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정직과 신용으로 성공신화를 쓴 조선족사나이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10월28일 17시23분    조회:674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조약걸
   
    계렬보도: 조선족집거지역으로 가다(길림시편)

  [편집자의 말]: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초청으로 지난 10월 19과 20일에 중국국제방송국, 길림신문사, 료녕신문사, 흑룡강신문사의 부분 기자들로 무어진 공동취재팀이 길림시조선족사회를 방문취재했다.

  공동취재팀은 길림시 3대 상업중심지중의 하나인 천진가 만리쇼핑센터, 길림시심장병치료 1순위 민영전문병원 박화병원, 길림시조선족꿈나무들의 배움의 요람 길림시조선족유치원,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국내 최대규모의 길림시조선족민속문화축제를 정부의 공식 행사일정에까지 올려세운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을 순방했다.

  경제와 문화의 조화로운 발전을 이루어가는 길림시조선족사회와 그 배후 길림시 조선족인물들의 숨은 노력, 발자취를 적은 취재기사가 오늘부터 해당 매체를 통해 륙속 발표된다.

  길림시 천진가 상업거리를 석권한 조약걸회장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길림시 룡담산정에 올라서면 장백산에서 발원한 송화강이 S자로 도시를 굽이굽이 감돌아흐르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좋고 물좋아 살기좋은 고장으로 유명한 길림시, 길림성의 두번째 대도시인 길림시는 또한 조선족의 대집거지로 198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17만여명의 조선족동포들이 살고있어 산재지역중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룡담산의 맑은 정기를 받아 조선족의 영재를 수많이 탄생시킨 길림시, 그속에는 길림시 3대 상업중심지의 하나인 천진가 상권을 석권한 사나이가 있다.그가 바로 길림시만리그룹 리사장이며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인 조선족 조약걸(赵跃杰.55세)이다.

  길림시의 동대문 만리쇼핑몰

  길림시 천진가 상업거리에 마주보고 우뚝 솟은 만리쇼핑몰, 길림시 만백성이 즐겨 찾는 대형종합쇼핑몰이다.

  또 이곳은 길림시의 최대 일용품 도소매중심으로 자리매김해 서울의 동시장과 맞먹는다는고 해서 일명 길림시 동대문으로도 불리운다.

  만리쇼핑몰은 A건물와 B건물로 나뉘는데 A건물은 식품과 편직포목, 공예품, 일용잡화, 가전철물, 생활용품, 문화용품, 완구, 영아용품 등 품목을 망라하는데 1300여개 점포에 일 고객류동량이 연 6000명이상으로 길림시에서 최대 일용품도매시장이다.

  B건물은 침상용품, 복장, 신발, 악세서리, 가방 등 품목을 경영하는데 브랜드와 저가품 교차경영전략을 펼치고있다.

  만리쇼핑몰의 전체 건축면적은 근 9만여평방미터, 년간매출액 10억원, 년간납세액 4천만원, 어마어마한 수자앞에 입이 떡 벌어진다.

  유망한 정부관원이 대그룹회장으로

  만리부동산유한회사, 만리쇼핑몰유한회사, 동북아상무유한회사, 약화유리제품유한회사 등 4대 계렬사를 거느린 만리그룹 조약걸리사장이 상계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33세때였다.

  31세때 정부관원의 신분으로 1991년도 훈춘에 고찰을 갔었었다. 훈춘개발붐속에서 창업으로 동분서주하는 20대 젊은이들의 열정이 그의 가슴에도 불을 지펴놓았다. 조약걸의 마음속에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 계기였다.

  “나도 하면 된다! 한번 도전해보자!”신심으로 가득찬 조약걸은 정부 공무원의 철밥통을 과감히 버리고 하해의 풍랑속으로 용감하게 뛰여들었다.

