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음악을 한
박학림과 그의 학림악단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 박학림선생이 거느린 연변학림악단 설립 10주년 기념공연(7월 7일)이있은 지도 달포가 지났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그 자리를 뜰념 하지 않고 감개무량하게 소감을 터놓던 원 연변예술학원 신호 원장의 말씀이 도무지 잊혀지질 않는다.
“악대 조직이나 섭렵한 내용 또는 지휘를 포함하여 이번 음악회는 전업음악과 대중음악과의 매개역할즉 소통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하였습니다. 현대사회는 쉽게 말해 물질사회로서 모든 것이 물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때 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10년을 견지한다는 것은 여기에 뭔가 엄청난 흡인력과 그 핵심적인 뭐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도자의 호소력과 인격, 더 쉽게 말하면 지도자의 헌신정신 그리고 음악을 지극히 사랑하고 민족을 진정 사랑하는 그런 추구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족음악을 지키는 “3자원칙”
“실은 우리 악단이 설립된지 11년이 됩니다. 10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준비했는데 제가 좀 아프면서 실행못했습니다. 준비했던 행사이고 또 듣기도 좋게‘10주년’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이러면 안되는 명문규정은 없겠지요? ” 짐짓 뻔뻔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박학림 단장은 퍽 유머적인 분이였다.
감회를 자아내는 동요〈반디불〉을 열창는 학림악단
2006년 3월, 음악을 좋아하는 여러 단위나 단체의 9명 악사가 연주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연주하면서 봉사도 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한 작은 민간단체가 10년이 지난 지금 40명의 악사와 60여명의 합창대 그리고 가수들로 대진영을 이루게 되였다. 그 중심에 연변가무단의 작곡가 박학림선생이 있었던 것이다.
박학림선생은 이 악단의 단장으로서 작곡과 편곡, 지휘를 도맡아 하면서 학림악단의 독특한 음악정취를 구사하고 민족음악예술의 경지를 펼쳐내고 있었다.
“저는 작곡을 해도 작곡가, 가수, 청중 이 3가지를 꼭 결합합니다. 무대공연에서도 역시 이런 창작원칙으로 무대아래 관중들이며 무대우의 공연자들의 정서를 모두 고려하지요..” 늘 보고 듣고 하던 음악프로이지만 학림악단의 공연무대를 마주하노라면 새삼스런 흥미와 깊은 감명을 받게 되는 그 리유를알 것 같았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꽃봉오리예술단 예술지도 시절 미국공연길에서
〈중국의 아침 5시〉나 〈대중국〉과 같은 타민족 음악을 편곡할 때도 2선 해금이나 가야금 같은 민악으로 관중들의 정서를 사로 잡는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면서도 무대우의 합창대원이며 악사들 그리고 무대아래 관중들 모두가 너나 없이 부르며 성장해왔고 또 지금도 부르고 있는 동요 〈반디불〉,〈고개길〉,〈색동저고리〉,〈나는 북경의 천안문을 사랑해요〉등 노래를 선택하여 대합창이라는 거창한 부름과 현대음악풍격과 진솔한 률동을 가미하면서 공연장을 메운 남녀로소가 감회와 흥분과 격동속에 들끓게 한다.“대합창이 이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라고 하며 감격의 눈물을 훔치는 관중들도한둘이 아니였다고 박학림은 말한다.
끝을 모르는 배움의 길
1955년생으로 올해 63세인 박학림선생은 지금 조선평양음악대학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 배움의 끝은 어디일까?
탄부의 아들이였던 박학림선생은 19세나는 해에 세상 뜬지 오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광 로동자로 일하면서 늘 음악책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휴식시간이면 탄모등 불빛을 빌어 음악책을 읽 군 하였는데 악상이 떠오를 때면 탄갱벽에다 악보를 그렸다. 책을 스승으로 음악공부를 하던 그는 25살 되는 해에 노래〈채탄공의 노래〉를 첫 작품으로 발표하였다.
25세에 첫 작품〈채탄공의 노래〉를 발표하고 원고비 5원을 받은 후 기념사진을 남겼다.
1975년의 어느 날,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 동희철선생이 복동탄광으로 생활체험을 오셨다가 “박학림이라는 젊은이가 아주 전도가 있구만.”이라는 덕담을 남겼다. 그 덕담 한마디에 얼마나 큰 힘이 솟구쳤는지 몰랐다며 그 때를 상기하는 그의 얼굴은 희열로 차넘쳤다.
그후 연변탄광자제학교 음악교원으로, 연변신화인쇄공장 문예선전대 지휘, 연길시 신흥가두 문화소소장을 지낸 그는 장춘영화촬영소 음악창작반, 중국통신음악학원 리론작곡공부를 하였고 1991년에는 상해음악학원 작곡지휘학부 간부연수반에서 3년간 작곡지휘를 배웠다.
