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흥개호반 교단의 한떨기 진달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1일 10시00분    조회:724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계순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김계순교사

  (흑룡강신문=하얼빈) 류대식 기자= 모진 설한풍을 억세게 이겨내며 봄마다 산야에 화사한 꽃을 만개하는 흥개호반의 진달래처럼 하나하나의 역경을 억척스레 헤쳐나가며 29년간 교단을 굳건히 지켜온 훌륭한 교원이 있다. 바로 흥개호반에 자리잡고있는 밀산시조선족소학교(교장 한흥림)의 김계순(48세)선생이다. "전문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형편에서 민영교원으로 첫 발자국을 내디딘 농촌에서 16년 교원생활은 너무나도 어려운 시련이였습니다…" 김씨는 끝내 억제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만큼 지나온 교원생활중 많고많은 인고의 서러움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것이다.

  1988년 밀산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마침 기회가 생겨서 고향인 흥개향 흥농촌조선족소학교에 민영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교원이 그의 꿈의 하나였던지라 잘해보고 싶었고 교원사업으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교원자질교육도 못받은 형편이라 물덤벙 술덤벙으로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제일 어려운 1학년을 맡아하면서 적응이 되지 않아 쩍하면 목이 쉬였고 몸살이 나 늘 약을 달고있어야 했다.심하면 퇴근후에 링거를 맞으면서도 휴식없이 출근을 견지했다.스스로 모색하며 열심히 하다나니 성과가 마타나기 시작하여1991년에 처음으로 학교 우수교원으로 평의되였다. "그래도 한 3년은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출근하고 서러울 땐 달래도 주는 부모님이 뒤심이 되여주셔서 괜찮았는데 결혼하고 임신을 하고나니 몸이 불편하였지만 해산하는 마지막날까지 출근을 견지했어요. 배속의 아이도 알고 기다려주었는지 기말시험까지 다 친 바로 이튿날에 해산을 하게 되였지요. 이어 방학이 지나고 새학기가 시작되자 산후 휴가도 없이 어김없이 제때에 출근하였어요."

  "그때는 통일시험치는 때인지라 수업을 마치고는 학습이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하학후에 가르치고 그래도 안되여 밤에 집에까지 불러다가 가르쳤지요. 그래서 향적으로는 저가 맡은 과목은 계속1등을 따냈고 밀산현적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따냈어요. 민영교원이라는 신분으로 다른 교원에 비해 낮에 밤을 이어 억척스레 사업을 하였지만 말로는 수고가 많다고 해도 서러울 때가 많았어요.꼬박 3년을 월급을 한푼 받지 못하고 사업을 한 사연도 있어요.

  생활이 여려운데다가 아이가 자주 앓아 일년에 한번씩 주는 봉급을 앞당겨서 병치료로 쓸때가 많았지요. 지금 돌이켜보노라니 그때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절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요." 정말 울음을 터뜨릴만한 사연들이 많았다.

  당시 김씨는 상황이 많이 어려웠기에 교단을 떠나려는 생각도 없은것은 아니였다. 흥개향은 가난하고 교통도 불편한 곳이여서 사범졸업생들은 촌소학교에 오려하지 않았고 혹시 왔다가도 인차 조동하여 다른 학교로 갔으며 민영교원들도 힘들고 전도가 없다고 나가군 하였는데 나간 동료들은 돈을 잘 번다고 나오라고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민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 아이가 너무 어린데다가 또 교원사업을 놓으려니까 아쉬움도 너무 많았다. 나가면 아이들은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자꾸 선생님이 바뀌면 아이들이 마음을 안정하고 공부를 할수 없기에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고생끝에 락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였는데 1995년에는 정식교원으로까지 되였다.

