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길림성조선족기업인탐방 1 ] 창업준비생들,꾸준하게 한 우물을 파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3월9일 09시12분    조회:920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송미

길림성조선족기업가협회,길림신문사 공동주최

계렬보도-길림성조선족기업인탐방 (1)

길림성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리송미회장 인터뷰

리송미 프로필: 1973년생.

신생활그룹(중국)유한회사 화동지역 총경리

길림성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회장

전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상무부회장

길림성조선족기업가협회 상무부회장

연변사범학교 졸업후 1992년부터 장춘시관성구조선족소학교에서 교원 종사

1994년부터 지금까지 신생활그룹에서 판매사원,경리,총경리 력임 

 

신생활그룹(중국)은 1994년에 설립, 22년간 화장품, 건강식품 및 생활용품을 연구, 개발, 판매하는 생활용품그룹이다. 그룹은 19개 브랜드제품의 300여종의 제품을 중국 각지와 국제시장에 판매하고있다. 현재 심양, 청도, 상해에 3대 생산제조기지를 갖고있으며 전국각지에 59개 부설기구 및 5000여개 점포가 있다.

이 5000여개 점포중 절반이상을 점하는 근 3000개 점포를 관리하고있는 이가 바로 올해 초 설립된 길림성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초대회장을 맡은 리송미씨다.

그녀는 자신이 창립한 신생활그룹 장춘분회사를 근거지로 상해, 절강, 강소, 흑룡강, 내몽골 시장을 개척, 그녀의 관리하에 있는 신생활체인점의 년간 판매액은 6억원 이상이다.

3월 4일, 기자는 연변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설립대회 참석차로 연길에 간 리송미씨를 만나 그녀의 창업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문: 어떻게 되여 교직을 그만두고 화장품판매업계에 몸을 담그게 되였습니까?

답: 1992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한 저는 20세 청춘의 꿈을 안고 장춘시관성구조선족소학교 교원으로 임직했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나중에 화장품업계에 발을 들여놓을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우수한 교원이 되리라 작심했습니다. 하지만 또 저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나 부모님들에게 잘 효도하겠다는 생각도 불붙듯했습니다.

저는 졸업해서 반년만에 전국교수경연에서 3등상을 받았고 이어서 우수교원, 공청단서기, 보도원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성적에 부모님들은 기뻐했지만 쪼들린 가정형편에 부모님들에게 더 큰 행복을 갖다주지 못하게 되여 저는 오히려 안스러웠습니다.

1994년의 어느날, 저의 학교에 조선족부부가 찾아와 화장품을 팔았습니다. 다른 교원들은 모여서 화장품을 사는데 저의 가정형편으로는 화장품을 살 엄두도 못 냈죠. 저는 자신의 가정형편을 남에게 알리기 싫어 화장품을 파는 두 부부에게 화장품 방문판매사원을 모집하지 않는가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계기였죠. 저의 말에 그들 부부는 흔쾌히 동의했고 그때로부터 저는 낮에는 학교에 나가고 밤과 휴식일 방학이면 방문판매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일에 차질이 없게 하려고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 낮에는 교직사업에 충실했습니다.

가정살림에 보태려고 시작한 방문판매도 시작은 첩첩산중이였습니다. 하지만 끈기로 한명 한명의 고객을 늘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고객이 많아지면서 저의 고민도 커져갔습니다. 교원직업도 버리기 아까웠고 가정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방문판매도 버리기 싫었지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저는 1997년에 정식으로 교원직을 그만두고 신생활그룹의 전직경리로 임직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투해왔습니다.

문: 분투과정에 녀성이여서 힘들었던 일은 어떤것이였습니까?

답: 힘들었던 부분은 녀성으로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갖고 싶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살고싶었지만 사업인으로 자주 집을 떠나야만 했던것입니다 .

제가 금방 신생활그룹에 몸을 담근 뒤 마침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쳐왔고 업계에도 다른 브랜드들이 많이 나오면서 회사에 충격이 컸습니다. 그중에서 저는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해보겠다는 책임감에 동북3성을 벗어나 제남, 항주 등 지역에 시장확장을 많이 다녔습니다.

