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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인 리령의 흰색의 살풀이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6월8일 07시58분    조회:6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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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령
[인물기사]
무용인 리령의 흰색의 살풀이

글/김 호 림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는 리령


자의든 타의든 그가 맨 처음 재간이라고 배운 게 바로 춤이었다고 한다.

그때 “문화대혁명”의 폭풍은 룡정이라는 작은 시골에도 세차게 불어치고 있었다. 곳곳에 붉은 기가 나부끼고 “홍가(紅歌)”가 울려 퍼졌다. 어수선한 세월이었지만 철모르는 어린 리령과 또래들에게는 일장 “낙원”이었다. 그들은 늘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제멋대로 뛰어다녔다. 엄마, 아빠가 교원으로 있는 소학교 언저리는 또래들의 놀이터로 되고 있었다. 운동장의 이색적인 춤판이 개구쟁이들의 발길을 끌었다. 전국 그 어디나 마찬가지로“충성무(忠誠無)”가 의례행사처럼 운동장에서 자주 진행되었던 것이다.

리령은 그 기억의 한 귀퉁이를 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정말 꿈에서도 보고 들은 게 ‘충성무’였지요.”

어느 날인가 아빠는 영화관 앞에 웅기중기 모인 사람들을 보고 부지중 걸음을 멈췄다. 호기심이 부쩍 동해 여느 길손처럼 어깨 너머로 눈요기를 하다가 깜짝 놀란다. 로천무대의 주역은 다름 아닌 어린 딸 리령이였던 것이다. 리령은 깡충깡충 충성무를 추고 있었고 구경꾼들은 여섯 살 어린이의 깜찍한 춤사위에 연신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령은 그렇게 엉뚱하게 춤과 모진 인연을 맺고 있었다.

“실은 제가 춤을 선택한 게 아니고 그때의 사회상이 저를 그길로 이끈 것 같아요.”

예비 무용인은 팔등신의 “난쟁이”였다

룡정에서 소학교를 졸업하던 그해였다. 리령은 언니를 따라 룡정시 제1중학교로 구경하러 간다. 연변예술학교에서 무용반 학생모집을 하기 위해 시험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언니가 이 중학교의 선전대 공청단 서기로 있었던 것이다.

리령은 꿔온 보리자루처럼 시험장 구석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솔직히 춤을 시연하는 선배들이 한없이 부러웠지만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었다. 아직은 중학생이 아니었고 더구나 춤이라곤 기계동작 같은 “충성무”나 “본보기극 춤”밖에 몰랐다.

“넌 왜서 아직도 시험을 보지 않느냐?”

문득 그를 시험장으로 불러낸 시험관이 있었다. 리령의 늘씬한 키가 그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뒤미처 알려진 사연이지만 리령은 남달리 하체가 상체보다 16센치미터나 더 길었다고 한다.

이때 리령은 단지 “충성무”와 “체조동작”으로 시험에 합격하는 기문을 낳는다.

시험관의 혜안은 적중했다. 이때 예술학교 예비반에 최종 진입한 57명의 훈련생 가운데서 나중에 회보공연에 참가하게 된 독무 연기자는 4명, 그중에 리령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예비반 무용교원이 남의 눈을 피해 슬며시 다가오더니 리령의 어깨를 다독였다. “어서 이불이랑 준비하오. 개학이 되면 학교에서 합숙생활을 해야 하거든.”

예술학교 입학이 비준되었다고 넌지시 귀띔하는 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엄마는 기쁜 나머지 연길까지 천방지축 뛰어온다. 개구쟁이 딸을 받아들인 학교에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엄마의 그 걸음이 결국 딸애의 꿈을 깨뜨릴 줄이야! 며칠 후 발표된 예술학교 입학명단에는 뜻밖에도 리령의 이름이 홀랑 빠져있었다.

몇 년 후에야 비로소 그 비밀이 밝혀졌다. 1977년 4월, 연변예술학교에서 또 무용반 학생모집을 위해 용정으로 내려왔다. 그 무렵 리령은 더는 “충성무” 연기자가 아니었고 또 “체조운동”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덧 학교선전대의 간판 무용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키도 1미터 65센티미터로 늘씬한 “미인송”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리령은 그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입힌 예술학교에 신청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음악교원이 안타까워 대신 신청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했다고 한다.
사실 이때의 시험장은 리령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바람에 하느작이는 꽃처럼 무대에 흐드러진 춤사위는 대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시험관들은 그가 예전의 무용반 예비생 리령인 줄 알 게 되자 더구나 혀를 끌끌 찼다.

“네가 벌써 이렇게 컸느냐? 이럴 줄 알았더라면 돌려보내지 않았을 걸 그랬구나.”

뒷이야기이지만, 시험관들은 그때 키가 1미터 50센티미터를 가까스로 넘는“난쟁이” 엄마를 만난 후 리령이를 무용인으로서의 장래성이 없다고 섣불리 점찍었다. “대나무 그루에서 대나무가 난다.”고 엄마처럼 키가 별로 크지 않을 줄로 어림짐작을 했던 것이다.

“반쪽짜리” 무용인의 기담

리령이가 예술학교의 대문에 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팔청춘이었다. 한창 꽃피는 시절이라고 하지만 무용 기예를 닦기에는 이른 나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곡예를 하듯 다리를 일자형으로 벌려야 되는데 다리가 통나무처럼 뻣뻣했다.

그때부터 합숙에는 사뭇 기이한 그림이 그려졌다. 리령의 침대에는 저녁마다 “반쪽짜리” 인간이 누워있었다.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침대 허리께의 양쪽 가름대에 발목을 밀어 넣었기 때문에 몸이 반쪽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다리를 모둠으로 한데 붙여 놓을 수 없었어요.”