  정식교원이 된후에도 김씨는 변함없이 사업에 혼신을 몰부었다. 학교가 집에서 3,4리가량 떨어져 있었지만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학교에 데리고 다니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각 한번 결석 한번 없이 출근을 견지했다. 그는 사업도 열심히 하였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사 자질을 제고하기 위한 자학도 부지런히 했다. 선후로 오상사범과 연변대학 조문학부 함수도 졸업했다. 2002년에는 소학교 고급교사로 되였다.

  2003년부터는 학생이 없어 흥농학교가 페교되면서 밀산시 련주산진 영창소학교에 조동되여 사업하게 되였는데 헌적인 사업열정은 식지 않았다. 자기에게 차례진 임무를 열심히 하는 한편 학전반 아이들에게 한어병음을 가르칠 교원이 부족한것을 알고 선뜻 나서서 3년동안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가르침으로써 학교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2008년에 역시 학생래원의 고갈로 영창소학교가 페교되면서 밀산시소학교에 조동되여 사업하게 되였는데 역시 변함없이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4년간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는동안 유치원교원 경험이 없었지만 거기에 적응하기에 위해 자질제고에 힘을 기울이고 아이들에게 알맞게 활동을 조직하여 아이들이 유치원에 오고싶어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

  2012년부터 소학교의 담임을 또 다시 시작하였는데 정작 44살 나이에 자기보다 10여살씩 어린 교원들과 같이 해낸다는것이 정말 힘든 일이였다.하지만 두말없이 학교의 지시에 호응하였고 자기가 맡은 아이들이 여러면에서 최고로 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이전부터 위가 안좋았던 그는 계속 약을 달고있었는데 2015년을 잡아서부터는 위의 상태가 더욱 나빠져서 죽도 먹을수 없는 상황에서 한달내내 물고기국물만 끓여마시며 한편으로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출근을 견지해왔다. 올해 3월에는 부과병으로 심하게 하혈을 하게 되였지만 1학년을 담임한 상황에서 과임선생님들과 상과 시간을 바꾸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인차 돌아와 제시간에 수업하면서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소학교 교사들은 거의 '만능'선생들이였다. 김씨도 음악을 내놓고는 어느 과목이나 다 가르쳐봤었다. 그중 그는 학교의 교수방침에 발맞추어 조선어문교학에 대해 보다 신경을 쓰고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조선족학교 학생들은 거의 한어로 대화하고있다. 그래서 우리말이 점점 약해지고있는 추세다. 이런 국면을 돌려세우기 위해 그는 학교에 등교해서부터 하학할때까지 우리 말로 대화하도록 강조하였고 학교에 올 때 내가 본것 , 내가 들은것 등을 간단하게 말하도록 했으며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말로 부모님께 이야기해드리고 싸인을 받아오도록 했다.

  "또 1학년 때에는 아침독서 시간을 리용하여 교원이 '중국조선족소년보', '꽃동산'잡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알맞는 동화책을 골라 매일 한편씩 읽어줌으로써 조선어로 된 책읽기에 대한 흥취를 불러일으켰으며 2학년 때에는 랑독, 랑송에 중시를 돌려 열독시간에 배운 과문을 열심히 읽게 하고 배운 과문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과문을 선택하여 한달에 한번씩 학급에서 랑독, 랑송시합을 조직하였어요. 3학년때에는 주로 일기쓰기 경색, 이야기모임, 소년보읽기 경색을 조직하는것으로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모를 박았어요. 하여 근 3년동안에 제16회 동북아청소년 평화백일장대회, 만방컵 작문경색 , 계서시 랑독 ,랑송경색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어요."

  김씨의 헌신적인 사업 열정과 함께 이룩한 성과는 동료들과 사회의 공인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는 성급우수론문상,지구급우수지도교원 시급우수교원 등 영예를 근 30차례나 받았다.

