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최첨단 전자의료기기 생산, 대중 건강증진에 크게 이바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4월10일 10시55분    조회:1184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남룡
- 북경동화원의료설비유한책임공사 남룡 리사장을 적는다
 
 



아인슈타인은 “천재”, 마더테라사는 “사랑”, 메릴린 먼 로는 “섹시”…그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바로 그들의 이미 지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남룡의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것 이 있다면 바로 “대중의 건강증진 기여” 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가.
얼마전 회사의 주식 상장을 준비하고 있던 남룡 리사장은 바쁜 와중에 필자의 취재를 흔쾌히 응했다. 남룡 리사장은 “동화원의료기기”란 브랜드가 적혀 있는 근무복 차림으로 반 갑게 맞아주었다.
너무나 익숙한 근무복 차림, 수년간 여러 매체에서 자주 보아왔던 모습 그대로다. 이러한 남룡 리사장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자기의 기업에 애착을 갖는지, 그의 브랜드 의식을 읽을수 있었다.
그날 남룡 리사장의 취학의 길, 창업의 길, “동화원”이란 브랜드를 만들어 키워가는 20년을 더듬는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사업가 기질”


아버지는 객차공장의 고급기술자, 어머니는 재봉사로 일 하는 그의 가정은 중산계층에 속했다. 집이 길림성 연길시의 서시장 부근이였는데 어머니는 재봉 일을 하시면서 가정 경 제에 큰 보탬을 주셨다. 남룡 리사장은 “저의 경제 관념은 대 부분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것입니다.” 하고 말한다.
어머니는 80년대 말 한국에 갔을 때 남들처럼 한국친척 들이 싸주는 옷보따리가 아니라 한복에 붙이는 금박과 “쌍희” 자를 사가지고 돌아오셨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재봉한 한복 은 서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90년대 초에 그의 어머니는 부동산 시장에 뛰여들어 이미 연길에 집 세채를 마 련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83세의 고령에 북경에 사는 아들 남룡 리사장 집에 왔을 때도 “이렇게 손놓고 있을수 없다”면 서 무슨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서둘렀다고 한다.
남룡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하면 서 리공과가 취미였다. 그런데 직장에서 일하면서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틈시간 공부를 할 수 있는 문과 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독립을 꿈꾸던 그는 대학 입학지원 서를 제출할 때 “대학은 집에서 멀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지 원서에 몽땅 타지방 대학을 써넣었다. 어느날 남방도시 광주 에 위치한 중산대학 일본어학부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부모님은 멀리 떠나는 자식을 두고 걱정이 태산같았다.“ 귀 한 자식일수록 멀리 보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걱정 붙 들어 매세요.” 남룡은 이런 말로 부모님을 위로하고는 하루 가 급하게 학교로 떠났다.
시골이나 다름없던 연변에서 개혁개방 분위기가 물씬한 광주로 온 남룡은 새로운 환경이 금시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이나 예전이나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숙사는 늘 시클벅 적하다 . 그때 그의 곁방에 산두에서 온 친구가 들어있었는데 가정형편이 괜찮은지 나팔이 6개 달린 록음기를 갖고 있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샀다. 남룡은 대학 첫 방학에 집으 로 돌아갈 때 그 친구한테서 270원을 주고 록음기를 사서 가 져갔다 . 그때까지만 해도 연길에는 나팔 6개 달린 록음기를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방학동안 친구들이 모여서 아직 금지곡이던 등려군의 노 래를 들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배운 디스코를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록음기를 어찌나 쾅쾅 틀어놓고 디스코 를 추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쿵쿵 굴렀는지 방구들장이 내 려앉는 바람에 식구들이 고생을 했지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개학해 학교로 돌아갈 때 고향의 한 친구가 그 록음기를 욕심내서 320원을 받고 되넘겼다. 이렇게 50원을 번 남룡 은 광주로 돌아갈 때 침대표를 사서 편안하게 누워갔다. “이 것이 저의 첫 장사였지요. 자기가 번 돈을 의미있게 쓰는 재 미가 너무 쏠쏠했습니다. 허허...”
 
