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련민족학원 제1임 원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1월29일 21시53분    조회:854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도

[백년백인 97]개척자의 발자취
—대련민족학원 제1임 원장 김도

전임 원장 김도, 56개 민족을 대표하는 의미로 56개 기둥을 세워놓은 대련민족학원 대문앞에서

백산수력발전소 건설, 제1자동차 공장확건, 기구개혁, 대학건설…김도는 어데 가서나 개척자로 《불모지》를 《삼림이 우거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락원》으로 만드는 실력파로 손색이 없다.

지난 1월 7일, 대련민족학원 제1임 원장인 김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는 사심 없고 겸손하며 끈질기고 대범하며 패기 있고 실력 있는 지도자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175센치메터  잘 되는 키, 약간 불그스름한 얼굴, 70여세 고령이지만 정력이 왕성하고 자태가 름름했다. 외모와는 달리 그의 말소리는 낮으면서도 약간 석쉼했다.

길림성 통화현 대천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대련공학원(지금의 대련리공대학) 수리학부(水利系)를 졸업한 김도는 동북지역의 최대 수력발전소이며 세계 최대 지하발전소로 불리우는 백산수력발전소의 개척자였다. 기술원에서 과장, 국장에 이르기까지 김도는 밤낮 이어가며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척척 일을 해나갔다. 그가 이끈 백산수력발전소는 전국 수력발전소가운데서 년생산량이 가장 많은 기록을 따냈다. 중국수리전력 1국 국장으로 있다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은 기간 김도는 민족사무위원회의 사업직능을 전 성에 알렸고 정식 비준을 받고 취체될번한 동북민족학원을 대련민족학원으로 개칭하고 간판을 걸었다. 그는 40명 교직원들을 이끌고 22일동안 밤낮 교대하면서 길을  닦고 나무를 심고 해서 제1기 학생 103명을 맞이하였다. 21년 사이 대련민족학원은 1만 7000명 되는 학생, 1300여명 되는 교직원, 51개 학과, 3분의 1 되는 학과의 입학점수선이 중점대학점수선에 도달하는 대학으로 되였다. 그리고 련속 11년동안 1차성 취업률이 90% 이상 되는 전국 50개 대학가운데의 하나로 발전했다.

13년의 간고한 로정 거쳐 대련민족학원 간판 걸다

1993년 8월 23일, 김도는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다가 동북민족학원 원장으로 대련에 갔다.

동북민족학원, 지금의 대련민족학원 설립을 위해 관련 부문에서는 1984년부터 주비사업에 들어갔다. 김도원장이 대련에 갔을 때는 건물 4개가 큰 물구뎅이와 옥수수대, 과수나무에 둘러싸여 외롭게 서있었다. 길조차 없는 학교였다. 교직원들도 실망한채 뿔뿔이 헤여져 40명만 남아있었다. 김도는 41호로 원장 겸 당위 부서기, 주비소조 조장으로 학교문에 들어섰다.

리공과를 위주로 3600명 학생에 매년 500만원, 5년 사이 2500만원을 투입하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관할하의 학교로 건설하는것이 당시의 계획이였다. 1993년 정식 비준을 받지 못한채 중앙민족대학의 이름으로 첫기 단과학생을 모집했다. 회계와 재무관리 두개 학과에 103명 학생이 모집됐다.

그런데 개학이 막 다가오는데 학교대문 맞은켠에는 큰 물구뎅이가 가로막혀있고 그옆에는 목공장, 옥수수대, 과수나무들이 학교울안을 메웠고 길이란 좁은 흙길밖에 없었다. 비가 오면 학생숙사에서 식당까지 흙탕물을 튕기면서 가야 하는 형편이였다.

김원장은 9월 15일에 개학하기로 미루고 두가지 확고부동한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하든 길이 통하게 해야 하고 길 량켠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 그리고는 40명 교직원들과 함께 3개 팀을 무어 밤낮 교대하며 길닦기에 나섰다. 백산수력발전소의 개척자로서 모르는것이 없는 그는 길닦기부터 나무심기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계획을 짜고 점검하면서 지휘했다. 일부 사람들은 8, 9월에 심는 나무는 살기 힘들다고 반대해나섰으나 김원장은 두사람씩 무어 나무심기를 시키고 누가 나무를 심으면 카드에 이름을 써서는 나무에 걸어놓고 책임지게 했다. 오동나무를 심었는데 매일 물을 준 덕에 활착률이 85% 이상 되였다.

