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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정대하고 강직한 민족지도간부 김영준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6월5일 08시25분    조회:4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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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영준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23)

김영준

자택에서 현처량모인 부인 한복순과 함께

김영준 리력

1929년 한국 서울 출생, 이듬해 길림성 영길현에 이주

1940년 영길현조선족소학교

1945년 길림시조선족중학교

1946년 길림시조선청년동맹강습소 학습, 동북민주련군에 가입, 유명한 구태현 기타목전역에 참가, 3차 강남진군전투에서 3등공.

1947년 부여현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 유명한 사평전역에서 부상, 2등갑급영예군인.

1948년 왕청현 묘령 영예군인학교에서 학습, 반장, 연길시 길림성림무국 인사과에 제대, 과원,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단지부서기, 연길시단위원회 위원.

1949년 영길현 쌍하진 림무소 소장

1950년 길림림업관리국 교하분국 부국장대리

1951년 길림림업관리국 목재과 부과장, 황니허분국 부국장.

1952년 길림림업관리국 재무과 부과장, 과장.

1953년 동북림업총국 길림판사처 비서, 중공길림시규률검사위원회 위원.

1954년 중공길림성위 공업부, 삼림공업교통부, 농촌사업부 간사, 조장, 부처장.

1959년 중공길림성당학교에서 학습

1961년 성직속기관업여대학에서 학습

1969년 성혁명위원회 정치부 사업일군

1971년 성혁명위원회 농림판공실 비서처 처장

1977년 길림성림업국 부국장, 당조성원.

1980년 성림업청 부청장, 당조부서기, 성림학회 부리사장, 리사장, 고문.

1981년 길림농업대학 지도간부양성반에서 학습

1983년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당조서기, 성정협 제5기 위원회 위원.

1988년 성정협 제6기 위원회 위원, 성정협 사회법치위원회 부주임, 중국공산당 길림성 제5차 대표대회 대표.

1995년 리직휴양

김영준은 원 길림성림업청 부청장이며 원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다. 17세때인 1946년 겨울, 그는 유명한 구태현 기타목전역에 참가하고 1947년 여름 사평전역중 치렬한 골목전에서 부상당해 완치된 후 2등갑급영예군인으로 인정받았으며 3차 강남진군전투에서 3등공을 세웠다.

1995년 리직하고 18년째 집에서 휴양하고있는 그에게 2012년 12월, 길림성인민정부 삼림방화지휘부와 길림성림업청에서는 공동으로 《길림성 련속 30년 무중대 삼림화재 기념상》을 수여하고 2011년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창당 90주년을 맞으며 그에게 우수당원 영예칭호를 수여했다.

일전 자택에서 기자를 마주한 그는 취재를 접수한것은 《당의 민족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이다》라고 말문을 뗀다. 두시간동안 취재하는 과정중 그의 진정어린 웃음, 강직한 표정, 집념적인 눈길, 결단성있는 목소리, 뚜렷한 사유는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삼림자원 보호하고 방호림 건설하여 생태환경 개선

김영준은 림업사업을 지도할 때나 민족사업을 지도할 때나를 막론하고 《전형적인 선진경험을 보급하는 방식》과 《전형으로 앞길을 인도하는 방식》을 잘 활용했다.

김영준은 성림업국에서 림업행정사업을 분관하며《삼림법》을 관철집행하고 삼림자원 보호사업과 식수조림사업을 중점적으로 틀어쥐였다. 그는 《삼림의 첫째가는 적은 산불》이라며 화재방지를 위해《예방을 위주로 하되 적극 소멸》하는 정책을 철저히 관철하였으며 반석과 동풍 두곳의 선진호림방화경험을 각 현에 끊임없이 보급하고 따라배우게 하였다.

1978년 국가에서 제정한 길림성 서부 농토방호림건설사업을 하루빨리 완수하기 위해 김영준은 온갖 심혈을 다 몰부었다. 그는 매년 검사와 포치 사업을 병행하며 조기 방호림건설의 선진단위인 부여현의 선진경험을 선전하고 따라배우게 했다.