  민영기업인 길림시만리부동산유한회사를 설립하던 당시 등록자본금은 200만원, 은행대부금이 대부분이였다. 운이 좋았던것은 당시 아파트개발상들은 아파트예매방식을 통해 자금을 당겨쓸수 있어 백수로 자수성가가 가능했던 시절이였다.

  초기에는 주로 주택개발을 했다.

  첫 항목은 1994년에 건설한 길림시 신화영화관주택이였는데 건축면적이 1.2만평방미터였으며 1995년에는 건축면적이 2.5만원평방미터 되는 청진락원아파트를 개발했다.

  연후에 주택개발에서 상업부동산개발로 전의, 1995년에 천진가도매시장을 개발했다.

  천진가도매시장의 개발은 만리부동산이 상업부동산개발을 향해 내디딘 첫 행보였다.

  2001년에 만리쇼핑몰유한회사를 설립하고, 5000만원의 자금을 투자해 만리쇼핑센터 1기, 2005년에는 6000만원의 자금을 투자해 만리쇼핑센터 2기를 건설해 1기와 2기의 총건축면적이 6만평방미터에 이른다.

  2002년에 국영기업개혁의 바람속에 국영동북아상무유한회사가 만리쇼핑몰유한회사에 합병되였다. 동북아상무유한회사의 천진가 도매시장(현재의 만리쇼핑몰A)를 구입하고 확장건설을 통해 지상 6층, 3.2만평방미터의 쇼핑몰로 재탄생시켰다.

  2007년에는 2천여만원을 투자해 이미 부도난 길림시제1유리공장을 사들였다.

  2013년에는 길림시 굴지의 부동산업체 훙버그룹과 손을 맞잡고 루계로 7억원을 투자해 건축면적이 20여만평방미터에 달하는 고급주택을 개발했다.

  아직도 관원의 스타일이 다분한 사업가 조약걸, 그는 유망한 관원에서 억대 그룹 회장으로의 탈바꿈에 성공했다.


  차별화 경영전략

  “엄격하게 말하자면 만리쇼핑몰유한회사는 부동산임대업입니다. 만리쇼핑몰의 업주들의 매출을 통일로 만리쇼핑몰유한회사에서 수금하는 관리모식이지만 업주들에게 7일에 한번씩 결제를 하고있으며 결제를 절대 미루지 않습니다.”조약걸의 말이다.

  대형슈커마켓이나 백화상점은 빠르면 한달, 통상 3개월이며 지어 반년에 한번씩결제하고 있다. 결제에 자금이 묶이는것이 두려워 입점을 포기하는 업주들도 있으며미룩미룩하는 결제에 배기지 못하고 울며겨자먹기로 점포를 철수해야만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7일에 한번씩 결제하는 만리쇼핑몰의 운영방침은 상가에 입주한 업주들에게는 너무나 큰 매력을 안겨주었다.

  경영에 있어서 만리소핑몰은 “길림시시민-우리들의 상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현지 시민들이야말로 가장 방대한 소비군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이유였다..

  매장 내부인테리어를 하는데 있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게 단 편안한 느낌을 강조했다. 누구든 만리쇼핑몰을 거부감없이 출입할수 있도록 배려한것이다.

  또 브랜드와 저가 교차경영전략, 품종의 다양성으로 부동한 차원의 고객들을 끌고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화위복

  “세인들은 성공만을 보지만 사실 그동안 파란만장한 곡절이 많았지요. 성공보다 그 과정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이는 취재과정에 조약걸 회장이 꺼낸 의미심장한 말이다.

  경영을 하는데는 늘 위기가 잠복하고 있는 법이다.

  만리쇼핑몰 설계 당시 최초의 방향은 대형슈퍼쪽이였다. 그시기에는 전국적으로 대형슈퍼가 호황을 누리는 시기로 하루밤사이 슈퍼마켓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던 시기였다.

  조약걸씨가 지금에 와서도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하기는 그 당시 거듭되는 고민끝에 대형슈퍼를 포기하고 방향을 틀어 현재의 종합쇼핑몰을 선택한것이였다고 한다.