그해 김원장은 옥수수밭을 밀고 103명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회까지 치렀다.

《1994년부터 본과생을 모집하게 되고 1996년에는 이미 여러 개 학과를 더 설치했다. 그때까지 동북민족학원은 정식 비준을 받지 못하고 중앙민족대학의 양성기지역할만 했을뿐이다. 당시 국무원에서는 새로 대학교를 건설하지 못한다고 규정을 내렸으며 동북민족학원을 기술학원으로 하지 않으면 다른 학교와 합병할것을 건의했다. 학교건립과 관련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조사조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학생들은 <우리는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한거지 기술학원에 다니러 온것이 아니다. 북경에 돌려보내달라>며 수업을 거부하고 식당에도 가지 않았다.》 여기까지 말하는 김원장은 후~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힘들었다. 정식 비준을 받으려고 북경 등지로 뛰여다니는 기간 자금이 딸려 한번도 침대표를 떼본적이 없고 류숙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지하초대소에 정했다.》

학생들이 수업을 거절하자 김원장은 교원들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찾아 담화하고 한개 반급 한개 반급씩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힘들고 속이 타 입이 다 터졌다 한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조사조는 학교의 상황을 보고 아예 학교건립을 포기하라며 물러섰다. 1997년 봄, 교육부의 한 책임자가 곤명에서 회의를 한다는 소식을 알고 김원장은 기타 2명 책임자를 거느리고 곤명으로 떠났다.

《동북민족학원을 건립해야 하는 10가지 원인을 말했는데 그 책임자는 10가지 원인중에 3가지가 들을만하다고 했다. 하나는 소수민족학생을 위주로 모집한다. 당시 우리 학교의 소수민족학생이 90% 되였는데 다른 학교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교육, 전통교육을 위주로 하고 더우기는 소수민족간부를 양성하는데 모를 박는다. 그 다음은 소수민족들의 교육기초가 보다 락후하고 교육수준도 각이하다. 사람에 따라 가르치며 예과반(预科班)을 꾸려 부동한 민족, 부동한 교육수준에 따라 교수를 진행한다. 한어를 모르면 한어반을 꾸려 한어수준을 높이려 한다. 그후 정식 비준을 받았고 지역을 벗어난 이름이 아닌 소속지의 이름으로 학교를 건립하라는 교육부의 지시대로 1997년 9월에 대련민족학원이란 간판을 걸게 되였다.》 어려웠던 그때 그날을 되새기는 김원장이다.  

1984년에 주비조를 구성해서부터 간판을 걸기까지 장장 1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민족심이 없고 끈질긴 사업태도가 없었더라면 성공하기 힘들었을것이다.

전국 본과대학서 처음 후근사업 사회화관리에로 개혁

1993년 학생은 모집했지만 자금이 부족한것이 가장 큰 곤난으로 되였다.

1995년 김원장은 중국 본과대학가운데서 제일 처음으로 후근사업을 사회화관리하도록 개혁한 대학교 지도자였다. 그 이듬해 전국 대학교후근사업 사회화관리회의가 상해에서 열렸고 수년후에야 일부 대학에서 후근사업을 사회화관리에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학생숙사, 학생식당, 목욕탕 그리고 교정록화 등을 사회에서 건설하고 사회에서 경영하게 했으며 학교 후근인원은 11명만 남겼다. 그러나 이 사업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공상국, 세무소 등의 인원들이 매일이다싶이 김원장을 찾아와 세금을 내라고 야단이였다.