“학교에서 통일로 전등을 끄면 초불을 켜고 밤을 패가며 공부를 했지요. 공부를 마치고 나면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해 신흥가두 한영금로인에게 편지로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가두주임과 치보주임들을 동원하여 누룽지며 미수가루를 반마대 실히 되게 보내왔습니다. 편지까지 들어있는 누룽지주머니를 마주한 나는 감격에 못이겨 그만 울고말았습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그 누룽지를 먹으며 〈꿈의 재생〉이라는 교성곡을 졸업작품으로 완성하고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1993년 9월부터 연변가무단 창작실에서 사업하게 된 박학림은 갈고 닦은 기량을 펼쳐 대중들이 즐기는 음악작품을 용약 창작하였다.〈제비가 돌아왔네〉,〈사랑의 푸른 하늘〉,〈세월은 흘러도〉,〈나의 집은 연변이라오〉등 가요와 텔레비죤드라마《별찌》(상하집), 《사랑의 품》(8집), 《초연속의 수리개》(15집)의 음악 그리고 동요 〈하늘나라 가고파〉,〈진달래고향〉등 무용음악, 화극, 창극, 민속가무극, 협주곡 등 다양한 쟝르의 여러가지 풍격의 음악작품 1000여수를 창작하였다. 그는 드디여 국가 1급 작곡가로 평의되였다.
|
그가 창작한 무극《장백정》의 음악은 19997년중국문화부 작곡상을 수상하였고 창극 《심청전》(2013년),《춘향전》(2015년)의 음악은 중국소수민족문예콩클 작곡, 편곡상과 지휘상을 수상하였다. 창극 《춘향전》의 수상을 두고 연변가무단의 한 지도일군은 “초인간적 의지와 정신의 산물”이라고 말한적 있다.
퇴직을 눈앞에 둔 그였지만 오로지 민족예술의 정수를 전국인민들 앞에 전시하려는 일념으로 1개월 동안 하루 한두시간씩 밖에 눈을 붙이지 못하며 전반 음악창작을 완성하였고 단 10여명의민악대원으로 기적의 대악장을 만들어냈다. 일을 마치고 그는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박학림선생은 민족음악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탐구를 시종 멈추지 않았다. 21세기 초 조선평양음악대학 작곡지휘학부 공부를 시작한 그는 2014년에 예술학 석사증을 발급받았고 지금은박사공부를 계속하면서 〈중국주제로 된 조선식가극〉이라는 론문을 집필중이다.
“예술에 무슨 퇴직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못다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배움에대한 그의 견해였다.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은 날 스승 박정남을 모시고
‘고향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회’ 그리고
연변학림악단은 설립이래‘박학림작품음악회'만도 5차나 치렀고 두만강문화관광축제며 크고작은 공익공연에 앞장섰으며 시골마을 촌민들과 변경부대 장병들을 찾아 위문공연도 줄곧 해왔다.
연변학림악단의 공연을 관람한 문필가이며 평론가인 장정일선생은 학림악단의 성원들을 “생명으로 음악을 하고 생명으로 민족음악을 지키며 생명으로 정신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창작근거지에서의 하루
박학림은 “나의 사상이나 신앙, 추구 지어 과격한 성격까지도 혈육처럼 리해하고 받아들여주는 ‘학림악단’”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정신적으로 어디까지나 책임질 각오”가 되여있다고 밝힌다. 이미 80여만원의 거금을 들이며 악단의 운영을 굳혀온 그는 화룡시 서정진 장항촌 시골농가를‘박학림창작근거지’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곳은 단원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교류하는 장소로 활용된다. 그 곳에서 ‘고향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회’도 공론중이다. 우선 탄광로동자들을 앞자리에 모신다. 악단사무실에다석탄덩이를 정히 받쳐놓고 ‘초심’을 다지는 단장이다. 그는“남들 눈에는 다만 석탄덩이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황금덩이보다 더 귀중하다.”고 말한다.
“당시 탄광서기로 사업하던 김서기가 지금 91세로 생전입니다. 그 분이 계실 때 탄광로동자들을 모시고 〈채탄공의 노래〉를 비롯하여 고향노래를 힘껏 보르고 싶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지극히 효도하던 아들
어머니는 이미 3년전에 별세하였다.“어머니는 세상 뜨셨지만 지금도 늘 어머니와 마음으로 교류하며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미안함으로 이어졌다.“워낙 어머니 생전에 장가도 들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했었는데…”
하고 싶은 음악회도 많고 해야 할 숙제들도 너무 많다는 그에게 결혼이라는‘인생숙제’에 대해서도 여쭤보았다.
“사람이 너무 한곬으로 정력을 몰붓다 보면 자연 그렇게 되나 봐요. 어쩌면 나에게는 과외애호 가 한가지도 없어요. 앞으로 어떤 녀성을 만나든 음악에 대해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고 어느 정도 리해는 하면서 음악 감상이나 음악회 같은 것을 좋아하면 족하지요.”
역시 음악으로 아퀴를 짓는 박학림 단장이였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다음이미지가 보여집니다.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