  종합쇼핑몰 매장 분양이 순조로왔던것만은 아니다.

  시장 저조기에 만리쇼핑몰 3층 업주들이 전원 철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약걸이 집에 있는 현찰 7, 8백만원을 전부 털어내여 업주들의 입주금을 반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쇼핑몰이 살아남으려면 우선 업주들의 살아갈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경영진은 점포세를 매년 평방미터당 20원, 매달에 약 1.6원이라는 상상도 못하는 가격에 내여놓았다. 또한 점포를 임대하면 동일한 면적의 점포를 공짜로 주는 파격적인 경영을 실시했다.

  결국 매장은 다시 전부 임대자들로 꽉 찼고 일정기간 시장경기 부흥을 거쳐 다시 매장세를 합리적으로 책정해 업주들과의 상생의 길을 열어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위기는 도사리고 있다.

  인터넷쇼핑이 성행하면서 전통시장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만리쇼핑몰이 아직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인터넷쇼핑이 매출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조약걸씨는 이에 대해 고민은 하고 있지만 아직은 확실한 대책없이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은 상황이라고 심경을 털어놓는다.

  조선족기업인의 사명

  수만명에게 취업자리를 제공하고 수천만원의 납세를 하는 기업인, 조약걸이 조선족기업인으로서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은 어마어마하다.

  길림시에 대형수재가 났을때나 사천문천대지진이 일어난 당시에도 기업인으로서 선뜻 거금을 지원했다.

  또 조선어는 서툴지라도 조약걸은 자신의 몸에 조선족의 피가 흐르고있다는 사실을 잊어본적이 없다. 조선족이라는 자부심을 늘 안고 산다. 조선족사회의 일이라면 청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8년간 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직을 맡아오면서 조선족사회 성원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왔다.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주최하는 길림시조선족단오민속축제에 매년 거액을 내놓았고 길림시조선족유치원에 어린이통근차가 부족한 어려움을 알고 버스 한대를 보내주었으며 로인협회, 조선족중소학교 등 조선족사회 여러 면에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그의 기업은 길림성 우수민영기업의 영예를 안고있으며 조약걸은 길림시 민족단결진보모범, 전국 창업의 별, 2008년부터 길림성인민대표의 영광을 지녔다.

  사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 대한 충언

  조약걸회장은 성공의 요소에 대해 가장 근본으로 정직경영과 신용 및 드팀없는 장인정신을 수차 강조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은행대출을 받아 사업을 해왔지만 단 하루도 어기지 않고 기한내에 철저하게 갚아왔다고 말했다.

  인터넷시대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의 형성으로 낡은 생산형기업과 로동밀집형기업의 도태와 더불어 새로운 경제판국이 형성되는 단계이다. 현시대는 젊은이들이 창업하기 좋은 절호의 기회라며 과거 창업의 필수요건들인 자금과 사무실, 장비보다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대라고 했다.

  조약걸씨는 “자신이 흥취를 갖는 분야에서 하고싶은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집념할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될수록 자신이 갖고 있는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서 창업하는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끝으로 조약걸은 자신이 젊은 시절에도 간 큰 사람이였다며 언제 어디서나 용기와 담략, 정직과 신용, 투철한 장인정신이 성공을 부른다고 했다.