김원장은 관련된 문건이 있으면 내놓으라며 억지로 이들을 몰아내군 했다. 나중에 이들을 대학문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학교 보안일군에게 지시해서야 잠잠해졌다. 김원장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경영이기에 세금을 내고나면 남는것이 없고 그러면 맡을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다음 후근에 투자할 자금을 교원초빙과 학생모집에 투입하였다. 수준 높은 교원을 초빙하려면 교원들의 대우를 높여줘야 했다. 그때만 하여도 대학교 교원들의 주택문제가 큰 문제로 되였다. 1994년 김원장은 200채 주택을 짓고 대학을 갓 졸업한 교원과 조리강사에게는 66평방메터 되는 주택을 주고 강사와 석사졸업생들에게는 83평방메터, 교수들에게는 92평방메터 되는 주택을 주기로 했다. 결과 기타 대학교의 많은 우수한 교원들과 석사졸업생, 박사졸업생들이 민족학원에 몰려들었다.

김원장은 또 해마다 1000만원을 들여 교원들을 장려해주고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썼다. 그는 기타 대학교들에서는 12명이서 한 숙사에 드는 상황에서 대련민족학원에서는 4명이 한숙사에 들게 하고 기타 시설건설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대련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졌다. 《 대련리공대학에서 공부하고 대련민족학원에서 류숙하며 대련해사대학에서 먹고 대련외국어대학에서 멋부린다(学在理工,住在民院,吃在海事,美在大外).》

후근사업의 사회화관리를 토대로 대련민족학원은 건립시간이 짧은 대신 발전수준이 가장 빠른 대학교중의 하나로 되였다.

1993년 9월, 김도원장이 40명 교직원들과 함께 밤샘작업을 하며 닦아놓은 교정내의 길을 걷고있는 김도, 정옥선 부부

전 성 민족년 행사로 민족사무위원회 지위 향상

1990년 8월, 김도는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김도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민족사무위원회 직능을 잘 몰랐다. 민정청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어 전화를 받을 때《民委》를 《门卫》로 알고있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민족사무위원회의 직능을 전 성에 알리는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김도는 《전 성 민족년 선전활동》을 벌였다. 민족이란 무엇이고 민족사업이란 무엇이며 민족정책 또한 무엇인가를 주요내용으로 했다.

점수제를 실시하고 장려, 처벌 제도를 명확히 했으며 《길림일보》에 민족특별란을 설치하여 1주일에 한번씩 신문에 내도록 했다. 기타 지역에서도 선전활동을 《연변일보》 등 지역신문에 내도록 했다. 기세 높은 선전활동을 진행해서 1년만에 사회 각 계층에서는 민족사무위원회의 직능을 알게 되였고 따라서 민족사무위원회의 지위도 크게 높아졌다.

1990년 8월부터 1993년 8월까지 김도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 있은 기간 제 1회 길림성 소수민족문예공연이 있었고 1993년 8월 29일에는 제 1회 길림성소수민족운동회가 치러졌다. 운동회를 치르기전인 8월 23일 김도는 동북민족학원 원장으로 이미 대련으로 떠났다. 그래서 그번  운동회를《신랑없는 잔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원장이 민족사무위원회에 갔을 때는 사무실이란 작고 볼품없었으며 관련 설비도 낡고 회의실도 없었다. 그는 방치해둔 창고를 수건해서 회의실을 만들고 설비도 개선했다. 그때 전 성 현, 시 민족사무위원회(지금은 현급을 민족종교국이라 함)가운데 연변에 소형뻐스 한대, 사평에 낡은 승용차 한대가 있은외 다른 곳에는 아무 교통도구도 없었다. 회의에 참가하려면 뻐스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갔는데 어떤 때는 회의장소에 도착하면 회의가 끝날 때도 있었다.

김도는 길림성민위에서 차값의 절반을 내고 당지 정부에서 절반씩 지원하는 형식으로 시급민위는 승용차를, 현급은 찦를 갖추게 했다. 1991년, 1992년 사이 3분의 2 되는 현, 시 민족사무위원회의 교통도구가 해결됐다.

