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나이에는 미국에서 장애인교육학전공의 가난한 류학생으로 불리웠고 그후에는 고아 5명을 입양하여 자식을 마음으로 낳은 박사라 불리웠다. 그리고 또 한때에는 대전 한성대학교를 설립한 초대총장으로 불리웠고 인생의 황혼을 장식하는 지금에 와서는 황금삼각지인 훈춘의 특수교육학교 모든 장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고있다. 훈춘시 명예시민이기도 한 김찬영박사를 만나러 가는 길, 청정하늘 해볕아래 활기찬 생명의 초록색으로 우거진 시내의 록화를 따라 한창 달려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어느 한 거리의 담벼락을 따라 들어가니 “훈춘시특수교육학교”라는 간판이 보였다. 여기가 바로 김박사와 그의 미국인 안해 패츄리샤 김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1936년 한국 부산에서 태여난 김박사는 196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테네시주 존슨대학에서 대학원까지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같은 전공인 패츄리사 김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2녀를 뒀으며 1972년에 5명의 한국 고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장애인교육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박사내외는 그후에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고아와 장애인들의 교육사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수십년간 함께 해왔다. 가슴으로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그들을 보듬은 김박사내외, 그들의 나눔실천은 연변에서도 지속된다. 퇴직한 이들에게 자식들은 물었다.
“여생을 화원을 가꾸며 보낼건가요?”, “메히꼬 바다에서 낚시를 하며 보낼건가요?”
이에 김박사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나는 조선족이 사는 지역으로 가서 내가 하고싶은 일을 찾을것이다!”
그렇게 우직한 다짐으로 연변에 발을 붙인지 18년. 여태 북경의 만리장성과 서안의 진시황릉도 못 가본 김박사가 연변을 택한 리유는 민족의 동질감때문이다. “그 시기, 연길에서 반년정도 머물러 형세를 살폈어요. 그러다 연길보다 더 어렵게 사는 지역을 찾아나섰는데 그게 바로 훈춘이죠.” 그리하여 훈춘에 설립된 특수교육학교는 현재 110명의 장애인과 45명의 선생님으로 구성되였다. 제빵교육과 자신감 부여를 위한 재활승마로 장애인들의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는것이 학교의 특징이다.
“태여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 이들도 충분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보는 인간이 되여야 하는게 바람직하지요.”
김박사는 훈춘의 양포에 1만 5000평방메터 대지에 약 3000평방메터의 장애자를 위한 양로원과 고아원으로 사용될 건물을 올해안으로 완공할 예정인데 시설과 규모는 길림성에서 최초라고 한다.
“힘닿는데까지 장애인교육사업을 하려고 해요. 나중에 삼십년 뒤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조선족 누군가가 꼭 이 땅에서 삶이 버거운이들에게 사랑을 전하여 나의 삶의 연장선을 그어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지요. 여기에는 또 100헥타르의 승마장과 농장도 구비되여있어요.” 튼튼해진 몸, 더욱 치유된 심리… 장애인들의 이같은 변화와 작은 몸짓 하나에도 커다란 감동을 느낀다는 김박사의 얘기다. 일생을 안해와 더불어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행한 김박사,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 더우기는 인간을 사랑하는것이야말로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양분이자 삶의 신조라고 여겼다.
우리들에게 경이로운 꿈과 이 땅에서 그 꿈이 실현될 기반을 만들어주고 알알이 박힌 사랑의 씨앗으로 동기를 부여해주고있는 그는 사랑에는 권총보다도 더 큰 힘이 들어있다고 한다. 사는 내내 장애인들에게 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일깨우면서 그들에게 다양한 세계를 보여준 그는 이제 우리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가? 아마도 묵직한 인간사랑주의 희망의 울림을 던져주는듯싶다./연변일보 류설화기자
【칼럼】
인간 완성의 양분과 삶의 신조—사랑
김영택
얼마전에 훈춘시 명예시민인 미국적 김찬영박사가 “조선족을 위한 일을 하고싶 어” 산간지대인 연변 훈춘에 와 황혼을 연변땅에서 보내고 있은지도 어언간 18년 세 월이 흘렀다는 기사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여생을 화원을 가꾸며 보낼건가요?”,아니면“메히꼬 바다에서 낚시를 하며 보낼 건가요?”하는 자식들의 물음에 추호의 망설임도없이 “나는 조선족이 사는 지역으로 가서 내가 하고싶은 일을 찾을것이다”라고 단호히 대답했다는 김박사.호의호식하며 살아갈수있는 환경도 마다하고 이땅에서 18년 세월 하고픈 일,그렇듯 거창한 일을 찾 아하며 청사진을 펼쳐가고 있는 김박사.
