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매》와 함께. 왼쪽으로부터 심연, 장춘실, 필자, 전령.
개혁개방 붐에 따른 중국조선족군체의 이동사를 소개하려면 조선족녀성들을 특별히 부각하게 된다. 꿀벌정신으로 스스로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찬밥, 더운밥을 가릴세라 현지 사회에 발 붙이는 조선족녀성들의 강한 생존력은 어디에 가서도 감탄을 자아내고있다.
재일 조선족사회를 살펴봐도 남자들보다 녀성들이 더욱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고있다.
필자자 이번 《재일 조선족류학생 삶의 현장》취재에서 녀성들을 특별히 부각하려 하는것도 상술한 리유때문이다.
회사원, 아르바이트생, 가정주부 등 다각색으로 본 일본사회에서의 조선족녀성들의 생활, 갈등, 부모효도 그리고 저마다의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가 특히 궁금하였다.
회사생활과 가정생활을 주제로 기획한 취재에 응하며 모인 이들은 소학교때부터 친해온 도문철도2중(도문시 제1고급중학교와 합병) 1995년 동기동반 고중졸업생들인 장춘실, 심연, 전령이다.
이들은 현재 상해에서 생활하는 녀성 한명을 더해 고중때부터 도문철도2중 《4대천왕》으로 불렸다.
이들의 우정에 감정을 가미해 동기동창3녀를 《세자매》로 칭한다.
회사원들이 여가시간을 짜내고 서로간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데서 만남의 시간을 7월 4일 (토요일) 저녁 6시로 약속하였다.
약속대로 동경 오오쿠보에 있는 오리목전문요리점에 도착하니 《세자매》는 고향에서 《아버지》가 오셨다고 반겨주며 언녕부터 대기하고있었다.
이들이 고중때부터 가끔씩 만난 필자의 기억속에는 천진하기로 애티만 났을뿐이였는데 20년후의 만남에서 보여준 얼굴모습은 단지 《성숙》만이 아닌, 자신감과 당당함이 가득 담겨진 예쁨이였다.
《세자매》는 동창생
《자매》의 왕언니인 심연은 1975년 2월생, 북방교통대학을 졸업하고 1999년 7월에 일본에 갔다. 일본에 간후 아버지가 사망되고 어머니는 재가했다. 심연은 일본에서 일본어학교를 다닐 때 만난 한족남자와 결혼한 후 지금까지 중학생 딸을 둔 가정주부이다. 가끔씩 비정규고용일로 생활비를 보태기도 한다.
《세자매》의 둘째 장춘실은1976년 2월생, 일찍부터 문학소녀로 불렸다. 연변대학 한어학부를 졸업하고 2000년7월 일본에 갔다. 중국에는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고 일본서 연변남성과 결혼했다가 리혼하고 지금 일본의 모 화장품회사에 다닌다.
《세자매》의 막내 전령은 1976년 9월생, 중학시절에 공부를 잘한다는 평판으로 연변대학 일어학부를 졸업하고 2000년 7월 일본에 갔다. 부모들은 고향에서 양로원을 경영하고 남동생이 부모곁에 있다 한다. 일본에 간후 심연의 소개로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고 9살 짜리 딸이 있으며 지금 모 무역회사의 회사원이다.
만일 어떤 《사실》만을 화제로 하면 오랜 친구사이라고 해도 대화가 곧 끊겨진다. 허나 《감정》을 주제로 하면 시간, 장소가 구애없이 풍성한 대화로 이어진다.
식사와 함께 약 3시간가량 서로 오간 풍성한 대화는 진짜 별미였다. 감정을 바탕으로 회포와 현실생활, 사업에서 감수하는 그들의 기쁨과 고민은 기대 이상으로 대화가 풍성하게 되였다.
풍성한 대화는 재일 조선족녀성들의 관심사, 일본사회에 대한 일가견, 그리고 삶의 갈등 등 여러가지 초점으로 이어졌다.
성공이냐 실패냐라는 공리주의를 떠나서 생활미로 풍기는 채록을 그대로 옮긴다.
《그래도 자녀교육을 책임지겠습니다》
흘러넘치는 화제의 제일 첫 주제는 자녀교육이였다.
이들에 따르면 일본서 애들이 다니는 학교(특히 소학교)는 생활방식을 양성하는 곳이고 진정 공부하는 배움터는 학원이란다.
일본서 초중까지는 의무교육이니깐 공립학교는 나라의 규정대로의 교수진도만 지킨다. 일본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특히 소학교와 중학교)학생들의 학습성적차이는 상상을 못할 정도란다. 그만큼 사립학교학생들의 성적이 공립학교보다 퍽 높다는 얘기다.
