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련금술사 김태홍 화백
“내가 만약 이 길을 안 걷고 다른 일을 하게 됐다면 지금쯤 어떻게 시간을 보낼가 고민할 겁니다. 난 지금도 시간이 없어서 쩔쩔 매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겁니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변함없이 이 일에 열중한 것입니다.”
지난달 고향을 찾은 김태홍(75살) 화백의 자투리 시간을 리용해 어렵사리 만난 자리, ‘그림 그리는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김태홍(75살) 화백은 따뜻하고 다정한 어른이였다.
“작품의 동시대적 의미 살리는 게 무대미술디자인”
김태홍 화백의 주 전공은 무대미술설계이다. 북경에 자리를 잡은 형님을 따라 일찍 중앙미술학원부속중학교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내고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학과에서 무대미술 설계를 전공했다.
국가 1급 무대미술 설계사, 중앙발레무단 무대미술 설계사, 문화및관광부 ‘문화상’ 평의심사위원을 지내온 김태홍 화백은 누구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진부함을 멀리하면서 진정 의미 있는 예술활동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왔다.
《홍색랑자군》, 《초원의 아들딸》 등 대형극들의 무대미술설계를 맡은 바 있는 김태홍 화백은 예술을 말함에 있어서 진지한 척, 폼을 잡지 않는다. 공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김태홍 화백의 무대는 언제나 즐거운 발견이다. 그만큼 김 화백의 무대는 수다스럽지 않다.
뛰여난 미적 감각과 남다른 직관, 관객과의 성공적인 소통으로 공연계에서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온 김태홍 화백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작품의 최종적인 메시지는 배우가 전해야 한다. 무대는 설명하는 공간도, 장소를 재현하는 공간도 아니다. 무대미술을 디자인할 때 지금 왜 여기에서 이 작품을 해야 하는가를 반드시 질문하고 그 답을 찾아야 좋은 무대가 나온다. 작품의 동시대적 의미를 살리는 데 무대미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김화백의 철칙이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80년대초, 영국의 발레무용단이 우리 나라 무대에서 발레무극 <실비아>를 공연하게 되면서 무대미술 배경 제작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문화차이가 존재하는 데다 영국 발레무용단에서 무척이나 까다로운 요구를 내거는 바람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는 상황이였다.
그때 선뜻 나선 이가 바로 김태홍 화백이였다. 공연은 성공적이였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 채 시도한 김화백의 미술작품은 영국 공연단측의 극찬과 함께 관객들의 환호를 자아냈다.
김태홍 화백의 작품 <만리장성>과 <황토고원>은 인민대회당 내부에 전시되면서 무대미술설계로 데뷔한 이래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쟝르에서 무대를 빚어왔다. 고향에 대한 사랑 역시 남다르다. 자치주 창립 60돐 기념 축제에서 <연변찬가>의 배경미술 디자인을 맡았고 연변가무단의 무극 <춘향전>의 무대미술 제작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무용서시사 <장백의>과 <들끓는> 등 다수 작품들의 무대미술 설계에 발벗고 나섰다.
김태홍 화백이 국내외 무대미술디자이너로 참여한 작품의 제목을 대는 것만으로도 숨 가쁠 정도이다. 국내 공연계의 최고 무대미술디자이너 중 한사람으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예술가임에 틀림없으나 그의 무대미술작품은 촬영한 사진 자료 외에는 손에 남은 것이 없다. 막이 내리고 나면 그의 작품은 두갈래 길 사이에 선다. 파기와 보관, 운명을 기다려야 하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 집채만한 크기를 자랑한다. 작품과 운명을 함께 하는 이 예술작품은 철저히 관객에 의해 살고 죽는 문제가 판가름난다.
올해로 50년이 넘는다, 무대를 상상하고 만들어온 무대미술설계사 김태홍 화백이 무대미술을 설계하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려온지가.
김화백 무대미술의 힘은 행간 읽기에서 나온다. 특유의 탁월한 리해력으로 그는 작품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주제를 끌어낸다. 머리 속 서랍에 켜켜이 쌓인 상상의 조각들은 작품을 할 때마다 꺼내 쓴다.
“대본을 읽고 제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 공연을 ‘지금 여기서 왜 해야 하는가’입니다. 수백년 전 다른 나라의 이야기라도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시공간을 설정해 작품의 동시대적인 의미를 살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죠. 관객과 작품간 관계를 규정하는 작업을 마치면 무대의 뼈대를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죠.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지키련다”
신강을 배경으로 그린 김화백의 유화작품은 수십만원을 내걸로 매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주문이 빗발친다.
그림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세상이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 않는다. 무명화가에서 한 분야의 정상자리에 오르기까지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지켜온 김태홍 화백은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약삭빠른 세상에 백기 들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화가이다.
단 한번도 거래를 위해 그림을 그린적 없다는 김화백은 지금까지의 작품 대부분을 자기의 작업실에 고이 모셔뒀다.
“상업성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제 나름대로의 소신을 지키렵니다. 화단에서 이름값을 올릴 때는 작품성이 뒤로 밀리지 않을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돈을 받고 팔려고 붓을 드는 순간 초심을 잃게 될가 두렵기도 하고요. 평생 오로지 작품성만을 위해 그림을 그리렵니다.”