한국의 수필가 안병욱선생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세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거 미와 같은 착취형의 인생이요 두번째는 개미와 같은 근면형의 인생이요 세번째는 꿀 벌과 같은 봉사형의 인생이라고 했다.
김박사가 바로 이런 봉사형의 인생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이다.미국에서 장 애인교육을 전공한 가난한 류학생이면서도 5명의 고아를 입양하여 마음으로 낳아 키 운 박사이고 황혼길에서 훈춘에“훈춘시특수교육학교”를 설립운영해가고있다.김박사 가 이렇게 할수있은것은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 양분이자 삶의 신조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때문이다.
이런 사랑이 안받침되였기에 “태여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들도 충분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며 만년의 천륜지락도 누릴념없이 현재 110명의 장애인과 45 명 교원으로 구성돤 특수교육학교를 꾸려나갈수 있지 않는가?
김박사에 비하면 우리한테는 장애인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부족하지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하지않을가?
—.한때는 그렇듯 인기를 끌었던 주장애인예술단도 이른바 경제난으로 해산의 불운을 당하지않으면 안되였다.
—장애인 취업난도 사회적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거리에 설치한 장애인전용인도가 구경 그들을 다니라고 설치했는가,아니면 형 식적으로 설치해 놓은것인가?한뼘이나 잘되는 인도옆엔 전보대가 서있고 대부분 맹 인도가 엉망으로 파괴되고 인젠 차들이 주차해 아예 인도가 보이질 않는다.
우리가 성찰해 보아야할 일들은 이것뿐만 아니다.우리는 지금 어떻게 우리의 언 어와 문자를 아끼고 사랑하며 지켜가고 있는가?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우리 언어와 문자는 우리의 령혼이며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이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도에 달하고있는가?상당 수 조선족 공무원들의 우리 말 우리 글에 대한 사랑은 거의 “제로”이다. 그 영향으로 일부 가두와 사회구역의 사업일군들마저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사랑은 운운할 여지 조차도 없을 지경이다.조선말로 인터뷰 하기를 꺼리고 가두와 사회구역 사무실 현수 막은 거의 조선글자로 된것이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지금 김박사한테 실로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있어 챙피하기 그지없다. 김박사가 연변을 택해 황혼을 보내며 조선족을 위해 일을 하고픈 리유가 바로 민족의 동질감으로 이어진 우리 말과 우리 글이 살아 숨 쉬기때문이였다.하기에 우리는 김 박사처럼 사랑의 마음과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사랑하고 키워가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전을 굳건히 건설해가야 할것이다.이런 자세가 바로 우리가 김 박사를 따라 배우는 구체적인 실천이 아닐가?
어느 한 문인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바칠 곳을 찾는 것이요, 자기가 자기의 몸바칠 일을 찾는 것이다.몸바칠 곳과 몸바칠 일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김박사를 두고 한 이야기 같아서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다.
“힘닿는데까지 장애인교육사업을 하려고 해요.나중에 삼십년 뒤에 나와 뜻을 같 이하는 조선족 누군가가 꼭 이 땅에서 삶이 버거운이들에게 사랑을 전하여 나의 삶의 연장선을 그어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지요”
김박사의 힘겨운 부탁이자 간곡한 기대로 충만된 페부지언.우리는 그때에 가 그의 계주봉을 이어 받을 만반의 준비를 지금부터 착실히 해 나가야 하지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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