창업, 분투과정에 제가 힘들어 고민하고 포기하고싶을 때 남편이 함께 고민해주고 많이 격려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해인 제가 밖으로 그냥 출장을 다니고 자신의 사업부진으로 제가 남편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주었습니다.

저는 그냥 앞날의 가정의 행복을 위한다고 생각했으나 남편은 제가 저의 개인욕심, 개인명예를 얻기 위해 일한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이런 남편의 몰리해가 제가 생소한 곳으로 출장나가서 시장을 확장하는 일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걸 꼭 해서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불화가 이어지고 경제위기에 빠지게 되자 생각의 차이가 더 커지면서 리혼얘기까지 나왔지만 저는 제가 부지런히 하면 남편이 언젠가는 리해해주겠지 생각하고 그냥 사업을 밀고나갔습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약 5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저의 사업이 안정되였고 날마다 바삐 돌아다니는 저를 보고 남편이 리해해주기 시작했고 가정의 불화도 가라앉게 되였습니다. 이젠 그동안 저한테 채찍질도 해주고 배려를 해준 남편에게 감사한 마음만 남았습니다.

문: 자신의 어떤 우점이 지금의 성공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까?

답: 포기하지 않고 한가지 일을 하는데 끝까지 하는것이 아마 나의 우점이라고 말할수 있겠죠.

신생활그룹에 입사해서부터 회사가 여러가지 여건에 의해 부진을 많이 겪었지만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함께 입사했던 많은 분들이 회사를 떠났지만 저는 자기 돈을 써가며 시장 확장에 나섰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일념을 갖고 일해왔습니다.

제남, 항주 등 곳의 시장을 확장할 때 그 지방에 아는 사람 한분도 없었습니다. 세집을 맡고 회사 제품을 쌓아두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화장품 설명을 해왔고 동네 시장 아줌마들과도 친해가며 피부관리도 해주면서 한분 한분의 고객을 알아갔습니다. 그 시절 그런 끈기로 열심히 종자를 뿌리고 개척을 했기에 그뒤의 성공이 이루어진것이 아니였겠는가고 생각합니다.

문: 자신의 분투과정에 비추어 현재 조선족 젊은 녀성 창업준비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싶습니까?

답: 녀성으로 창업하기는 참 힘듭니다. 특히 가정적인 부분에서 애로사항이 많죠. 하지만 창업을 해서 성공하려면 여러가지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창업을 하려면 먼저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저는 제가 정한 목표를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실행해왔습니다. 초창기 창업단계에서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높여야 합니다. 초기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장기목표를 달성하지 못합니다.

다음은 잘사는 부모를 만났더라면 쉽게 창업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부자 2세대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력은 반드시 자기 자신이 쌓아가야 합니다. 부모의 지원으로 창업하면 시작은 높이 뗄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꼭 영향을 받습니다. 저도 어릴 때 이런 생각도 가져본적 있지만 20년 창업과정을 돌이켜보면 창업의 힘든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깊은 뿌리를 갖고 건실한 성공을 이어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끈기 있게 꾸준히 밀고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와 함께 입사했던 조선족들중 많은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고 힘들거나 하면 그냥 포기하고 한국으로 나갔습니다. 한창 우물을 파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우물을 파는거나 마찬가지죠.