일본서 사립학교를 보내자면 부모들의 경제적인 실력뿐만아니라 시간적여유도 있어야 한다.
고중부터 좋은 학교를 보내려면 시간을 늦추게 되므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적은 소학교나 초중부터 사립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부모들이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수 있는 여건이 안되니 큰 문제란다.
한국에서도 부모들의 소득과 자녀교육의 질이 밀접히 련관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국 고려대학 김경근교수에 따르면 아버지의 월소득이 500만원을 초과하는 자녀들의 수능평균점수가 317.58점이고 월소득이351만원에서 500만원이하면 310.01점, 200만원이하면 287.63점으로 밝혀졌다. 이는 부모들의 소득격차에 따르는 부(富)의 불평등이 교육의 불평등을 초래함을 설명한다.
《공부를 잘 해라》는 지구촌의 모든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관한 상투어다. 허나 문제는 공부를 잘 하려는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부모들이 감당할수 있는가 없는가가 자녀들의 학욕을 만족시킬수 있는가 없는가의 중요한 요인으로 나선다.
부모냐 자식이냐는 물음에서 《그래도 자식을 책임지겠다》로 매듭을 지었다.
부모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뿐
자녀다음의 화제는 당연하게 부모로 이어졌다.
일본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제일 큰 걱정은 일본의 지진이고 타향에 있는 자녀들이 제일 받는 가책은 고향에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필자의 아들도 일본에 있다보니 첫마디로 《지진이 두렵지 않는가》를 물어본다.
이에 심연은 일본의 건축물이 지진예방기능이 잘 된데서 지진보다도 그에 따르는 쓰나미나 화재가 두렵다고, 전령은 무섭지 않다고, 춘실이는 죽을수도 있다는 각오로 지금은 땅이 흔들려도 책상밑에도 안 들어간단다. 10여년간의 일본생활에서 특히 지난 《3.11》쓰나미를 경험해 일본의 재해방지시스템에 대한 신뢰여서인지 이들은 부모들이 밖에서 걱정을 하는 근심보다 방사선피해를 포함한 지진에 대한 공포감이 생각밖으로 적었다.
다음은 부모효도에 대한 각자의 화답이다.
심연:
ㅡ조선족부모는 효도만을 요구하기에 내가 잘하면 된다. 한족부모들은 효순을 요구하기에 시부모를 따라 순(順)을 할려니 그야말로 정말 삐치기 힘들다.
지금 같이 살고있는 시어머니(78)는 쓰던 걸레를 버리면 왜 쓸만한것을 버리냐며 다시 주어오고 심지어 버린옷까지 다시 가서 찾아 입는다. 지금은 글자로 시간을 알리는 시대인데 시부모들은 시계바늘로 시간을 알려주는 탑벽시계를 못 잊어하니 며느리로 따르려니 진짜 힘들다. 이밖에도 조선족은 장남이 부모를 모시는데 한족부모들은 기어코 막내를 따르려 한다. 아들 삼형제중 막내인 우리가 부모를 모셔야 하니 생각할수록 답답하다.
ㅡ나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출산때문에 가지 못해 평생 죄송스럽다. 어머니는 7, 8년전에 재가했다. 금년에 어머니와 계부를 일본에 초청하여 지난 5월에 만났다. 어머니의 늙은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용기를 내서 계부를 아버지라고 불렀더니 두분이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한족시부모들이 온다기에 어머니가 2주밖에 놀지 못하고 돌아간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어머니를 보낼 때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웠고 허무하였다.
전령:
ㅡ나의 효도는 종종 전화를 하고 생일에 돈을 부쳐드리는것뿐이다. 남동생이 곁에 있어서 괜찮다. 나에게는 《자주 가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는 말밖에 없다.
시집쪽에는 남편이 막내기에 부모들에 대한 부담이 적다. 그저 종종 돈을 보내고 만다.
춘실:
ㅡ나도 부모들한테 미안합니다는 말밖에 없다. 1년에 몇번 돈을 보내고 위챗으로 련계하는것뿐이다.
모임끝에 필자는 귀국한후 꼭 부모들을 찾아가 물어보겠다는 약속대로 지난 9월 6일에 전령의 부모를 찾아서 자식에 대한 바램을 들어보았다.
전령의 부모들은60대 중반에 로인이 로인을 모시는 부부로 양로원의 40여명 로인들로부터 《엄마》, 《아버지》로 불리는 효도부부였다.
딸의 효도를 물으니 《때때로 전화가 걸려오고 생일에 돈을 부치며 차를 새것으로 바꾸라며 돈을 따로 보내오니 만족입니다. 지진이 걱정될 따름입니다》며 애들이 건강하게 탈없이 보내면 만족이 란다.