  /중국국제방송국, 길림신문사, 료녕신문사, 흑룡강신문사 공동취재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1958년, 봄, 김 철은 귀향한다. 그가 맨 배낭에는 전쟁의 초연 속에서 쓴 '전선 시초'1백 여 편이 들어 있었다. 해란 강변엔느 새움이 돋고 있었다. 연변 땅을 밟으며 가슴이 벅찼다. 즉흥시가 떠올랐다. "이른 봄 해란 강에 아지랑이 피는 데/귀환병과 처녀는 고향 길을 거닐었네/담벽 같은 앞가슴에 주렁진 훈장은/결결한...
  • 2005-10-25
  • 북경 킹스카이정보기술휴한회사 김호동사장 중국의 “실리콘벨리”로 불리는 북경의 중관촌, 중국 IT시장을 선도하는 북경시장에서 민족기업가인 김호동사장도 중한 상무교류를 바탕으로 프로그램 개발, 사이트 개설 등으로 선두역할을 하고있다. 길림성 도문시 출신인 김호씨는 1988년 7월 중앙민족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
  • 2005-10-24
  • 1700여개 한국기업 입주 상주 한국인 8000여명 대련은 중국 동북3성의 대외개방 및 경제개발의 창구로서 가장 큰 해안무역도시이다. “대대련건설”(大大連建設) 가속화와 중한량국간 경제관계의 진일보 발전으로 한국굴지기업들의 대대련투자가 발빠른 행보를 거듭하고있다. 특히 올해 한국 조선업계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 2005-10-24
  • [원제: 일반인도 “항천꿈”실현 가능] 할빈공대 김영덕교수 신주시리즈 우주선 청사진 그려 최근 기자의 취재를 받은 할빈공업대학 항천학원 김영덕교수는 “몇천년후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실험을 하고 일반인들도 우주려행꿈을 실현할수 있게 된다”고 하면서 향후 중국항천사업발전의 미래를 전망하고 우주선이 우주를 비...
  • 2005-10-24
  • 김상기 일가는 길림시 교외의 가반가에 눌러 앉았다. 길림시에서 서북쪽으로 공장구역-하다만을 지난 송화강 나루터를 지나면 불과 십리도 못 되는 시골이었다. 일명 북길림이라 했다. "길림시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신길림이 있었죠. 일본인 마을이었지요. 만주석유회사도 있고,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신길림에 사는...
  • 2005-10-24
  • 전남-곡성군 입면 삼오리, 넓지 않은 벌판, 옥답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김상기는 유년기, 엿 궤짝을 둘러메고 정처 없이 흘렀다. 그러다 거지가 됐다. 울산에서 또래 거지를 만나 친구가 됐다. 부둣가로 놀려 갔다가 일본의 화물선과 인연이 된다. 화부다 됐다. 화물선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큰 화물선 회사 소속이었다...
  • 2005-10-21
  • [원제: 어려움속에서 성공한 행운아] 2005-10-20 10:21:37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마음씨 고운 뭇사람들의 도움으로 끝까지 학습에 노력하여 중국의 명문대학인 절강대학에 입학한 정춘매학생은 참으로 행운아였다. 집이 흑룡강성동녕현삼차구진에 있는 정춘매학생의 가정은 본래 생활형편이 괜찮았다. 그런데 자녀의 공부뒤바...
  • 2005-10-20
  • 중국은 요즘 101세를 일기로 지난 17일 세상을 떠난 원로 문학가 바진(巴金) 중국작가협회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하다. 그가 오랫동안 살았고 숨을 거둔 상하이를 비롯해 그가 설립을 주도했던 현대문학관이 있는 베이징, 1904년 그가 태어난 쓰촨성 청두 등에서 추도 행사가 한창이다. 중국 신문들은 엄청난 지면을...
  • 2005-10-20
  • 유년 시절의 대가족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에 외할머니가 파금을 안고 있고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금의 모친이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17일 세상을 등진 파금(巴金)은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1904년 11월24일 사천(四川)성 성도(成都)에서 태어났다. 본...
  • 2005-10-20
  • 항미원조시기 파금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작가였다. 1952년 3월 31일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4월이후로는 개성 제1선으로 나갔다. 그는 친히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영웅들속에서 생활》하였고 10월에야 귀국하였다. 그후 1965년까지 그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에 대해 노래하는 글들을 많이 썼다. 이 시...
  • 2005-10-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