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순박사는 1893년 2월2일 조선 황해도 웅진군 부민면 강령리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학생시절에 아주 총명하고 공부에 열심하여 1911년 4월 서울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1915년 4월에 일본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 대학을 졸업한후 조선에 돌아와 서울, 철산 등지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하였다.
한창 구지욕에 불타오른데다가 의학상에서 더 깊은 연구를 하려고 로기순은 1929년7월 다시 일본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연구생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저명한 생화학자 고다마게이조교수의 지도밑에 2년간 고심하게 생화학연구를 진행했다. 1931년 6월 로기순은 《우리카제(뇨산산화효소)에 대하여》《알란토인의 비색정량법》《알란토인나이제》《신생아와 임신부의 오줌 및 양수가운데의 알란토인의 함량》등 4편의 론문을 연구발표하여 일본의학계를 놀래웠다.
그가 론문에서 론술한 원리는 당시 일본 의학계에서 널리 리용되였는데 이 새로운 원리는 생화학령역에서뿐만아니라 림상의학의 발전에도 큰 기여로 되였다. 독일어에 정통한 로기순은 이 론문들을 1931년 일본 도꾜에서 출판된 《일본생화학》 잡지에 독일문으로 발표하여 다시 한번 일본의학계를 놀라게했다.
1932년 1월19일, 로기순은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의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때로부터 로기순선생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생화학자들과 나란히 박히게 되였으며 조선족의 제1대생화학전문가로 그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로기순선생은 해박한 학식과 고명한 의술, 숭고한 의료도덕의 소유자였다. 박사학위를 수여받은후 로기순선생은 조선에 돌아와 서울, 철산, 부산 등지에서 14년간 의사사업을 하면서 풍부한 림상경험을 쌓았따. 1936년 6월 로기순선생은 중국 도문으로 이주하여 도문시 시립병원에서 10여년간 원장사업을 하였다.
의사사업에 종사한 25년간 그는 소아과와 내과에서 고명한 진단기술과 환자에 대한 참다운 봉사태도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47년 봄에 동북군정대학길림분교의학원 부속병원에서 중태에 빠진 어린아이의 병을 한눈에 알아보고 종합치료로 회생시킨 일, 길가는 임신부의 걸음걸이에서 태아의 위치가 바로 놓이지 않은것을 짐작하고 병원에 가도록 권유해서 위험에서 구해낸 일, 소문을 듣고 병보이러 집까지 찾아온 농민환자의 고질병을 단 몇알의 약으로 고친 일… 신의를 만나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특산물을 가져오면 의사의 천직이 병을 고치는것이라며 단연 거절한 이야기는 지금도 연변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있다.
로기순박사는 젊은 의사들에게 늘 《병을 떼는데 관건은 진단이요. 의사라면 돈벌기 위해 아무렇게나 처방을 떼서는 안되오》라고 엄숙히 당부하군 했다.
로기순선생은 또한 충성스러운 의학교육가이기도 했다. 로기순선생은 1946년 9월에 초청을 받고 길림성 성립룡정의과대학에 가서 교장직을 담임하였고 그 이듬해인 1947년 3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학원의 부원장직을 담임했고 1948년 1월에는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 교수로 되였다.
그해 연변의과전문학교가 창립되자 그는 교장직을 담임하였다. 1949년 4월 연변대학이 창립될때 연변의과전문학교를 연변대학 의학학부로 고치자 로기순선생은 이 학부 제1 학부장직을 담임하였다. 1950년 동북인민정부 교육부에서는 로기순선생에게 2급교수직함을 수여했다.
로기순선생은 교수사업을 지도하고 조직했을뿐만아니라 직접 생화학과도 강의하였다. 그는 1000여명의 의무일군들을 양성하여 조국의 방방곡곡과 세계 여러나라에 보내였다. 그가 직접 강의하여 양성한 제1회,제2회 본과졸업생중 학교에 남은 제자들은 그후 모두 교수나 부교수로 성장하였고 연변의학원의 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에서의 골간 및 학술지도로 되였다.