정말이지 그 무슨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아무리 이름난 예술가라도 재능을 전부 타고난 게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와서 꽂히는 대목이었다.
성공은 노력하는 자의 몫이다. 아니나 다를까, 졸업공연 때 리령은 단연 신인(新人) 스타로 떠올랐다고 한다. 독무 “장고춤”과 “양돈장의 처녀”를 연기하며 또 “3인 북춤” 등 무용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것. 그렇다고 학업을 빼먹은 게 아니었다. 그는 “3호 학생”의 영예를 수여받은 몇몇 안 되는 우수졸업생의 한 사람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리령은 연변가무단의 무용배우로 거듭났고 또 그로부터 5년 후에는 중앙민족대학 제1기 민간무용반 학생으로 탈바꿈을 한다.

조선족 집거지에서 나서 자란 리령은 중국말이 몹시 서툴렀다. “초경俏勁(맵시 있고 예쁜 춤동작에 쓰이는 용어)”과 같은 말은 도대체 무얼 뜻하는지 해득하기 어려웠다. 리령은 남이 춤에 한 시간을 할애하면 일부러 세 시간을 할애했고 남이 집으로 돌아가는 첫 방학에는 아예 학교도서관에 “입적”을 했다. 나중에 그는 무용동작의 해독에서 남다른 깨달음의 경지를 보였다. 난해한 다른 민족의 춤동작은 물론 난이도가 높은 “재주넘기”도 가뿐히 연기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리령은 중화총공회가무단 무용교원 겸 무용배우로 된다. 그에게는 더는 지방이 아니라 전국 나아가 해외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때 그의 끈질긴 성미는 또 한번 괴력을 발산한다.

1988년 리령은 해외공연과 중앙TV프로의 종목에 모두 선정되었다. 총 인원이 무려 5백여명이나 되는 가무단에서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런데 잠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출산한지 불과 3개월 만인 리령은 몸이 예전보다 아주 비만했던 것이다. 사실 무대에서 무용수로 뛰기에는 무리였다.

이튿날 아침부터 부근 학교의 운동장에는 난데없는 “달리기 선수”가 나타났다. 부엌의 포장용 비닐을 몸에 둘둘 감은 리령이였다. 다이어트를 할 기구나 장소나 마땅치 않았던 그가 고안한 토방법이였다. 리령은 4백 미터의 트랙을 여덟 바퀴 달린 후 다리차기를 3백 번, 또 앉아 뛰기를 2백 번 한 후 비로소 집에 돌아갔다. 다리에서 땀이 아닌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날마다 “수영장”에 다녀오는 것 같았다. 5개월 후 그의 체중은 무려 11㎏이나 줄어들었으며 출산 전보다 더 늘씬한 몸매를 무대에 드러냈다.

“포장용 비닐을 보면 지금도 땀이 절로 나는 것 같아요.”


연변에서 공연뒤 문정일, 조남기 등 지도자들과 함께


그의 별명은 “돌돌이 스타”였다

가무단에서 리령은 “장고춤을 추는 여자”로 통했다. 누구든지 이름은 몰라도 “돌돌이 스타(轉星)”라고 하면 곧바로 리령을 뜻하는 줄 알았다. “돌돌이 스타”는 그가 조선족 춤 고유의 동작인 “돌돌이”를 1회에 연속 48고패나 돌아서 얻은 이름이다. 웬만한 무용수는 24고패만 해도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는 곱절이나 더 돌았고 또 선 자리에서 그냥 돌았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리령은 또 창작경력에서 세인이 괄목할 성과를 올렸고 문화부 등 정부 부문의 우수창작상과 우수감독상, 북경시 무용축제 우수상, 국제예술축제 금상 등 여러 가지 상들을 아름아름 수상한다. 와중에 그가 남편과 함께 창작한 남성독무 “이즈러진 봄(殘春)”은 단연 “중화민족 20세기 무용경전” 금상을 수상했다. 조선족으로 독무종목의 금상 수상자는 그들 부부가 유일했다.

무용에 혼신의 정열을 붓던 리령은 2000년 뜻하지 않던 가사(家事)로 부득불 내부퇴직을 하게 된다.

“춤의 무대를 떠난 게 정말 안타까웠어요.”리령은 첫 한두 해는 TV 스크린에 무용이 떠오르면 슬며시 자리를 떴다.

“그때마다 제가 안무를 했더라면 춤동작을 조금 더 멋있게 만들었건 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말을 빈다면 그는 진짜 무용에 미친 사람이었다. 진작부터 무용과 혼연일체로 되고 있었다. 한시도 무용을 떠날 수 없단다.

리령은 2002년부터 북경사범대학과 중화녀자대학 객원교수로 무용학부 학생들에게 조선민족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북경 조선족민간예술단의 예술지도를 맡아 그들을 늘 무대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또 매주 토요일이면 북경 조선족녀성민간단체 “애심네트워크”의 특강 무용 강사와 지도로 나선단다.

이런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그는 2001년 창설된 민간단체 북경애심장학후원회의 주요성원으로 되어 조선족사회의 공익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남은 꿈이 딱 하나 있어요. 백두산에 올라 춤을 추는 거죠.”

언제인가 백두산에 올라 천지의 흰 물에 “살풀이” 춤의 신들린 몸짓을 비껴 담고 싶다고 한다. 흰색의 옷과 흰색의 수건 그리고 흰색의 춤사위에 백의겨레의 천년의 혼, 꿈과 한을 그대로 실어 올올이 풀어내고자 한다는 것.

리령의 순 흰색 사랑의 “살풀이”이였다.*

[중국민족, 2013년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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