요즘 먹고 살려면 적어도 두개의 비밀무기가 있어야지

졸업 후 북경 북방공업대학 일본어학원에 배치 받은 남룡 은 좀처럼 마음을 붙일수 없었다. 대학 4년간 개혁개방의 전 초기지인 광주에서 생활해오면서 남방의 경제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그는 서둘러 심수로 전근할 준비를 한 다 .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대외경제무역부 산하기관인 중 국 오금광산수출입총공사 본사에 입사하게 되였다. 이 기업은 도합 14개 부서를 둔 대형 국영기업이였다. 남룡은 가장 중요한 부서인 철강수입부서에서 2년간 근무하였다.
“저는 일본어를 전공한 실력을 갖고 입사했지만 단순히 번역이나 통역 업무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어는 어디까지 나 소통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저는 수출입 회사의 전문 인재로 성장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선배들에게 전문지식을 배우고 수출입에 관련된 서 적을 열심히 읽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1년에 약 40여억 딸라의 철강을 수입했는데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였다. 남룡은 1년에 두 차 례씩 진행되는 중일철강공동회의에 참가하여 통역 임무를 맡는 외에 업무에서도 한몫 톡톡히 해내면서 실력을 다졌다. 그의 업무 능력에 상사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88 년 11월 어느날, 그는 홀연히 철밥통을 버리고 일본 으로 떠나 어느 무역회사 판매부장으로 취직하였다. 그때 그 의 월급은 이미 50만 일화(4000여 딸라)에 달했다.
“저는 그때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과의 무 역에서도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으로서 량국간 무역은 제 3국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남룡은 한국시장을 개척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호텔 객실에서 전화를 걸면 비 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것을 발견하고 공중전화에서 전화번 호부를 뒤져가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련결되 기 바쁘게 이렇게 서두를 뗐다.
“안녕하십니까 ? 저는 중국에서 온 남룡이라고 합니다. 사 장님 기업의 제품을 중국에 수출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혹 시 수입할 제품은요?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거절도 숱하게 당했지만 주문량도 날로 늘어났다. 그때 부산에 있는 윤씨 사장한테도 이와같은 전화를 걸었으며 그 사장과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노력은 쌓은 만큼 이어진다. 마침내 한국과의 무역통로가 열렸다 . 때는 1988년 말, 중국 대련항에서 실은 내화재료 는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부산항까지 운반되였다. 그 과정은 3~4개월이나 걸렸지만 그는 자본축적을 차곡차곡 할수 있 었다.
1991 년, 3년간 일본회사의 판매부장의 신분으로 3국을 날아다니다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자신의 첫 회사를 설립하 였다 . 자본금은 300만 일화(2.4만여 딸라), 첫해 그의 무역 회사는 돈낱가리에 올랐다. 그의 회사는 중국인 최초로 중일 한 3국 무역을 진행한 회사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경 에는 100만 부자가 흔치 않았지만 남룡은 그때 이미 2천만 원의 자산을 가진 부자였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잘 하는것만으로는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언어는 소통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학 실력 외에 다른 비밀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언어를 도구로 무역에 서 돈벌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룡은 젊은 후배들에게 반드시 기술과 업무를 열심히 닦으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수입하여 판매하다 직접 생산하여 판매