젊은 시절의 로기순박사
로기순선생은 연변의료교육사업의 창시자일뿐만더러 의료사업에 매우 큰 공헌이 있는 분이였다. 해방직후 연변에서는 한동안 호렬자, 천연두 등 전염병이 만연되여 사망률이 매우 높았으며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당시 방역시설이 건전하지 못한 형편에서도 로기순박사는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송아지를 사들여 실험실에서 예방약을 만들어냈으며 방역대를 조직하여 각처에 파견해 전염병을 예방치료했다. 이렇게 2년동안 악전고투한 끝에 연변에서의 전염병을 완전히 근절하여버렸다. 전염병의 위협을 받았던 연변인민들은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 로박사의 혁명적인도주의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고있다.
로기순선생은 박식한 학자였다. 그는비단 생화학뿐만아니라 병리해부,병리생리, 약리 등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었을뿐만아니라 조선어와 일어는 물론 중국어와 독일어, 영어도 매우 숙달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면서도 평범한 스승이였고 자애로운 아버지같은 분이였다.
만년에 병석에 누워있으면서도 로기순박사는 항상 학생들의 림상실습을 지도하고 학생들의 시험문제를 내고 시험지를 매기기도했다. 1956년 병원에 입원해있는 기간에도 학교에서 여러차례 조직한 과학연구경험보고회를 구체적으로 지도하였고 그 이듬해인 1957년 4월1일 연변대학 창립 8돐을 기념하여 학술보고회를 조직할때에는 병이 악화되여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형편에서도 교원과 학생대표들을 불러 의견을 교환하면서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
1957년 로기순선생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얼마 지탱하지 못할것을 미리 짐작하고 가족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다음 나의 시체를 학원에 바쳐 병리해부학교수에 사용하도록 하오》
자신의 지혜와 학문을 나라와 인민에게 고스란히 바친 이 위대한 의학과학자는 세상과 하직하는 이 슬픈 시각에도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시체마저도 학술연구에 바치려하였던것이다. 그에게는 지식외에 후대에 물려줄 돈도 재산도 없었다.
로기순선생은 1957년 6월7일 22시에 동맥경화와 뇌일혈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로기순선생을 추모하여 6월9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에서는 연변의학원 정원에서 장중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이고 자치주주장이며 연변대학 교장이였던 주덕해동지를 비롯해 요흔, 전인영, 김명한 등 연변조선족자치주지도자들이 장례 당시 친히 로기순박사의 상두를 메였는데 연변정계에서 으뜸가는 인물들이 한 지식인의 상여를 멘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였다.
그만큼 조선민족은 벼슬을 한자보다 선생을, 출세보다 지식을 더욱 신성시해왔다는 증거이기도하며 로기순박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준다. 문화대혁명때 주덕해주장의 죄장의 하나가 로기순박사의 령구를 멘 사실이였는데 당의 간부로서 자산계급지식분자를 공경했다는것이였다.
로기순박사가 사망한후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체를 병리해부하고 병이 든 부위를 병리표본으로 취하여 연변의학원 병리표본실에 진렬하였다…
1993년 7월 연변의학원 생물화학교연실에서 편찬한 《일본생화학회회보로부터 본 로기순박사의 발자취》에서는 《로기순교수는 본세기20년대말부터 생물화학연구사업에 종사한 로일대 저명한 생물화학자이며 학식이 연박하고 의술이 뛰여나고 의덕이 고상한 의학자이며 연변의학원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필생의 정력과 심혈을 조선족의 교육사업에 바쳤고 연변의 교육, 과학, 의료위생 및 연변의학원의 창건과 발전에 불멸의 공헌을 하였다》고 합리한 평가를 내렸다.
로기순박사가 세상뜬후 박사의 미망인인 일본인 안해와 자녀들은 1965년도에 모두 일본으로 이주해갔다. 로기순박사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가족도 바다건너로 떠나 버렸으나 로기순박사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수많은 전설적인 이야기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참고문헌:
현룡순 리정문 허룡구 편저 《조선족백년사화》 제3집 1985년 료녕민족출판사 출판
김영금 저《청산처럼 창공처럼》1995년 민족출판사 출판
류연산 저 《연변대학산책》2009년 민족출판사 출판
리희일 저 《숨차게 걸어온 길》 1997년 민족출판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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