당시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산하의 민족간부학교 교장으로 있은 주재헌은 이런 말을 한다. 《김도주임이 민위에 왔을 때 민족간부학교는 부대 집을 세맡고 간부양성반을 꾸렸습니다. 김주임이 한명한명 관련 책임자들을 찾아 싸인받고 지어 외지에 있는 책임자들을 찾아가 싸인받으면서 뛰여다닌데서 지금의 민족간부학교를 마련하게 되였습니다. 그는 대공무사한 간부입니다. 안해가 수차 병원에 입원해도 누구도 알리지 않았고 급별보다 낮은 주택을 분배해도 아무 말씀 하지 않았으며  언제 한번 크게 먹고 마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민족간부학교 건설과 교원대오 건설, 교수관리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부었습니다. 김원장이 민위에 전근한지 1년이 다 되였는데도 그의 안해는 사업터를 배치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김주임은 상급 해당 부문에 한번도 요구를 제기한적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민위 산하의 한 간부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알선한데서 그의 안해의 사업터가 해결되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영국에서 석사공부를 마치고 대련민족학원 교원초빙시험에 응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다른 응시자들과 같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고 누구인지를 모르게 하는 상황에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아들은 1등이란 성적으로 초빙되였습니다. 가정과 자기한테 엄격한 김주임은 언제 한번 집안일때문에 사업에 영향을 끼친적이 없습니다.》

민위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김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대부분 소수민족지역이 편벽하고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으므로 경제발전이 더디다. 민족사업을 잘하려면 우선 민족사업을 사랑해야 하며 강한 민족감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진정으로 소수민족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고 소수민족의 실제 곤난을 해결할수 있다. 전고르로스몽골족자치현에 갔을 때이다. 차간화진의 한 간부가 몽골족민요를 수집하려는데 자금이 없어 곤난을 받는다고 했다. 얼마나 수요하는가는 물음에 그 간부는 5000원만 있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솔직하고 검소한가. 나는 만원을 조달하여 그 항목을 진행하도록 했다.》

백산수력발전소의 공신

1984년 백산수력발전소 건설 로동자들과 함께

1968년 대련공학원(지금의 대련리공대학)수리학부를 졸업한 김도는 수리전력부 제1공정국(지금의 중국수리전력 1국)에 배치받았다. 과장, 처장, 부국장, 대리국장, 국장으로 있는 기간 김도는 환인수력발전소, 회룡산수력발전소, 백산수력발전소, 홍석발전소 건설에 참가하였으며 풍만수력발전소 땜보강공사와 제1자동차공장 확건공사 등에도 참가하였다.

백산수력발전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발전소로서 국가중점공사항목이다. 백산수력발전소 공사가 예기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전반 국가계획을 완성하지 못하는 셈이 된다.

먹을것이 부족하고 땔것이 없는데다 심심산골이고 집도 간이집이여서 여간 춥지가 않았다. 땅땅 얼어붙은 배추를 먹었고 모래가 섞인 옥수수가루를 먹었다. 새벽 3시가 좀 넘으면 산 두개를 넘어서 땔나무를 해와야 했다.

그때는 규정된 출퇴근시간이 없이 아침 5시전에 공사장에 나가고 밤 10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온종일 공사현장에 있다보니 김도는 발파구멍이 몇개 뚫렸는지도 손금보듯 잘 알고있었다. 어느 한번은 기술원이 시공현장을 점검하고 김도한테 자료를 보내왔는데 김도는 발파구멍수량이 틀렸다며 다시 점검할것을 지시했다. 아니나다를가 김도의 머리속에 있는 수자와 딱 맞아떨어졌다.

김도에 따르면 명절전에 전기를 다그쳐 발전해야 할 때면 집에도 가지 못하고 공사장에 붙어있어야 한다. 한달동안 현장에 있을 때도 있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흙탕물에 막 주저앉아 잠 잘 때도 있었다. 1983년 김도가 부국장으로 임명된 그해 말 백산수력발전소는 발전에 성공하여 예정된 목표에 도달했다.

1984년 백산수력발전소는 1년 사이에 1대에 30만키로와트 되는 발전설비세트를 2대 가설, 전국의 최고기록을 따내 수리전력부의 10대 뉴스중의 하나로 되였다. 백산수력발전소를 건설할 때 호요방, 리덕생, 호계립, 리붕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방문도 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저녁 늦게 들어서지 않으면 아예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나어린 둘째딸이 잠겨진 문을 열어달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여기는 려관이 아닙니다. 문을 열어드릴수 없어요!>라고 해 어른들을 당황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백산수력발전소에 있는 22년동안 남편은 한번도 집식구들과 같이 음력설을 쇠본적이 없습니다.》 김도의 안해 정옥선이 한마디 한다.

