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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수련하는 펭귄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월4일 21시09분    조회: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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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류봉식

류봉식 화백

천안문광장에 느닷없이 펭귄 한마리가 나타나고 있었다. 펭귄은 남극 같은 추운 기후에서 서식하는 새이다. 단지 남반구의 추운 기후에서 서식하던 이 새는 북반구의 온대지역, 그것도 북경의 심장부에 불쑥 나타나 일장 괴이한 풍속도를 그린다.

“대비가 너무 심해서 황당한 느낌이 들지요?” 화백 류봉식은 그림 속의 천안문과 펭귄을 두고 이렇게 반문했다.

그의 작업실은 화백의 마을로 불리는 북경 동쪽 교구의 송장진(宋庄鎭)에 위치하고 있었다. 넓은 작업실은 온통 크고 작은 그림들로 도배되고 있었다. 기념비라면 기념비가 아닌 변형된 그림 그리고 기념비와 연, 비행기, 꽃송이의 조합 등등의 그림이었다.

“실제상 펭귄이 천안문광장에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요. 그걸 통해서 일종의 생태적인 유머를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펭귄은 류봉식이 1995년 북경에서 처음으로 열었던 개인전시회 “천안문의 펭귄과 기타 도시풍경”에서 단연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이런 그림은 구체적이고 모양이 있으며 색깔이 있지만 또 뭔가 비슷하면서 뭔가 아닌듯 하다. 그것은 모든 “모양”이 화백 류봉식의 마음속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그림은 말로는 이루다 전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추상화된 현실(被抽象的现实) 2009년

류봉식의 그림에서 거의 단골 배경으로 떠오르는 천안문도 마찬가지이다. 북경의 심장부인 천안문은 그 자체가 상징적인 부호이다.

“단지 자금성의 성문으로 볼수 없어요. 천안문은 성스러움 그 자체이지요.”

지난 세기 60,70년대 온 중국 땅에는 “붉은 태양”의 노래가 울리고 “붉은 기”가 물결치고 있었다. “붉은 태양”이 솟아있고 “붉은 기”가 나부끼는 “천안문”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류봉식은 1995년 구정기간 북경의 화백친구에게 놀러왔다가 그길로 세집을 찾아 거처를 잡았다고 한다.

사실 그 시절의 류봉식은 이미 남들이 부러워할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학교에서 미술교원으로 있는 등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었고 또 벌써 고향 할빈에서 열린 전시회에 여러 번 작품을 출품, 홍콩에서 개인전시회 “류봉식-천안문 풍속도”를 개최하는 등 화단에 나름대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릴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있었고 또 화백들의 세계에서 자기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홍일(红日)

그러나 류봉식은 거기서 화백의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작품 아니 자아의 승화를 위한 뭔가의 변화를 내심 노리고 있었다. 이때 화백친구가 살고 있는 북경 원명원의 “화백마을”이 혜성(彗星)처럼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원명원은 청나라가 150년에 걸쳐 건설한 황실원림이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 일부 화백들이 원명원 부근의 값싼 단층집에 입주하면서 차츰 화백들의 예술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원명원은 화백들끼리 서로 교류하기 좋은 마당을 만들고 있었고 이에 따라 그림을 전시하고 파는데도 많은 기회를 마련하고 있었다.

원명원은 류봉식의 그림 세상에 등장한 또 하나의 “천안문”이었다.


밤(夜)2003년

“한눈에 그만 정이 들어버렸어요. 그래서 학교에도 알리지 않고 눌러 앉았지요.” 류봉식은 그때의 정경을 돌이키면서 뭐가 우스운지 갑자기 입가에 웃음을 띠운다.
“그렇잖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진짜 미친 짓이었지요.”

솔직히 쉽지 않는 결단이었다. 그때 중국은 아직도 지난날의 계획경제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누구라도 쉽사리 호적과 직장을 버리고 타지에 유랑민으로 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유랑민은 “암”과 같은 불결하고 불길한 이름이었고 사회의 불안정한 요소로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한 원인은 최종적으로 원명원 “화백마을”이 해체되는 결정타로 되었다. 훗날 류봉식은 “화백마을”의 기타 대부분의 “촌민”들과 더불어 원명원을 떠나 새로 일떠선 “화백마을”인 “송장진”으로 이주한다.

어쨌거나 “화백마을”의 이주는 화백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열고 있다. 이때부터 류봉식의 작품은 북경과 천진, 남경 등 중국의 큰 도시는 물론 독일과 영국, 이탈리아 등 나라의 전시회에 연속 부절히 나타난다. 현재 그의 그림은 대부분 유럽과 미국의 화랑과 개인수집가들에게 소장되고 있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가 아닐지 한다. 이름난 예술인이라면 그러하듯 류봉식 역시 어릴 때부터 그림을 아주 즐겼다고 한다. 할빈의 대학교에서 체육교원으로 있던 아버지의 영향이 몹시 컸다고 한다.

미상불 체육과 그림은 서로 동이 닿지 않는 이상한 조합이다.


낮(日)2010년

류봉식은 그 의문을 단마디로 풀어주었다. “아버지는 화백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해요.”