상업적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에 더 열중하련다는 김화백이다.
그가 닦은 길을 따라 국내에도 쟁쟁한 무대 미술가들이 배출됐다. 그간의 경험과 리론을 담아 책도 내 볼 생각이였던 김태홍 화백은 지난 2016년에는 수십년간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대량의 무대미술설계 작품들이 수록된 《김태홍무대미술설계작품집》을 출간했다. 작품집에는 발레극, 대형문예활동, 무극, 무용시, 무용야회 등 다양한 쟝르의 무대미술 설계도와 배경, 제작설계도와 일부 극중 사진들이 들어있다.
이 책은 그가 살아온 이야기와 예술세계를 고백하듯이 솔직하게 담아낸 작품집이다. 그의 그림을 닮은 듯, 기교 부리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엮어낸 작품해설 글 역시 화백의 그림과 어우러져 편안하고 정겹다.
화가로선 치렬한 예술혼을 보여준 김화백이지만 한 인간으로선 그지없이 소박하고 따스하다. 그가 세파에 무너지지 않도록 늘 힘이 되여주었던 가족들, 스케치 하느라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 화가는 그들 모두에게 속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저는 여러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합니다. 작품마다 다른 걸 찾아 다르게 표현해야 합니다. 무대미술 다지인의 역할은 작품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작품이 보이는 디자이너가 되려고 한다”
1999년부터 2009년까지 김태홍 화백은 많은 극단에서 무대미술 창작활동을 해왔다. 1999년 신강위글자치구문화청 예술사의 부름에 응해 김화백은 신강가극단의 가극 <어머니의> 무대미술 총설계와 제작을 맡았다. 신강의 아름다운 산천을 그대로 무대에 옮겨온 김 화백의 작품은 신강은 물론 전국적으로 큰 센세이숀을 불러왔다. 이후 무용극 <카스>로 문화및관광부 제11회 문화대상을 받아안았고 중국 문화및관광부 정품프로젝트에 입선됐다. 그리고 그때 신강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그린 신강소재 유화로 수차례 개인전시를 열기도 했다.
2001년 김화백이 무대설계를 맡은 신강가무단의 <천산환가>는 제2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 금상, 무대미술 금상을 거머쥐였고 이듬해 이 공연은 프랑스 빠리에서 큰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03년에는 가무극 <고향정>으로, 2004년에는 감숙성 가무원의 창작 가무극 <돈황운>, 2007년 감숙성 잡극단 <돈황신녀>, 2009년 투루판가무단의 대형 관광프로젝트 <툴판의> 등 수많은 작품들의 무대설계에서 도맡아 한 공연의 시각적인 환경 전체를 설계했다. 배우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조명, 음향 등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구성한 무대장면은 늘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서북지역과 신강을 오고가면서 작업을 했던 10년간, 김태홍 화백은 민간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그들의 삶과 신앙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오기를 반복했다.
“작품이 보이는 화가가 되려고 합니다. 화가가 보이는 작품이여서는 안됩니다. 삶 속에 깊숙이 녹아들어야만이 진정성 있는 작품이 비로소 완성되는 게 아닐가요?”
예술에 눈 밝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 그의 그림을 평가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의 그림을 만난 사람들은 참 아름다운 령혼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좋은 술이 되려면 오랜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좋은 술이 되려면 오랜 숙성 기간이 필요합니다. 성급히 굴지 말아야 해요. 자기 생각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곁눈질도 하지 말고 모든 시대를 살려고 더더욱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속도변화가 빠른 디지털 시대, 젊은 작가들에게 칠순을 훌쩍 넘긴 화백의 조언은 분명하고 명쾌했다.
외길 인생을 산다는 것이 힘겹고 어렵지만 한 순간도 예술로부터 눈길을 돌려본 기억이 없다.
김화백은 젊은 친구들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나 호기심에 무대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도 쉽게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미술적 감각 외에도 자기관리나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을 갖출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인공지능 세대에서 점차 일자리를 잃어가는 예술가들이 늘어나는 현 상황과 점차 상업화되여가는 미술분야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술이 뜨면 그 안에 있는 의미까지 같이 조명돼야 하는데 정작 그러질 못하네요. 어찌보면 지난 세월 우리의 문화 력동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이어 김화백은 “그림이 기록의 역할을 하다가 사진이 나오고 그림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죠. 하지만 사진이 기록의 령역을 가져가면서 그림은 진정으로 예술의 령역을 탐구할 수 있었어요. 재생 매체들이 늘어날 수록 재생이 아닌 현장표현이라는 본질적인 부분을 탐구하게 될 거고 그 안에서 무대 미술가들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고 보탠다.
아직 갖춰나가야 할 부분이 많은 분야에 몸을 담고 있지만 김화백은 그래도 희망을 말했다. 또 렬악한 환경을 불평하기보단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무대미술가로서의 보람은 배가 될 수 있다고 털어놓는다.
김화백의 작품은 그제도 오늘도 고여있고 싶지 않은 강물처럼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고독 속에서 창조된다.
연변일보 글·사진 신연희 윤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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