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11월 27일 중국사회과학원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였다. 민족출판사 사장 우빈희, 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리춘일, 룡정한락연연구회 박호만 회장, 연변대학 북경학우회독서회,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독서회,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독서회의 책임자들과 회원,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의 학생들이 좌담회에 참가하였다.
이번 좌담회에서 박건일교수는 한락연의 생애를 돌이켜보고 그의 일생을 평가하면서한락연을 연구해야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그는 한락연의 생애를 세개 단계로 나눌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첫번째 단계: 조선독립운동의 선구자
1898년 12월 8일, 룡정시 한 농촌의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한락연은 처음부터 한락연이라고 불리운것은 아니였다. 처음에는 한윤화(韩允华), 한광우(韩光宇) 등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이외에도 여러가지 이름들이 있었다. 하지만 작품이나 서류에 싸인할 때에는 한락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림그리기가 생계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 그의 아버지는 한락연이 그림을 그리는것을 반대하였다. 8살때 한락연은 당시 조선독립운동가 리상설 등이 룡정에 설립한 반일애국학교 서전서숙(1906년 설립)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작고하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한락연은 14살의 어린 나이에 전화국에서 교환수로 일하며 일본어를 배웠고 그뒤 해관에서 일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가 중국에까지 미쳐 같은달 13일 2~3만명의 조선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룡정에서 반일시위를 진행하였는데 이 반일시위는 중국의 “5.4”운동보다 두달 일찍 일어났다. 한락연은 시위전날 밤새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어 각 학교에 나누어주어 반일시위때 사용하게 하였다. 그뒤 일본인들은 주모자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한락연도 그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일본인들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한락연은 안해와 딸의 곁을 떠나 조용히 구쏘련의 해삼위로 떠났다.
두번째 단계: 창당초기의 조선족 첫 중국공산당원
구쏘련 연안의 조선인들은 중국의 조선족들보다 더 빨리 로동자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접촉하였다. 1919년, 한락연이 구쏘련에 갔을 때 그 일대는 비교적 어지러웠으며 현지의 조선인들중에 여러개의 당이 출현하였는데 그중에는 리동휘가 설립한 한인사회당도 있었다. 1919년, 대한민국림시정부는 여러 지역에 있는 조선인들을 한데 모아 대한민국상해림시정부를 성립하였는데 그때 대통령은 리승만이였고 국무총리가 바로 리동휘였다. 리동휘를 따라 상해에 온 한락연은 대한민국림시정부의 경위를 담임하였고 그후에는 전차회사에 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후에는 또 리동휘가 설립한 인쇄소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21년, 중국의 첫번째 미술학교 상해미술전문학교가 설립되였는데 한락연은 시험에 참가하여 합격되였다. 이 학교는 현재의 남경미술학원으로서 이곳에서 그는 한광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1923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였는데 당시 상해의 주요 책임자는 진독수였다. 한락연은 상해미술전문학교에서 채화삼을 만나게 되였으며 채화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3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4년 초, 그는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상해기독청년회 명의로 심양에 갔다. 그의 임무는 사상상, 조직상으로 동북공산당조직 성립을 준비하는것이였다. 그 기간에 그는 심양에서 심양미술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곳에서 초기 동북당조직 성립을 위한 개척사업을 진행하였다. 심양미술전문학교는 그의 예술생애에서의 첫번째 큰 성과였다.
1925년, 그는 또 당에 의해 할빈에 파견되여 그곳에서도 똑같이 당조직건설을 위해 힘썼다. 한락연의 할빈에서의 공개적신분은 할빈보육중학교 미술교사였지만 그는 쏘련공산당과의 정보련락망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있었다. 1925년 3월, 그는 구쏘련으로 갔다가 5월에 다시 할빈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그는 할빈의 한 사진관을 찾아갔는데 그때 그 사진관의 주인이 손락천이였다. 그는 손락천에게 사진을 찍는 기술을 배워주었고 그를 혁명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다.