물과 겨룬 풍만수력발전소 땜보강(加固)공사

2005년 풍만수력발전소를 다시 찾은 김도

길림시의 풍만수력발전소를 일본인이 건설했다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건설 당시 근로자들이 고의적으로 설계에 따라 하지 않아 물이 많이 샜다 한다.

1989년 겨울 중국수리전력 1국에서 풍만수력발전소 땜보강공사를 맡게 되였다. 물이 적을 때인 겨울철에 시공해서 홍수가 오기전에 공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김도국장은 2000여명 로동자들을 거느리고 겨울철부터 시공준비에 나섰다. 땜내의 물을 모두 뺀후에 시공할수 있기에 물이 적은 겨울철에 한다는것이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눈이 녹아 물이 붇기 시작하고 수위가 쑥쑥 올라갔다. 《풍만수력발전소 땜보강은 정말 간고한 공사였다. 3일에 한번씩 국무원에 보고해야 하고 물수위와 시공위치거리를 50센치메터 사이두고 일했는데 우리는 물우에서 작업했다. 얼마만큼 땜을 보강해놓으면 인차 그뒤를 따라오는 물, 물과의 싸움이고 물과의 경주였다. 만일 홍수가 오기전에 땜보강을 마무리하지 못한다면 길림시, 할빈시가 물에 잠기는 어마어마한 판국이다. 그때면 나는 감옥살이 신세가 된다. 제시간에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할가 속이 바질바질 타는데 길림시공안부문의 호출장이 날아왔다. 력청연기가 나무를 죽인다는것이다》, 《시간앞에서 달려야 하는 상황인데 콩크리트믹서(混凝土搅拌机)를 중지해야 했다. 바로 길림시당위 서기를 찾아가자 그는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더니 한바탕 꾸짖고나서 시공측의 요구대로 만족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도 그럴것이 만일 제때에 시공을 마치지 못한다면 길림시에서 책임져야 하기때문이다.》

김도원장은 긴장했던 그때 시공상황을 얘기하면서 흥분에 잠겨있었다. 1989년초에 시작해서 홍수가 오기전까지 상반기에 모든 시공을 끝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그다.

1968년 12월부터 1990년 8월까지 중국수리전력 1국에 있는 22년동안 그가 참가한 수많은 공사중에 그는 백산수력발전소 건설, 풍만수력발전소 땜보강 건설과 홍석수력발전소 건설, 제1자동차공장 확건을 손꼽아 자랑했다. 그는 홍석수력발전소 건설은 3000명 인원을 적게 사용하고 주기가 짧고 투자가 적고 효과성이 높은 공사였다면서 《우리 나라 중형수력발전소의 쾌속시공을 위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 당중앙, 국무원의 표창을 받았다》고 말한다.

기관간부 3232명, 파격적인 기구개혁

1986년 김도는 대리국장으로 있다가 국장으로 되였다. 1985년부터 일기 시작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에로의 개혁의 물결이 중국수리전력 1국에도 몰아쳤다. 그러나 종업원들은 《지난 세기 60년대의 3년 곤난시기때처럼 허리띠를 졸라매고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고 밥 먹지 못할 정도이면 북경에서 가만있지 않을것》이라 했다.

그런데 김도가 국장자리에 앉아서 얼마 안돼 국가에서 중국수리전력 1국에 조달한 공사투자금이 3000만원밖에 안되였다. 5000만원이나 부족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수리전력 1국이 들끓었다. 1만 7000명 종업원에 1만 8000명이나 되는 가족들의 먹는 문제가 코앞에 와닿았다.

김도는 성공과 패배의 관건이 내부건설에 있다며 개혁을 하면 출로가 있고 효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사위주, 다각경영, 수력발전과 화력발전 병행, 입찰경쟁》 방침을 실시하고 시공대오를 조절하고 기구를 간소화하며 권리를 풀어주고 층층이 도급맡으며 리익에 따라 봉급을 주는 개혁방안을 내놓았다.

