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사라져가는 세시풍속 벽화로 남기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4월14일 10시12분    조회:630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왈림
농민화가 김왈림 선생, 사라져가는 세시풍속을 벽화로 남기다
 
글/서정옥
 


료녕성 무순시 북역 서남쪽 “한제원조선족특색거리”를 거니는 발걸음은 자연히 느릿느릿해진다. 아니, 몇번이고 벽화속에 퐁당 뛰여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네 뛰고 널뛰고 씨름하는 오락장면, 김치 담그고 찰떡 치는 생활장면, 황소등에 가대기 메워 밭가는 농부의 모습, 등에 어린애를 업고 머리에는 점심밥 싼 보자기를 이고 일밭에 찾아가는 녀인의 모습, 간밤에 자리에 오줌을 싸서 키짝을 머리에 쓰고 소금 빌리러 가는 아이……

약 100메터되는 “한제원조선족특색거리”거리 량켠에 총총히 들어선 음식점 창문을 기웃거려도 아기자기한 민화들이 눈에 밟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씩 집안을 훔쳐보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살아오던 마을과 정 많은 이웃들, 같이 뛰놀던 소꿉친구들의 모습을 너무나 닮은 하나하나의 그림들을 보노라면 마치 시공을 뛰여넘어 먼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이 그림들은 모두 김왈림(金曰林, 1949년생) 농민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진것들이다.

“우리 민족은 참 재미있고 정겹게 살아왔지요. 지금은 추억으로 밖에 남지 않았지요. 이 소중한 세시풍속들이 사라져가는것을 안타깝게 여겨 저 나름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김왈림 선생은 어릴적부터 미술을 좋아했고 중학교 때부터 학교와 향의 선전화를 그렸고 고중졸업후에는 무순의 땜건설  “8.3공정”  본부에서 문예선전대로 있으면서 트롬본, 양금 등 여러가지 악기를 다루었다. 개혁개방 초기부터 시장경제의 물결속에 뛰여든 경력때문인지 김왈림 선생은 첫인상이 땅과 씨름해온 농민과 다른 분위기였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농민 맞아요? 취재기사에 ‘농민화가’라고 써도 되는지요?”하고 물었다.

1979년부터 동북공학원에 있는 처남의 연줄로 2년간 상기 대학 기계설계학과에서 공부했지만 자비생이다보니 졸업후에도 역시 농민호구를 개변하지 못했다면서 지금 보면 농촌 생활이 그의 창작에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무순시 리석채의 한 농민가정의 맏아들로 태여난 김왈림 선생은 젊은 나이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가정의 중임을 짊어졌다. 그때 다섯 동생들을 결혼시켜야 했는데 분배된 땅은 적어 부득불 부업을 시작하게 되였다고 한다.

마을에다 소매점을 꾸리다가 1987년에 농기구공장을 세워 새끼 꼬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이웃들에게 무료로 농기구를 3만여원어치나 선사하기도 했다.

1992년 중한수교 직후 그는 한국에서 양말기계 350대를 들여와 고향에서 양말공장을 꾸렸다. 아마 동북에서 가장 큰 양말공장이였을거라고 한다. 직원이 250명이나 되였으니 말이다. 1995년 김왈림 선생은 국무원판공실 농촌부에서 선정한 “95창업의 별”이란 칭호를 받고 1995년 북경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270명의 대표중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그의 양말공장은 10년간 성장세를 타다가 후에 남방에서 값싼 양말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마진이 남지 않아 그 사업을 마무리 짓고 사업기회를 찾아 산동성 청도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양말기계제조공장을 5년간 운영했다. 그러다가 2008년 막내동생인 김일선이 “한제원”이라고 이름한 식당 개업준비를 서두르자 일을 도와주려고 고향으로 돌아온것이다.

김왈림 선생은 어느날 동생이 식당 바람벽을 장식하기 위해 청해온 심양미술학원 화가의 벽화를 보게 되였다.

“2만원이나 주고 그렸다는 그림이 어딘가 이상했어요. 조선족 주제의 그림이라지만 인물들이 조선족이 아닌 인디안인과 비슷했지요. 내가 그려도 더 잘 그릴수 있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동생도 그 그림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라고 생각한 김왈림 선생은 동생에게 넌지시 제의했다.

“벽화를 내가 그리면 안될까?”

“아니, 형이 어떻게 벽화를 그려요?”

동생은 손사레를 쳤다. 그때까지 형제들이고 친구들이고 그가 경제의식에 앞선것은 알지만 그림에 재간이 있는 줄을 까맣게 잊고 있는 상황이였다. 사실 김왈림 선생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후에는 취미생활로 집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렸던것이다.

“어쨌든 청해온 그 화가보다 더 잘 그릴수 있으니 형을 믿어줘.” 형이 신심가득해서 나오자 동생은 시험삼아 그려보라고 하면서 바람벽 몇개를 지정해주었다. 커다란 바람벽을 마주해 벽화라고는 처음 그리는 그였지만 이상하리만치 화필은 날개가 돋친듯 잘도 나갔다. 그는 사흘만에 벽화 6폭을 다 그려 넣었다.
너무 빨리 그리면 질을 의심할수 있다는 우려심도 있었지만 금방 동생을 불러왔다. 그림을 마주한 동생은 옛날 살던 생활모습을 너무나 생동하게 그렸다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형이 이렇게 재간있는걸 미처 몰랐어요. 앞으로 우리  ‘한제원’의 예술고문을 책임지세요.”
 

후에 동생 김일선씨는 사업을 크게 확장하여 무순, 심양 등 지역에서 식당뿐 아니라 호텔업까지 경영하였다. 2010년에는 무순 서북쪽에 조선족 특색의 “한제원거리”를 건설하고 길 량켠의 상가를 전부 임대하여 경영하였다. 김왈림 선생은 이 거리의 벽화를 도맡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2010년부터 500여점의 그림을 그려 이 거리를 장식하였다.