1926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대표들이 안전하게 모스크바에 가게 하기 위해 4월초 만주성위에서는 할빈에 대표접대처를 설치하였다. 1928년 10월, 회의에 참석했던 대표들이 귀국하던 도중 할빈에 며칠 묵게 되였는데 그때 라장룡이 한락연의 거처인 보육중학교지하실에 머물렀었다. 그후 한락연은 또 치치할에 가서 사진관을 열고 지하사업을 진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일제의 군사시설과 군사행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동북지역의 당조직 건립과 발전, 항일전쟁승리를 위해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1929년말, 그는 할빈을 떠났다.
세번째 단계: 국제반파쑈투쟁과 서북지역 통일전선사업에 기여
1929년 한락연은 상해로 돌아왔으며 얼마뒤 프랑스로 떠났다. 1931년, 그는 루브르미술학원에 입학하였으며 8년간 프랑스에서 류학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적극적으로 프랑스공산당이 령도하는 반파쑈투쟁에 참가하였다. 그는 또 유럽의 여러 국가에 가서 그림을 그렸고 동시에 제3국제 반파쑈활동에 종사하였다. 1936년, 서안사변이 발생하였고 양호성이 프랑스에 갔는데 한락연은 《빠리만보》 기자 신분으로 양호성에게 사진을 촬영해주었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 있는 10여명의 청년들을 뽑아 양호성의 귀국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그중에 한락연이 있었다. 1937년, 한락연은 귀국한후 무한에서 주은래와 동필무가 직접 령도하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가하여 주요하게 대외련락과 선전사업을 책임졌다. 1938년, 그는 사천에서 개인화전을 열었고 5월 7월 중경에서 출발하여 서안에 도착하였다. 이 기간 그는 여러 지역에서 민정과 전장의 정황을 료해하였다. 1939년 10월, 그는 중경에서 항일구국사업에 종사하고있던 류옥하와 결혼하였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그는 서안 "국민당특수구치소"에 갇혔으며 옥중에서도 계속하여 공산당원의 절개를 지키고 용감무쌍하게 적들과 투쟁하였다. 1943년 초, 감옥에서 석방된후 그는 서안에서 개인화전을 열었다. 1944년, 한락연의 전 가족은 란주에 정착하였으며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서북에서 화가의 신분을 리용하여 다시 첩보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는 서북의 평화적해방을 위해, 특히는 신강의 평화적해방을 위해 국민당 상층요원에 대한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하였다. 1946년, 그는 처음으로 신강 키질에 갔을 때 그곳의 민중들이 약이 부족하여 병치료를 못하는것을 발견하고 두번째로 갈 때 많은 약을 가지고 가서 현지 백성들로 하여금 병을 치료할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서북에 있는 동안 여러 민족 인민들과 화목하게 지냈는데 당시 그가 창작한 서북민정을 담은 그림과 사진작품들은 그 시기 서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로동생활에 대한 진실한 화폭이였다.
생애의 마지막 5년 동안 그는 대량의 그림과 촬영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또 서북고고학에서 풍성한 성과를 남겼다. 1947년 한락연은 국민당 군용비행기를 타고 신강 디화(迪化, 지금의 우룸치)에서 란주로 가던 도중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락연은 걸출한 혁명가이다. 그는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족이며 초기동북공산당조직을 성립한 지도자중 한명이다. 그는 또 국제반파쑈전사로서 세계반파쑈투쟁을 위해 싸우기도 했었다. 또 장기적으로 당의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여러 민족 인민들과 융합되여 민족단결의 모범으로 되였다. 그는 또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심양에 심양미술전문학교를 설립했으며 프랑스 빠리에서 미술공부를 했다. 그는 중국의 여러 지역과 세계각지에서 예술창작을 하고 고고학을 연구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대량의 촬영, 회화 작품을 창작하였지만 대부분이 소실되였고 현재 부분적인 작품만이 중국미술관에 소장되여있다.
박건일교수는 한락연에 대한 연구는 아래의 세가지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첫째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데 현실적의의가 있다. 둘째로 중국조선족에게 중대한 의의가 있다. 셋째로 공산당의 력사를 알고 국제관계를 료해하며 민족통일전선사업을 하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파일 [ 3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