방호림건설사업은 자연생태환경을 개선해주었다. 농토방호림은 바람을 막고 모래를 고정시켜 량곡을 증산시켰다. 뿐만아니라 촌마을을 방호하는 작용을 일으켜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인민들의 생활 환경과 여건까지 개선해주었다.

1983년 국가《3북》방호림국은 길림성에서 현지회의를 열었다. 당시 생태환경을 개변시킨 방호림의 효과를 보고나서 모든 회의참가자들은 김영준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주 기쁘고 흥분되였다.

민족사무위원회의 조직역할을 발휘하다

1983년 김영준이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겸 당조서기로 부임했을 때 기관일군들은 《민위는 권력도 없고 자금도 없고 무슨 일이나 다른 행정기관의 힘을 빌어야만 한다》며 남보다 못하다는 렬등감을 갖고있었다. 이는 김영준앞에 놓인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난제였다.

민족사업에 문외한인 김영준은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고 민족리론과 민족정책을 학습하는 한편 몇몇 동지를 인솔하여 백성지구 몇개 현과 몇개 몽골족향에 가 40여일동안 조사연구하였다.

조사를 통해 그는 구체적인 곤난들을 알게 되였다. 몽골족향이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성재정청 지도자와 협상하여 농업세를 약간년 감면하여 경제력을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의 생산발전을 지원하여 환영을 받았다.

이 일은 그와 민위간부들에게 자금과 물자가 없어도 당의 정책만 따라가면 사업을 잘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그후 그의 지도아래 민위에서는 조사연구와 조정사업을 억세게 틀어쥐였다.

당시 민족사무위원회는 위원회만 있었지 위원이 없는 허울뿐이였다. 김영준은《민족사무위원회는 반드시 조직작용을 잘 발휘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위원회가 사업지도부로 되여야지 인사만 배치하는 지도부로 되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연구끝에 민족사무와 련계가 많은 성재정청, 성계획위원회, 성농업은행, 성합작사 등 24개 부문의 책임자를 한명씩 민족사무위원회에 받아들였다. 그런후 그 명단을 성당위에 보고하여 조직심사비준을 받은 후 성정부에서 정식 공포하도록 추진하였다.

그렇게 설립된 민족사무위원회는 조직작용을 충분히 발휘하였으며 명실공히 위원회로 거급난 민족사무위원회의 역할은 매우 컸다. 1990년 전 성 민족사업회의에서 성직속부문의 책임자들은 처음으로 본 부문에서 민족사업을 어떻게 지원하겠다는 년도계획을 발언하거나 서면형식으로 제출하였다. 그후 위원회회의는 해마다 열렸는바 지금까지 이어내려오고있다.

김영준은 이 모든것은 당의 《민족구역자치법》과 여러 민족 평등단결, 공동번영의 정책이 있었기때문에 가능한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족구역자치법》을 관철하여 만족자치현 창립

김영준은 전 성 민족사업을 주관하며 《민족구역자치법》을 전면 관철집행하였다.

길림성과 료녕성은 다 만족발원지이지만 만족자치현이 몇개 있는 료녕성과 달리 길림성에는 하나도 없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민족단결에도 불리했다.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영준은 먼저 만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고 많은 이통현에 가 조사연구한 뒤 성지도자에게 회보하였다.동의를 받은후는 북경에 가 부의황제의 동생인 부걸을 포함한 북경에 거주하는 만족 상층 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좌담을 하였으며 원 길림성당위 부서기 관산복을 직접 방문하여 만족자치현 창립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청취하였다. 자치현 창립에 대해 북경에 거주하는 만족들은 매우 반기였다.

그다음 그는 국가민정부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지도자를 만나 자치현 창립에 대해 회보하고 청시하였다. 그들은 모두 국가에 청시보고를 제출하는것을 동의하였다.

그런후 김영준은 길림성정부에 국가 두 부와 민족사무위원회의 의견을 회보하였다. 이어 길림성정부에서는 국무원에 청시보고를 제출, 1988년 5월 30일 이통만족자치현이 정식 비준을 받고 설립되였다.