김왈림 선생은 잔치집, 생일집에 가거나 들놀이나 모임에 가면 주위를 관찰하기를 즐긴다. 사람과 생활정경을 화폭에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김왈림 선생은 조선족 가정에서 즐겨 사용하는 항아리, 장독에다 우리 옛적 풍경을 전통민화로 그려넣는다. 이러한 항아리를 보노라면  마음이 후더워지고 한두개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김왈림 선생을 취재하면서 그의 략력을 정리해보았다. 그는 1984--1999년까지 련속 3기 무순시정협위원을 련임했고 선후로 료녕성“존사중교”모범, 무순시로력모범, 뢰봉학습표병 전국 2등상을 받아 안았다.

그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마을사람 5명의 병원입원비 6천여원을 분담해주었으며 소학교를 지을 때도 성금을 내놓았다. 1982년에는 리석채유치원에 침대 80대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무순의 학자가 “중국조선족항일투쟁노래선집” 출판비용 때문에 고민할 때 그는 출판비용을 전액 책임졌으며 량세봉 렬사 동상을 세울 때 성금 만원을 내놓았다. 아버지로부터 기부문화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김왈림 선생은 돈을 벌었으니 기부에 앞장서야 한다면서 소탈하게 웃는다.▣

<중국민족>잡지 2016년 2호
 

파일 [ 4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의 대표적인 전통음식 브랜드 '코스모' 경영자 김송월 대표   (흑룡강신문=하얼빈) 염청화 연변특파원= 중국어로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무언가에 미친듯이 몰두해야만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이 고사성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풀어낸 사람이 있다. 연변의 대표적인 전통음식...
  • 2017-06-29
  • [백성이야기57]‘중덕할매’와 그의 좌우명  장학생들과 함께‘아지트’에서 20주년 기념이벤트를 두고 상론하고 있는‘중덕할매’(앞줄 오른쪽) 요즘 덕림장학문화재단 (준)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느라 무척 분망하게 보내는 연변가정연구소 박민자 소장과 인터뷰를 약속한 장소는...
  • 2017-06-28
  • 학창시절 누구나 궁금해 하던 전교 1등의 모습. 2017년 대학입시에서 684점(소수민족 가산점 10점 추가)의 성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문과장원으로 된 연변제1고급중학교 3학년 9학급의 방은별 학생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방은별 학생은 서글서글한 인상에 웃음이 가득한 미소가 인상적이였습니다. 기자의 취재를 받고있...
  • 2017-06-28
  • 꿈을 가지고 미국류학의 길을 선택하다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인사들이 적지 않듯이 미국 한인사회에도 류학을 목적으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각종 도전과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한 재미사업가 하용화 회장이 있다. 미국보험업계에 진출해 성공한 재미사업가 하용화 회장. 그의 성공사례가 꿈을 ...
  • 2017-06-22
  • 외국에서의 창업(创业),기업(起业), 사업(事业)의 길이 대부분 가파로운 ‘산길’을 경유해야 된다는 재래의 력사를 허물어 가고 있는 80후의 젊은 기업인 권용, 그는 자기만의 노하우로 당당히 일본 중소기업가들과 어깨 나란히 달리고 있다. 그를 도꾜도니시아사쿠사(東京都西浅草)에서 만났다. 외국 관광객들...
  • 2017-06-22
  •       (흑룡강신문=하얼빈) 우리에게는 책을 살수있는 많은 대안들이 있다. 오전에 주문하면 오후에 받아볼수 있는 온라인 서점, 책이 많고 편하게 앉아서 읽어볼수있는 대형 서점, 저렴하고 가볍게 읽을수 있는 e-book까지. 얼핏 상술한 대안들과 뚜렷한 비교우위가 잘 보이지 않는듯 하나 요즘들어 소규모...
  • 2017-06-21
  • 푸단대 공회 김재근 부주석   (흑룡강신문=하얼빈) 박형군 특약기자, 이수봉 기자=중국의 경제허브 도시인 상하이에 위치한 중국 명문대 푸단대학 공회 부주석으로 활약하며 대학과 기업을 접목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조선족들이 상하이에 뿌리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이가 있다. 그 주인공은 김재근(47, 사진) 부연구...
  • 2017-06-15
  • 박은 예로부터 우리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생활도구로 널리 사용되여왔다. 물을 떠마시거나 술을 마실 때, 그리고 쌀을 퍼낼 때에도 우리 조상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박이 쥐여져있었다. 박을 던지거나 밟아 깨뜨림으로써 잡귀를 쫓아내는 주술적 풍습도 가지고 있어 박의 크기는 작지만 쓰임새는 아주 컸다. ...
  • 2017-06-12
  • 한국 건대양꼬치거리상인협회 김순희 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나춘봉 서울특파원 = "조선족 대부분은 힘들게 한국생활을 시작해요. 좌절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누구보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이 한 몸을 불사르면 꼭 성공하는 날이 올 거예요."   건대양꼬치거리에서 '복만루'라는 중국 음식점...
  • 2017-06-08
  • 향토작가 리태수선생의 문학생애를 돌이키다 서재에서 원고를 심열하시는 리태수선생님(2017년 4월8일) [지난 5월9일 저녁, 습관적으로 위챗모멘트를 뒤지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뜻밖에 연변작가협회가 위챗계정을 통해 발표한 부고를 그것도 한달전에 취재했던 조선족문단의 향토작가 리태수선생님께서 타계하셨다는...
  • 2017-06-07
‹처음  이전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