창업은 자연의 섭리로 봐도 되겠습니다.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거죠. 창업의 씨앗을 뿌리는 봄과 땀 흘리며 그 씨앗을 키우는 여름, 작으나마 성과를 이루는 가을과 또 한번의 고통을 가져다주는 겨울••• 이런 과정을 반복해야 뿌리 깊고 크게 성장할수 있는 창업의 나무를 키워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기:교정의 목소리 오늘은 저희 방송국에서 실습을 하고 있는 중앙민족대학 임해숙학생과 얘기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안녕하세요? 임: 안녕하세요?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 4학년을 다니고 있는 임해숙입니다. 기: 줄곧 학교에서 공부만 하다가 사회에 진출해 실습을 하니 느낌이 어떠했는가? 임:처음에는 많이 두려웠어요,하...
  • 2006-03-30
  • [원제: 비판보다 사랑이 연변을 키운다] 연변 성보빌딩 총경리 김성순 출장다니다보면 가는데마다 연변사람들을 만날수 있어 반가웠다. 반가워서 이렇게 저렇게 한자리에 모이다 보면 《연변》이야기가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락후한 연변이 언제 연해지구처럼 되겠는가?》 《연변사람 게으르다》 《연변사람 사기군이 많...
  • 2006-03-29
  • 중국 교육부 중앙교육과학연구소 교육이론부의 리수산 주임(49)은 대륙의 새마을운동 전도사로 통한다. 중국동포(조선족)인 그는 중국이 올해 '중앙 1호문건'을 통해 강력한 추진 의지를 밝힌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중국 언론에서평가받고 있다. "중국 농업부 교육국장이던 93년 베이징에서 ...
  • 2006-03-29
  • 《와-이것이 과연 한복일가?》 기존 전통한복의 단아한 운치와 우아한 스타일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편의성, 개성미, 실용성을 두루 접목시킨 현대풍의 개량한복이 시중에 선뵈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화제를 만발하고있다. 새로운 성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이 패션작의 주인공은 류송옥씨...
  • 2006-03-28
  • 《누가 장애자는 자립못한다더냐!》 호트라인전화 접대원 맹인일군과 함께 사업에 골똘하고있는 박일씨(오른쪽) 3월 6일,《장춘시장애자창업협회》가 마침내 설립되였다. 협회는《장애자들을 위해 취업, 창업, 생활안내와 혼인 등 문제를 해결해주고 정부의 압력과 부담을 덜어주며 정부와 사회에 보답하기 위한것》을 취지...
  • 2006-03-21
  • 연길미주통상대사 박현우회장을 만나 일찍 2004년에 연길시정부로부터 미주통상대사로 위임받은 박현우(미국 캔터키한인재단 회장)회장은 그동안 십여차나 연변과 미국을 오가면서 기타 현, 시의 미주통상대사위임사업을 적극 주선하고 추진하여왔다. 박현우회장으로부터 다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미주통상대사사업계획을 ...
  • 2006-03-21
  • 전자전공 대졸생 리남씨의 두부인생 탱탱한 스케줄때문에 약정된 시간을 두번이나 미루는통에 지난 16일 저녁 6시경에야 어렵게 남산콩제품유한회사 리남(46세)경리와 자리를 함께 할수 있었다. 두부를 만드는 사람이 아무리 바쁘단들 이렇게까지 바쁠수가? 나의 심사를 알아차린듯 리남씨는 《참 미안합니다. 요즘 공장확건...
  • 2006-03-20
  • 81세 최근갑옹 15성상 땀바쳐 오로지 민족의 뿌리찾기에 전념 룡정에 10개의 유적비 세워 한겨울 같은 혹한이 뼈속에 스며들던 지난 3월 13일, 룡정시 동남교외의 합성리 《3.13》반일의사릉에서는 룡정시와 연변 각지에서 온 지명인사 150여명이 모여《3.13》반일운동 87주년기념추모행사를 펼치고있었다. 찬바람에 백발을...
  • 2006-03-17
  • [원제: 조선족농민의 삶의 질 향상 기대] 중국정협 상무위원 김일광교수와의 인터뷰 일전 기자는 중국정협 제10기 제4차회의에 참석한 중국정협 상무위원인 김일광(72세, 조선족)교수를 인터뷰했다. 북경화학공업대학의 김일광교수는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로서 중국정협 제8기, 9기, 10기 상무위원이다. 아래 김일광교수와의...
  • 2006-03-13
  • 기자(이하 기로 약칭):인사말 김병민 대표(이하 김으로 약칭): 연변대학 교장 김병민이다. 이번에 인민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서 이번 회의에 참석했는데, 지금까지 제기한 건의아 의안에 대해 많을텐데,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김: 의안은 제기한적 없고 정부건의안 같은 것을 제기했었다. 그...
  • 2006-03-1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