“저는 무역에서 돈을 벌면서도 무역은 뿌리가 없는 사업 이라고 늘 생각하였습니다. 손에 쥔 자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그 돈을 종자돈으로 실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특급선불이란 우혜정책을 향수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일본 무역회사 는 마진이 크게 남지 않았다.
남룡은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시장을 장악할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바로 브랜드의 힘을 지닌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소유하는것이라는 인식을 날로 굳혔다. 뭘 할수 있을가. 그는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아다녔다.
1993년에 우연히 한국에서 약탕기를 본 남룡은 중국의 어마어마하게 큰 중의학시장을 노리고 시장조사에 나섰다. 그때까지 중약계 유명기업인 동인당은 보일러로 약을 달이 고 환자에게 약을 유리병에 담아주는 상황이였다. 환자는 그 약을 먹은 후 유리병을 다시 반환해야 했다. 중일우호병원 을 찾아갔을 때는 약 달이는 보일러실은 뜬김으로 꽉 차 있었다 . 역시 보일러로 약을 달이고 있었다. 그는 북경 동인당약국 , 중일우호병원, 협화병원 등 큰 약국과 병원에 찾아가 약 탕기를 설명했지만 제품을 리해하지 못하고 반응이 미약했다.
그는 잠시 약탕기를 한쪽에 밀어두고 계속하여 중금속 업 무를 추진하였다. 그가 만든 첫 실체가 바로 1994년 하북성 장가구에서 고고성을 울린 동화화학공업광산개발이다. 그 이듬해는 산서성 양천에 동화제련회사를 설립해 금속규소 를 해외에 수출했다.
1997 년 1월, 우연히 연길에서 온 친구가 머무는 려관방을 찾아갔다가 3년전에 자신이 하려던 포장된 중약봉지를 보았다. 연길의 일부 약국에서 이미 한국 약탕기를 사용하 고 있다는것을 알게 된 남룡은 하던 일을 제쳐놓고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약탕기 12대를 수입한 뒤 호남중의병원에 한꺼번에 10대를 팔았다. 그때로부터 수년간 남룡은 한 국에서 약탕기와 탕약포장기계를 수입하면서 시장을 넓혔다.
2000년, 독자지적재산권이 있는 중약 탕약기를 연구개 발하기 시작하여 2000만원의 자금으로 동화원의료기기유 한회사를 설립하고 “동화원”이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남들은 수입제를 선호할 때 그는 국산 “동화원( 东华源 )” 브랜드를 붙여 들어왔다. 수입상품에 자신의 브랜드를 붙 여넣고 고객들에게 차근차근 알린것이다. 이런 작전은 향후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2년 후에는 중관촌 하이테크 산업개발구 창평원에 중국 최대의 현대화 탕약기 제조기지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어 서 30여 개 분회사와 사무소를 가진 그룹으로 성장한 동화 원은 의료설비와 화공제품의 연구개발, 제조, 판매 그리고 국제무역을 하는 기업으로 중국 최대규모의 탕약기 생산기 지로 성장했다.
현재 북경동화원은 국내 시장점유률을 70%이상 점하고 있으며 업계 선두기업으로 국내외 과학연구기관, 병원, 진 료소 , 약상점 등 4만여 호의 단골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현 재 기업의 년간 매출액은 4억원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수치 에 이른다.
동화원은 연구개발에 거금을 투자하여 현재 100여 명의 공정사를 두고 있다. 이런 지속적인 연구개발에 힘을 입어 선후로 30개의 특허를 획득했고 약탕기포장설비 9개 계렬 제품을 출시했다. 동화원이 자체로 연구개발한 “10가지 기 능을 겸비한 자동약탕기”는 중국 중의약 약탕설비의 생산판매 령역에서 최고 브랜드칭호를 수여받았다.
 
약탕기 회사에서 의료기종합메이커로 발전
동화원에서 생산하는것은 단지 약탕기에 그치는것이 아니다 . 7~8년 전부터 전자동 혈압기와 자동신장계, 체성분 분석기, 골밀도측정기, 스트레스분석기, 중의체질판별기 등을 비롯한 전자의료기기를 연구개발하여 생산판매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올해 초에는 6층 규모로 최신식 설비를 갖춘 연구개발센터(신사옥)를 준공하 였다. 100여 명의 기술연구원들은 이곳에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신제품 개발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동화원은 올해 “건강소옥(健康小屋)”을 보급하는 사업에 가장 큰 력점을 두고 있다. 건강검진용 의료기기를 서로 련계하여 체계적으로 건강을 관리해 주는 “건강소옥” 을 전국적으로 전파하려는것이다.
“건강소옥”은 무료로 대중의 건강을 효률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2010년부터 시작하여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중국전신에서 임직원 및 고객을 대상으로 건강관리 서비스 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는데 동화원이 최초의 시범 모델로 선정되였다. 올해에만 약 5,000 개의 “동화원 건강소옥” 을 전국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건강소옥” 5,000 개면 10~20 억 원의 매출을 올릴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동화원은 중의약에 바탕을 둔 약탕기로 시작했지만 이제 는 다양한 의료기기를 연구개발하여 생산하는 “의료기종합 메이커”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 약탕기를 보급하 여 중의약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남룡 리사장은 이제 최첨단 전자의료기기 및 이를 련계한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개발하 고 생산함으로써 대중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고 있는것이다. 그는 중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의 의료기기 회사로 키우 는 게 꿈이라고 한다.
취재를 끝내면서 공장부지를 돌아보았다.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게 들어앉은 공장건물, 거기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생산 작업장 , 취재팀을 인식하지 않고 각자 자기 일에 몰 두하는 직원들, 그들과 똑같은 “동화원의료기기”란 브랜드가 새긴 근무복을 입고 그들과 생산과정을 점검하는 남룡 리사장… 귀로에서 문뜩 어디서 본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닌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브랜드 시대다.”
“동화원”과 남룡 리사장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일부 사진은 동화원의료기기회사에서 제공했음.) ▣  


