중국 두 글자와 국장이 있었지요. 저는 감독님이 하고싶은 말씀과 그 뜻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는 고개만 끄덕이고 스타트 라인을 밟으며 이를 악물고 달리자,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만 다졌어요.” 라고 그 순간을 떠올렸다.
당과 조국, 인민을 위하여 한평생
라선생은 경기에서 량호한 심리소질과 격앙된 투지로 기록을 창조하고 금메달을 따냈다. 그 시대에 세계에서 새 중국을 잘 알지 못했기에 당시 많은 외국기자들과 운동원들이 중국이 어디 있는가고 물었다. 중국을 대표해 시상대에 서있던 라선생은 국기를 가리키며 “보세요! 중국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유력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강대해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 받을 수 있다” 라선생은 이렇게 감탄했다. 1500미터 세계우승을 따낸 뒤,시상대에서 주최측은 유독 그에게만 우승을 따낸 사진액자를 발급해 다른 선수들의 선물과 달랐다. 이에 대해 기타 대표팀들이 분분이 질의하면서 결국 이틀 뒤, 주최측은 후지사진기를 보충 발급했다. 일본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중국조선족 세계우승에 대한 존중과 탄복을 표했다.
라치환선생은 세계빙상무대에서의 우리 나라의 위치를 한껏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으로서의 민족 자긍심도 심어주었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며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인 하룡원수는 선수들과의 접견장에서 금의환향한 라치환 선생을 옆자리에 불러들이고 손을 꼭 잡아주며 “수고가 많았소. 앞으로도 조국을 위하여 더 큰 성과를 내길 바라오”라고 고무격려해 주었다.
대회 이후 국내외 크고작은 매체들도 앞다투어 라치환의 사적을 대거 보도하면서 선생은 세계정상에 우뚝 섰다. 그후 여러차례 국내, 국제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우리 나라 스케트발전을 위해 온갖 힘을 쏟아 붓었다.
정년퇴직후에도 라선생은 할빈중로년롤러스케이트구락부 명예감독을 맡으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오고있다. /본인제공
80년대 라선생이 미국에 가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할 당시, 한국 모 협찬사가 미국에 남을 것을 권장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라선생은 “인민을 위하고 당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것이야말로 평생 분투해야 할 사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당시 우리에게 훈련장도 변변치 못했고 선진적인 장비는 엄두도 못했지요.지어 필요한 영양보충도 할 수 없었어요. 모든 성과는 조국과 인민의 중탁을 항상 념두에 두고 완강히 박투해 이뤘습니다.”
1970년부터 라선생은 흑룡강성 성팀 감독으로 부임하다가 그후 국가팀 감독으로 여러번 부임했다. 1994년에는 감독 신분으로 처음으로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참가해 올림픽 출전꿈을 이뤘다. 라치환 선생의 운동생애는 짧은 순간에 지났지만 성팀과 국가팀을 맡으면서 우리나라 빙속운동을 위해 일련의 우수한 인재를 배양해냈다.
중국빙속운동의 선구자식 인물로 라치환 선생은 1984년 “건국 35주년 가장 걸출한 운동선수”, 1987년 “세계명인록” 수록, 1988년에는 “새 중국체육개척자”, 1989년에는 “건국 40주년 가장 걸출한 운동원”, 1994년에는 “건국 45주년 체육영걸”, 2009년에는 “건국 60주년 체육특수기여상” 등 상을 수상받고 호금도총서기의 접견을 받았다. 또 1998년 일본 나가노동계올림픽 성화봉송주자, 2008년 북경올림픽 성화봉송주자, 2009년 제24차 세계대학생동계운동대회 개막식때에도 성화봉송 첫 주자로 나섰다.
“스케트는 내 인생을 빛내준 은인이다”고 말하는 라치환 선생은 정년 퇴직후에도 현재 국내 모 빙속용품회사의 홍보대사 및 흑룡강성 총대리, 할빈중로년롤러스케트구락부 명예감독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오면서 오는 2022년 중국에서 열리는 제24차 북경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게 소원이라고 밝혔다.
흑룡강신문/특별취재팀 김호 기자, 영상편집 한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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