그때 그 시절 시골에서는 그림을 그린다는 게 일종 사치였다. 종이나 붓, 먹… 모든 걸 일일이 돈을 주고 사야 했다. 쪼들리는 살림형편에 그림 그리기는 환상으로 접어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짬이 나는 대로 그냥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책가방에 들어있는 책들은 물론 구들위의 신문지도 어느새 그의 작품으로 도배되었다. 어느덧 아버지의 그림은 단연 미술학부의 교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린 벽화랑 참 멋졌어요. 다들 유명한 화가가 그린줄 알았습니다.”

에피소드가 있다. 그 시절 노동단련 때문에 미술학부 교원이 부득불 강단을 비우게 되면 체육교원인 아버지가 대신 강단에 서는 어처구니없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얼핏 보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런 이상한 형태는 훗날 류봉식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천안문광장과 펭귄의 조합 그림이 그러하고 또 수탉의 볏과 해골의 조합 그림이 바로 그러하다. 수탉의 볏은 생김새가 닭 모양인 중국을 상징하며 또 밝는 새날을 상징한다. 이에 반해 해골은 죽음, 과거, 부패 등을 상징한다. 수탉의 볏과 해골의 조합은 기존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류봉식의 자아의 탐색과 영적 성장의 길에는 본의든 타의든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가 비끼고 있었다.
아버지의 탁상에는 언제나 체육 교과서보다 화첩이 더 많았다고 한다. 와중에는 항간에서 좀처럼 눈요기조차 할수 없는 국내외 대가들의 작품이 적지 않았다.

“지금처럼 게임을 즐길수 없었잖아요? 심심하면 화첩을 보면서 그림 흉내를 냈지요.”

류봉식은 호기심이 많던 어린 시절을 그림의 동화세계에서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림 그리기는 서서히 그의 취미로 자리를 잡았다. 그림 취미는 나중에 대학입시 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의 제1지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학교에 입학한후 류봉식은 입체파 그림의 대표인물인 피카소(스페인, 1881~1973)를 본 따 추상화를 그리기도 하며 또 “빛을 곧 그림”으로 신봉한 모네(프랑스, 1840~1926)를 본 따 인상파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 시절 류봉식은 유럽풍의 그림에 매료되어 나름대로 작품화의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는 이때 벌써 생각이나 화법에서 시대를 앞서는 전위적인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후 류봉식은 북대황(北大荒)의 학교에 미술교원으로 배치되었다. 오랜만에 도시의 자질구레한 복잡함과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난 그는 흑토와 풀, 수림에서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로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어우러진 땅은 그에게 마냥 신선한 아이디어를 주고 있었다.

2년 후 할빈에 돌아온 류봉식은 드디어 화백의 세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중국에서 열린 “북국의 풍경화 전시회”, “할빈청년화백작품전시회”, “중국당대유화전시회”에 작품이 출품되며 홍콩에서 열린 “중국전위회화전시회”에도 그의 그림이 일각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류봉식의 붓에 그려진 풍경은 강한 주관성과 정서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는 시인적인 격정과 상상력으로 외재한 세계를 시적으로 뜯어서 다시 맞추고 와중에 변화하는 력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림은 류봉식의 관념의 변혁과 해방 그리고 생존상태에 대한 깊은 사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천안문광장의 기념비는 혹자 안테나와 함께 있으며 혹자 기둥처럼 우뚝 서있기도 하고 혹자 둥근 공의 조합체로 나타나며 혹자 펄럭이는 두 날개를 달기도 한다. 기념비는 또 붉은 색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자 노란 색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혹자 얼룩진 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니저러니 기념비는 더는 회색의 간단한 피사물 자체가 아니다. 피사물의 원유의 질량감은 방불히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한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피사물의 해체와 조합은 인간의 생존환경에 대한 그의 사색과 추구를 드러내고 있다. 피사물의 변화에는 화백의 내적인 감수가 숨어있는 것이다.

언제인가 한 가난한 시인은 특별히 돈을 모아서 류봉식의 그림을 샀다고 한다. 시인은 류봉식의 추상화한 그림에서 자기가 모색하고 있는 시의 본성을 읽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화백의 붓은 화백의 그림이 아닌 시인의 시구를 적고 있었다. 그림의 점과 선, 색채는 시의 어휘, 부호, 운률로 되고 있었으며 점과 선, 색채의 변화는 화백의 뛰노는 정감에 일일이 감응하고 있었다.

그림은 화백의 심령의 감성세계에 존재하는 하나 또 하나의 풍속도였다.
잠깐, 류봉식에게는 주변에서 잘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그가 짬짬이 생각을 정리해서 만든 소책자이다. 내밀한 친구들에게만 돌리는 이 소책자는 그만의 깨달음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소책자의 서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예술은 우리의 마음과 손의 합일의 절창(絶唱)이며 깃털로 그린 날개이다. 잠수의 깊이는 사상의 극한이다.”

그림은 자신에게 일종의 수련이라고 하는 류봉식의 말을 비로소 알것 같다. 남극주에서 바다를 건너 멀리 천안문광장에 나타난 외로운 펭귄이 새삼스레 눈앞에 떠오른다. 정말이지 화백의 고독한 그림 수련은 도대체 그 끝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김호림


《예술세계》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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