얼마 안 지나 영구, 료양의 수원공정계약서와 흑룡강도산저수지콩크리트공사,백성장산열전력공장 확건공사, 180메터 되는 굴뚝건설 등 공사계약서가 들어왔다. 그후 토목건축에만 10억원이 넘는 제1자동차공장 확건공사도 이들 앞에 놓여졌다. 여러 개 되는 대형시공회사에서 자동차공장 확건에 눈독을 들였지만 실력이 안돼 물러서는 바람에 실력이 튼튼하고 설비가 선진적인 중국수리전력 1국한테 기회가 주어졌다.

공장건설을 해보지 못했지만 김도는 제1자동차공장 확건공사는 전국 중점공사이고 세인들의 눈길을 끄는 공사이며 기업영향면을 확대시키는 공사라며 《경쟁년대에 모험이 없으면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제1자동차공장측은 1국의 패기 있는 결정에 매혹되여 인츰 고찰대를 파견했고 김도는 4000명 대오를 거느리고 장춘에 입주했다. 주조차간공사만도 24개월 걸려야 하는데 김도는 자동차공장측의 요구대로 9개월동안 완성했다.

그렇게 각 시공팀은 백산협곡을 벗어나 승승장구로 동북 각지의 공사건설에 뛰여들었고 시장경제물결을 헤치고 나아갔다.

3232명이나 되는 거대한 기관, 기업을 활성화시키려면 반드시 기구를 간소화해야 했다. 김도를 비롯한 지도층은 반복적으로 기구개혁방안을 짰다.

종업원들의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일부 사람들은 《지나치게 개혁했다간…, 조심해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잘 지켜라》고 김도한테 경고전화까지 걸어왔다. 이에 앞서 기구개혁으로 앙심을 품은 한 종업원이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김도 아들의 얼굴을 구두발로 차 입과 이마가 터져 물도 넘기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1988년 3월 11일, 기구간소화 동원대회가 열렸다.

김도는 공정국을 생산층, 관리층, 봉사층 3개 큰 부문으로 나누고 생산층은 6개 시공단위를 무어 인사권, 물자권, 재정권을 부여하고 독립 경영하게 했다. 관리층은 기술밀집형 개발회사를 건립하고 공정국을 대표하여 대외도급을 맡게 하고 자체로 리익분배하도록 했다. 봉사층은 후근, 위생, 보위, 교육 등을 모두 사회부에 맡겨 관할하게 한 다음 생산경영과 탈리시킨후 점차 사회화했다.

1988년 4월 25일, 1226명 기관간부들이 사무실을 떠났는데 대부분이 생산1선에서 관리역할을 하고 일부는 퇴직하였으며 순 관리직에는 286명만 남겼다.

이날 백산수력발전소의 발동기소리는 여전히 온 산구에 울려퍼졌다.

김원장은 《1986년의 기구개혁은 중국수리전력 1국이 협곡을 벗어나고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첫 걸음으로서 1국의 금후 발전에 튼실한 토대를 닦아놓았다》고 말한다.

  1년 사이에 두대 발전설비세트를 가설했던 1984년(웃쪽 첫번째 김도)

가장 잘한 일은 훌륭한 안해를 맞아들인것

김도원장은 지금까지 가장 잘한 일이라면 훌륭한 안해 정옥선을 맞아들인것이고 유감이라면 삼협수리건설에 참가하지 못한것이라 한다.

김원장의 안해 정옥선(70세)은 사평사범학원을 졸업하고 통화5중의 수학교원으로 있었다. 1974년에 남편따라 산골인 백산수력발전소로 전근했다.

김원장은 《우리가 결혼할 때는 통화현 부현장으로 있는 아버지가 <외양간>에 갇혀 투쟁을 받고있었고 어머니는 정신분렬증에 걸린 상황이였다. 내가 백산에 있다보니 어머니가 아프기만 하면 남동생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옥선이한테 알렸다. 그러면 두말없이 간병하러 달려온 옥선이다. 옥선이는 친척들과 사회의 압력을 맞받아 나와 결혼했다》고 말하면서 아이 셋을 혼자 키웠다고 미안해한다.