글 /서정옥, 사진 /박복선 김향덕
<<중국민족>> 2015. 2
 

파일 [ 4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60
  • 진달래랭면 총경리 허미화 향후에도 서비스업으로 성공할터 청도시성양구에는 많은 한식점과 조선족음식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은 택시기사들마저 알아주는 명소로 되였다. 길림성돈화시 역전 앞에서 랭면집을 경영했던 엄마 지부전의 영향으로 허미화(79년생)총경리는 어려서부터 음식업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였...
  • 2011-11-01
  • [길림신문 2011-10-28  장춘영 기자]  조선족의 전통복식문화를 리드해가는 연길시성월민족복장공장 공장장 최월옥 최월옥(崔月玉)프로필 1947년 8월 룡정 동불사 출생 1967년-1984년 룡정현 동불사진 동불남촌 부녀대장, 부녀주임 1984년-1990년 연길시서시장 개체호, 북청당지부 선전위원 1991년-현재 연길시...
  • 2011-10-28
  • 세계경제인대회 준비하는 옥타 말레이시아 지회     “동남아의 허브인 말레이시아는 특성상 컨벤션이 자주 열리는 편이죠. 하지만 이번처럼 규모가 큰 행사는 처음이예요.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관심들이 아주 높습니다” 이순구 말레이시아 지회장은 세계경제인대회 준비가 한창인 지난 28일 재외동포...
  • 2011-10-17
  • [흑룡강신문사 2011-10-13 길림성특파원 윤운걸]   -중국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회장 김순옥을 찾아서 김순옥(金顺玉)프로필       1980년 7월-1984년 9월 연변대학 법률학부 법학사 1984년 7월-1986년 9월 상해 화동정법대학원 헌법학 전공 1984년 7월-2003년 2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법...
  • 2011-10-14
  • -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련합회 김순자리사장을 만나 [길림신문 2011-10-11 장춘영 기자]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련합회 김순자리사장 한민족녀성경제인들의 위상을 세계적차원으로 부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고있는 조선족녀성기업인이 있다. 그가 바로 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련합회의 김순자리사...
  • 2011-10-11
  • [길림신문 2011-10-09 전춘봉 기자]○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책임회사 최기옥리사장을 만나 연변의 수부 연길시 도심에 자리잡은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책임회사(이하 진달래회사로 략칭)는 2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음식업계의 굴지 기업으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하다.특히 이 회사의 브랜드 음식인 《진달래 랭면》은...
  • 2011-10-10
  • [인터넷료녕신문 2011-09-27 리덕권 기자]  흑룡강성 오상시 시골출신인 최영복(1953년 생)씨는 자신의 총명과 지혜, 그리고 특수인연으로 자기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다.   1970년 초중도 마치지 못하고 귀향한채 호미자루를 잡았던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생산대의 출납, 기공원, 회계에서 공청단 서기직을...
  • 2011-10-08
  • 재한조선족 상인 김영복사장의 이야기   (흑룡강신문=서울 2011-09-01)라춘봉 특파원=“재한 조선족들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염가의 노동력을 판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 내려 있지만 특유의 센스와 지혜로 성공적인 상인으로 주목 받는 조선족들이 늘고 있다. 한국에서 음식점, ...
  • 2011-09-01
  • 조선족출신의, 하나은행 구로동 지점의 김순연대리가 중국인전용창구를 전담하며 최선을 다해 실적을 높인데서 은행 내부는 물론, 중국인(동포포함)고객들의 칭찬을 자자히 받고 있다. 중국 흑룡강 할빈 출생인 김순연 대리는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에 부로를 따라 모국에 온 후 2004년에 하나은...
  • 2011-08-31
  • [료녕조선문보 2011-08-23 김창영 기자] 참다운 인맥으로 쌓아올린 성공의 금자탑 료녕성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오광훈리사장을 만나본다 오광훈리사장 오광훈(吴光勋) 프로필 1969년 1월 13일 철령시 출생 1987년 9월-1991년 7월 대련리공대학 1991년 10월-1996년 8월 철령시 은주구민정국 1996년 8월-1997년 4월 ...
  • 2011-08-2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