  그렇다.바로 김계순씨와 같은 수많은 기층교육자들이 우리민족 후대의 육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업해 튼튼한 기반을 닦아놓았기에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민족은 소수민족으로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전통을 잊지 않고 계속 전승,발전시키면서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는 것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선족청년작곡가 박광춘 신미디음악회가 10월 28일 연변TV방송국 스튜디어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박광춘이 최근년간 창작한 새로운 가요와 음악작품들을 신미디음악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담아 표현하였다. “세상은 우리것이야”“청춘스타트”“오아시스” 등 17수의 음악으로 구성되였고 열정 사랑 찬미 등 세 부분...
  • 2005-10-31
  • 광복 60주년을 맞아 올해, 덕수궁미술관에서는 8월말부터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보통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제 강점기 중국 땅에서 화가이자, 고고학자, 나아가 혁명가로 활동하다 끝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 뼈를 묻어버린 한낙연(韓樂然)을 기념하는 ‘광복 60주년 기념 한낙연 특별전...
  • 2005-10-31
  • [원제:할빈시고려회관 안중근의거96주년기념좌담모임 소집] 2005년 10월 27일 10월26일 안중근의사 의거 96주년에 즈음해 할빈시고려회관은 안중근의사 기념좌담모임을 소집했습니다. 회의는 리민 전 흑룡강성정협위원회 부주석이 기증한 ,이란 글발의 휘호족자 두폭을 전달했습니다. 이날 모임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생애와 ...
  • 2005-10-28
  • 《퉁소마을》인 훈춘시 밀강향에서 태여나 자라 꾸준한 탁마로 중국 문화예술부상인 문화(文華)예술학원상 제2회민족악기연주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최민(25살)이다. 1993년, 훈춘시문화관에서 《퉁소마을》조성을 위해 밀강향에 퉁소 100대를 지원했다. 어려서부터 마을 로인...
  • 2005-10-28
  • 효자효녀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부모에게 효도하는 성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15세밖에 안되는 초중생이 학교로부터 '효자상'을 받았다. 그가 바로 상지시조선족중학교 초중 2학년 4반의 류춘길학생이다. 춘길학생은 학습성적도 우수하거니와 학우간에 우애단결하고 학교 각항 제도도 모범적으로 ...
  • 2005-10-27
  •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조선 국방공업을 이끌어온 시세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여난 연부위원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체코의 프라하공대를 류학한후 로동당, 정무원(현 내각), 국방위를 오가면서 조선 국방공업과 경제건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항일빨찌산 유자녀로 김일성 주석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
  • 2005-10-26
  • 1983년. 중국작가협회 길림성 분회 부주석, 상무위원회 위원이던 그는 베이징으로 전근한다. 이어 중국 작가협회에서 발간하는 '민족문학'주필이 된다. 그때만 해도 조선족은 북경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5년 만에 베이징 호적(시민)이 된다. '베이징 시민'은 특혜였다. 조선족으로는 처음 베이징 명예시민이 된 것이다. 등...
  • 2005-10-26
  • [원제:《천리를 말 한필로 달리다》호평속에 다카쿠라켄 장예모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제18차동경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오른 영화 《천리를 말 한필로 달리다》는 장예모감독과 다카쿠라켄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개막식에서 이 작품은 세계영화인들과 일본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편의 중국영화...
  • 2005-10-25
  • [원제: 중국조선족항일사 연구하는 만족당사학자-조문기] - 다련래 조선족항일사에 관한 저서, 론문 대량 발표 다년간 신빈현 당사지방사연구판공실 주임직을 담임했던 조문기(만족 57세)씨는중국조선족항일사연구에 조예가 깊어 중국조선족사회는 물론 한국에도 꽤 알려졌다. 조문기씨가 중국조선족항일사에 관심을 가지기...
  • 2005-10-25
  •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정률성선생(1914~1976)의 출생지와 관련, 현재 한국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은 한국 광주남구의회 유 순남 의원이 지난 17일 정률성선생의 호적과 화순 능주소학교 제적부, 정률성아버지 정해업씨의 토지소유대장자료 등을 토대로 정률성선생의 출생지가 화순이라고 주장하면...
  • 2005-10-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