김원장은 안해는 선량하고 총명하며 재간둥이라고 하면서 안해가 없었더라면 자기의 사업이 없었을것이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자라지 못했을것이라 한다.

1988년, 5만여명 인구중에 2명이 풍토병인 심근성질환에 걸렸다. 이중의 한명이 김도의 안해였고 다른 한명은 교원이였는데 그 이듬해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관련 책임자가 어떻게 국장한테 말하겠는가 걱정했는데 정옥선은 되려 기뻐했다. 산골을 떠날수 있어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이 공부할수 있다는데서였다. 그러나 김도는 백산수력발전소를 떠날념을 안했다. 1988년 정옥선이 풍토병으로 길림시병원에서 구급치료 받을 때이다. 때마침 1국에서 기구개혁을 할 때여서 병원에 있는 김도는 안절부절못했다. 남편의 심정을 잘 알고있는 안해가 백산에 돌아가라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김도는 문을 차고 나갔다. 그런데 수혈을 받던 정옥선이 혼자서 화장실에 갔다오다 혼절했다. 타인의 피와 융합되기전에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생긴 일이다. 의료사고가 날번했다고 의사가 노발대발했다. 그후 2년뒤에야 백산을 떠난 김도이다.    

《둘째 딸을 해산했을 때이다. 닭알 한바가지를 삶아놓고 배고프면 먹으라 하고는 생산 1선에 간 나다. 안해가 여러번 병원에 입원하여도 언제 한번 제대로 간호한적이 없었고 불평없이 묵묵히 나의 사업을 지지해 온 안해다.》김원장의 감회깊은 말에 정옥선은 퇴직한 후로 아픈 자기를 잘 보살펴주어서 행복하다고 남편을 칭찬한다.

2005년 자식들과 함께 백산수력발전소를 찾은 김도 

조선족사회를 대련시의 모범사회로 건설해야

대련 금발해안경제구관리위원회 공영택부주임은 《김원장은 대련시조선족사회에서 위망 높고 존경받는분으로서 대련시조선족사회건설에 적지 않은 일을 하고있습니다》고 소개했다.

김도원장은 조선족내부에서 나타난 문제는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가 설립되고 여러 곳에 널려있고 각자 꾸려오던 조선족로인협회를 정합시켜 대련시조선족로인협회로 만든후 대련시의 조선족사회가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기뻐했다.

그는 조선족들은 더 윤택나는 생활을 꾸려가려고 연해지역, 해외로 진출하는데 과거 소 팔고 땅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를 시키던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자식들의 교육에 소홀히 하지 말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면서 김원장은 《현재 대련시의 조선족인구가 약 7만명 된다. 2030년에 이르면 20만명이 될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련시조선족사회는 지금부터 이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조선족학교 규모, 조선족문화관 규모, 조선족로인협회 활동장소 등 기초시설에 대한 건설, 이에 따른 자금문제 등 많은 문제가 나타날것이다. 이에 대비해 우선 대련시조선족사회를 대련시의 모범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대련시조선족사회 발전방향에 대해 건의를 제기했다.

그는 《민족문화는 한 민족의 령혼이다. 민족문화의 핵심은 민족언어와 문자이다. 만일 한 민족이 문자와 언어가 없다면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고양하기 힘들다. 더우기 민족문화발전에 대해 론할바가 못된다》고 덧붙였다.

김도 략력

1943년 5월 통화현 대천촌 출생

1968년 대련공학원(대련리공대학) 수리학부 졸업

1968년 수리전력부 제1공정국(중국수리전력 1국) 근무

1981년  정식 입당

1981년—1986년 중국수리전력 1국 부과장, 부처장, 부국장, 대리국장

1986년—1990년 8월 중국수리전력 1국 국장

1990년 8월 —1993년 8월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겸 당조서기

1993년 8월—2003년 7월 대련민족학원 제1임 원장

2001년 6월 국무원 특별수당금 획득

2003년 9월—2008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대련양성중심 주임

길림신문 홍옥 기자

 