소수민족 경제 문화 교육 체육 사업에 심혈

김영준은《경제발전은 당의 중심사업이다. 민족사업도 첫째가는 이 과업을 둘러싸고 각항 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위와 경제에 관계되는 사업은 성당위 통일전선부의 통일지도하에 성급 민주당파와 공상련의 과학기술일군을 조직하여 지력으로 변강을 지원하고 성민위에서 각종 인재를 조직하여 자치지역, 민족향에 가 당지 인재를 집중양성하였다.

고급전문가는 김영준이 직접 모시고 동행하였다.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원 성정협 부주석인 관몽각(关梦觉)이 연변에 가 특강할 때 바로 그가 동행했던것이다.

소수민족지구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김영준은 해당 부문과 조정하여 통화현에서 논에다 물고기를 기르는 경험현장회의를 열었는바 논에서 벼와 물고기 둘다 수확하는 효과는 비교적 좋았다.

연변민족플라스틱제품공장과 연길시목제품가구공장의 제품들인 민족일용품들과 민족가구들은 성민위의 투자와 도움에 힘입은것이였다. 화룡의 돌솥공장, 도문의 삼림개구리양식기지도 직접 민위에서 투자하고 지지했다.

그는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의 보존을 위해 무한한 책임심과 사명감을 안고 힘다하였다. 민족사업의 발전을 심입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길림성민족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조직인사부문을 협조하여 소수민족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성민족간부학교를 회복시켰다.

또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길림성을 선두로 하는 동북3성조선어협업소조와 내몽골자치구를 선두로 하는 8성, 구 몽골어문협업소조를 참답게 조직건설함으로써 이 소조에서 민족언어를 규범하여 보급하고 학습시키도록 했다.

또 장춘과 길림 두 도시에 회족 전문용 랭동창고가 없어 회민전통과 풍속습관이 존중받지 못하고있음을 알고 소, 양 전문용 도살장과 랭동창고 건설 등 원만한 해결을 이끌어냈다.

전통체육항목의 발전에도 크나큰 심혈을 기울였다. 녀자그네항목은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길림성의 우세종목이였다. 그러나 1986년 우룸치에서 열린 제3회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패하는 랑패를 보았다. 그후 그의 지도아래 길림성은 몇년간 이 종목을 틀어쥐여 1991년 남녕에서 열린 제4회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끝내 1등의 자리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한편 몇년에 한번씩 민족단결 선진단위와 선진개인을 선발해 전 성 각항 민족사업이 전면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끌었다.

김영준은 《민위는 소수민족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함으로써 당과 정부와 소수민족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진정으로 당과 정부에서 소수민족을 련계하는 교량과 뉴대 작용을 놀아야 한다》며 《민위는 소수민족의 집이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오로지 소수민족 간부와 군중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면이나 리해득실 같은것은 념두에도 없는 공명정대하고도 강직한 민족지도간부이다. 김영준은 《내가 하는 일은 어느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당의 사업이고 민족의 사업》이라고 떳떳이 말한다.

그는 《당은 가난한 빈농가정의 자식인 나를 지도간부로 양성했다. 이는 전적으로 당의 은덕이다. 오늘까지 사업상 성과가 좀 있었다면 그 공로를 전부 당과 인민에게 돌리고싶다》고 말한다. 그는 민족사업의 성과는 성직속 각 청, 국의 직접적인 관심과 대대적인 지원 그리고 진심으로 도와준것과 갈라놓을수 없다며 그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길림신문》을 통해 그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전한다고 밝혔다.

현재 위독한 병환에 계시면서도 그는 학습과 함께 스크랩 만들기가 여전히 매일의 필수과로 되여 시간에 쫓길 정도로 충실하다. 그는 부인 한복순과 세 딸과 사위, 손군들이 항상 켵에 있어 무엇보다 행복하고 무한한 힘을 얻는다며 가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내비쳤다.


길림신문 박명화 김정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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