남편들은?
꾸밈이 없는 담소는 부모에서 남편으로 이어졌다.
춘실:
ㅡ나는 당년에 고향의 조선족남자를 선택하였다. 남편은 취직으로 일본에 왔는데 까다로운 일본사회에 적응하기 힘겨워 했고 한편으로 나도 암으로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회사에 여러가지 일들까지 겹치다나니 남편을 리해하고 대방의 고통까지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내가 하는 일도 여유가 없었다. 이런 심리적인 압력과 시간적 차이로 《부부간에 가치관이 틀린다》고 결론하고 3년만에 리혼을 했다. 지금은 등산, 영어학습 등 취미생활로 즐긴다.
심연:
ㅡ한족남자는 단순하다. 나를 잘 받들어주고 나의 말을 잘 따른다. 앞으로도 나쁜 일만 안하면 끝까지 살만하다.
전령:
ㅡ한국남편이 너무 가부장적이다. 자식이고 부인이고 100% 독점하려 한다.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안하면 삐진다. 중국은 남녀평등으로 아침에《你走啦?》하고 저녁에《回来啦!》하면 끝인데 말이다. 지금은 서로 맞춰 가지만 아직은 멀었다.
ㅡ일본사회도 남녀차별이 많다. 회사 남자들은 녀자들이 당연히 차를 부어 올리려니 생각한다. 중국서는 관계없는데 말이다.
춘실:
ㅡ나는 회사에서 그런 일을 안한다. 나는 일본사람들과 싸우면 이긴다. 싸우고 나면 내가 일본말을 정말 잘한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하, 하, 하…
이밖에도…
남편까지 말하고나니 다음은 기뻤던 일, 즐겨부르던 노래, 아쉬웠던 일, 마음속의 갈등, 학교, 담임교원, 동창들께 하고픈 말들이 꾸밈없이 뒤따랐다.
전령은 기뻤던 일로 남편이 회사를 접고 자영업을 시작할 때 외국인이라는것을 불문하고 해당 부문으로부터 자기네들이 신청한대로 융자를 받은것을, 심연은 딸이 자기의 바람대로 선택한 사립중학교에 입학한것을, 춘실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회사를 찾았고 또 회사에서 자기의 능력을 인정해주니 살다가 이런날이 있는가며 진짜 기뻤던 일을 꺼낸다.
심연은 지금까지도 자기의 리상과 꿈을 포기하고 가정주부로 된것이 아쉽고, 춘실이는 결혼 3년만에 리혼한것이 아쉽다 한다.
마음속의 갈등으로는 춘실이는 독신이니까 장래를 많이 고려하는것이고 배우자에 대한 눈은 높지 않고 그저 자기의 마음을 리해할수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단다.
심연은 일본에 온지도 15년이 되는데 일본사람들이 조선족을 몽땅 중국인으로 보는것이 안타깝고 전령은 사업과 자녀교육에서 어느쪽을 택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많단다. 회사를 접자니 고생을 참아내며 지나온 경력이 아깝다면서.
담임교원에 대한 춘실의 회포가 인상적이였다.
ㅡ담임교원이였던 김채월선생님이 너무 엄해 무서웠다. 선생님이 좋았는데 친하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보면 감정적으로 교류했더라면 좋았었는데 말이다.
ㅡ그때 부분 교육방식이 틀렸다는 생각은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엄하니까 반항하고 선생님은 아무리 엄하다고 해도 학생들에게 말을 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면으로는 그래도 그만큼 엄한 교육을 받았기에 오늘이 있게 되였다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했다.
풍성한 대화는 《나는 누구네 부모가 일본에 왔다면 가장 기쁘다》는 심연의 말로 마감을 하였다.
대화란 마음으로 하는 려행이다. 이들의 대화는 그들이 현실적인 태도로 파행(爬行)하는 생활의 일부였다. 그들에게서 들은것은 바로 마음이였다.
40세를 맞는 녀성들과의 만남은 매력적인 만남이였다.
《남자는 집을 짓고 녀자는 가정을 짓는다.》,《남자는 태여나고 녀자는 창조된다.》
그래서 필자는 이들에게 가정을 짓는데 도움이 될가 아니면 창조적인 녀성이 되기에 도움이 될가하여 고승법륜의 말로 이 글을 마감한다.
결혼후 집안이 편안하려면 첫째는 안해와 남편, 둘째는 부모, 셋째는 자식이다. 남편이나 안해보다 부모를 우선하면 안된다. 서로에게 충실하는 부부는 량가 부모에게도 잘 하니깐. / 오기활
전령의 아버지 전영춘(67세), 어머니 송순희 (6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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