1983년, 1992년 중앙당학교 학습

2009년 퇴직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摘要 : 罗永浩已经完成了自己的使命,适时隐退、从台前走到幕后,对他本人和锤子手机来说都是一件万分幸运的事情。 文/贺树龙 罗永浩已经完成了自己的使命,适时隐退、从台前走到幕后,对他本人和锤子手机来说都是一件万分幸运的事情。 昨日那场演讲被他称为“为了告别的聚会”。告别了高度理想主...
  • 2014-12-07
  • 2003년 심양조선족제1중학교 졸업, 2007년에 북경대학을 졸업한 리금향이 11월 22일 북경대학 정보관리학부로부터 "업계 도사"로 초빙받아 국가공업화정보부 부부장 양학산으로부터 초빙서를 전달받았다. 이날 북경대학 정보관리학부에서 북경대학 《데이타에서 결책-빅 테이타의 분석 및 응용》북경대학 정보관리학부 대학...
  • 2014-12-05
  • 연변대학사범분원소학교 최철구선생님. 이맘때면 줄줄이 인사차로 찾아오는 스타제자들때문에 싱글벙글해지는 교원이 있다. 다름아닌 연변대학사범분원소학교 체육교원 최철구(1974년생)씨. 20년전인 1994년, 연변체육운동학교를 졸업하고 체육교원으로 사업해온 그한테 기라성같은 《천리마》 제자들이 노크해오기때문이다...
  • 2014-12-05
  •   현직 기업인 전화성 감독, 4번째 영화 ‘한민족 그리고 조선족’ 개봉 현직 기업인이 재능기부로 연출하고 한국YWCA(회장 차경애)가 제작한 영화 ‘한민족 그리고 조선족’이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10일 개봉한다. 화제의 주인공인 전화성 감독은 외식주문중개 시장점유율 94%를 점유하고 있는 ...
  • 2014-12-05
  • 안병렬 옌볜과기대 교수가 중국 옌지에 있는 사무실에서 조선족학교 독서운동과 고아 돌봄사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족 어린이 대상 15년째 독서운동 펼치는 안병렬 교수 팔순을 앞둔 안병렬(78·옌볜과기대) 교수가 살을 에는 중국 북간도의 칼바람을 마주한 지는 올해로 15년째다. 안동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
  • 2014-12-04
  • 왕루린 산시성 서기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3개월전 정치격랑에 휩싸인 산시(山西)성의 지도자로 보임받은 왕루린(王儒林)서기가 중국의 새로운 정치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지린(吉林)성에서만 공직생활을 해온 왕서기는 산시성의 내홍을 신속하게 안정시키면서 현재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산...
  • 2014-12-04
  • 박선녀 한화생명 영등포지역단 양남지점 매니저 "편견 때문에 조선족 출신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보다 먼저 움직이다 보니 고객들이 신뢰를 주셨습니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는다는 점이 FP(설계사)의 가장 큰 장점이죠." 한화생명의 조선족 출신 FP(보험설계사) 박선녀 매니저(사진...
  • 2014-12-03
  •      “강철, 유색금속, 기본화학, 건설재료 등 공업분야는 광산자원을 떠나 효과적인 생산을 할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금속광산탐사, 압전수정(压电水晶)광산탐사, 경관지구화학연구 등 령역의 전문가인 박청룡옹은 “지하자원의 연구와 개발이 힘든 요즘 반드시 리론과 ...
  • 2014-12-03
  • 연변환농유기농업합작사 김정희사장의 땅 사랑 “땅이 살아야 인간이 살고 인간이 살자면 땅을 살려야 합니다.” 유기농업에 관심을 갖고 직접 ‘농업혁명’에 뛰여든 연변환농유기농업합작사 김정희사장의 의미심장한 말이다. 유기농업 전문가도 아닌 그가 어떻게 되여 유기농합작사를 세우고 유기농업...
  • 2014-11-28
  • '동포투데이' 허을진(오른쪽) 대표가 이찰열 심사선정위원장으로부더 한국인터넷신문방송기자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있다. 지난 24일, 한국인터넷신문방송기자협회(회장 전병길)의 주최로 국회도서관 소강당에서 열린 제1회 한국인터넷신문방송기자대상 시상식에서 중국동포 출신 ‘동포투데이&...
  • 2014-11-28
‹처음  이전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