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바다(1952.6-1968.8)
김학송은 1952년 항미원조 전쟁이 한창인 시절 도문시 홍광향 곡수촌에서 태여났다. 총포소리가 들려왔고 가끔 마을에 폭탄이 떨어질때도 있었지만 그는 동년을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먹고 입을것이 부족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했고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경주김씨 대가족의 ‘사랑바다’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성장했다.
김학송이 다니던 마을의 조선족소학교에는 당시 500여명 학생이 있었다. 오전 4시간만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래 애들과 어울려 자연속에서 맘대로 즐겁게 뛰노는게 업이였다.
자치주 성립 초기, 인심은 순수했고 사람들은 희망과 랑만에 넘쳤으며 서로 돕고 배려하는 풍조가 온 사회에 넘쳐났다. 김학송은 자신의 시적인 감수성은 아마도 대자연과 그 시대가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1965년 8월 그는 도문시 1중에 입학했지만 2학년 첫 학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학업을 중단하게 되였다. 그와 자치주는 문화대지진의 소용돌이에 빠져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세월은 흘러(1968.9-1983.2)
1968년 9월, 김학송은 그 시대의 풍조에 따라 농촌에 내려가 농민이 되였다. 갓 17세, 키가 삽자루만한 청년이였던 그는 평생 농민이 될 각오를 하고 농촌살이를 시작했다. 1975년에 입당하고 그해 9월 추천을 받아 장춘야금지질학교 지질학과에 진학했다. 김학송은 “7년간의 농민경력이 김학송한테는 가장 보귀한 자산이 되였고 그때의 고생과 시련은 김학송의 문학을 떠밀어준 동력이 되였다”고 말했다.
1980년 9월, 김학송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이상하고 몽롱한 기분에 취해 시를 써보았다. 친구가 잘 썼다며 투고하라고 용기를 주었고 김학송은 신문에서 본 주소에 따라 첫 투고를 하게 되였다. 8전짜리 우표를 붙힌 편지를 들고 그는 우정국 밖에 설치된 파란색 우편함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살짝 넣었다 다시 빼내였다 한참을 망설였다고 한다. 두달 후 잡지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또 한번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던 순간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며 김학송은 그때 받은 편지를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우연하게 쓴 시 한수가 운명적으로 《연변문예》 11월호에 실리면서 김학송의 운명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듬해 1981년 《연변문예》잡지에 한번에 시 8수와 시인 략력이 실리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개혁개방과 함께 시작된 김학송의 문학인생, 자치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이룩했듯이 김학송의 문학에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1983년 3월에 우리 주에서는 연변대학에 작가반을 꾸렸다. 23명 청년문학영재의 1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4년간 받은 작가반 수업은 김학송을 더 큰 문학세계에로 이끌어주었다. 작가반 재학 시기 그는 첫 사람으로 “연변문학 문학상”(1984년)을 수상했고 졸업후 자원하여 고향인 도문에 돌아가 문화국 창작원으로 근무했다. 그때부터 시, 동시, 만담, 가사, 수필 등 여러 쟝르에 폭 넓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90년에 창작한 《아버지에게 드리는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자치주창립 경축의 노래(1995.6-현재)
김학송은 1995년 연변가무단 문학창작원으로 취직하였고 《연변가무단 단가》, 《연길의 노래》, 《9.3 경축의 노래》 등 2백여수의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중 《연길의 노래》는 자치주 성립 60주년 전국조선족가요공모에서 1등상을 탔다.
한창진행형이라고 말하는 그는 주렁진 창작성과로 인생의 황금가을을 맞이하였다. 자치주창립 65주년을 맞이한 올해 양장본으로 된 컬러판 대형시화집 《내 사랑 연변》과 시선집 《고향은 그리움을 먹고 산다》를 이미 출판에 교부하였고 그밖에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탄 시집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재출판을 눈앞에 두고있다.
김학송은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2008년), 해외동포문학상 (2010년) 등 상을 받았고 그가 쓴 수필 《태산에 오르며》는 중학교 조선어문교과서에 등재(2005년판)되였다.
7일, 김학송은 “자치주와 같은 해 태여나 함께 고생하고 함께 성장, 발전했다. 자치주는 나의 운명이고 인생이며 영원한 사랑이다. 연변조서족자치주를 잘 지키고 잘 건설하는데 있어 문화를 사랑하고 언어문자를 사랑하며 사명감을 가져야만 민족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수 있다.”라며 변함없는 사랑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연변일보 한옥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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