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서 학부장을 맡아하다가 얼마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 현재 교수와 미술창작에만 전념하고있는 김동운씨의 화실도 여느 화가의 화실과 다를바 없었다. 잡다한 미술도구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고 그리다만 그림들도 여러 폭 눈에 띄이는데 수묵화가 주를 이룬다.
“저는 그동안 초현실주의 등 여러가지 풍격의 미술작품들을 창작해오다가 7년전부터 중국의 전통미술인 동양화의 여백미에 빠져 서양화의 기법을 수묵화에 접목시키는 의상(意象)미술작업에 심취하게 되였습니다.”
김동운씨가 다양한 창작풍격을 구사해온데는 그의 학업경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2005년, 불혹의 나이에 한국 덕성녀자대학교 대학원 서양미술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 그는 국내외의 유수의 대학들에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회화스찔을 추구하는 국내외의 저명한 교수들의 문하에서 회화기법들을 전수받았기때문이다.
1966년, 안도 명월진에서 출생한 김동운씨는 소학교에 입학하여서부터 안도현문공단에서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현문화관으로 다니면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동운씨가 11살 때 가족은 이도백하로 이사하였다. 이도백하는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풍경구라 전국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야외사생을 목적으로 몰려들었다. 김동운씨는 미술가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미술은 재간이 아니라 예술이며 작품에는 작가의 정신과 삶이 투영된다는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1980년, 로신미술학원의 조대균(趙大均), 허영초(許榮初) 교수가 이도백하에 와 로동자, 농민 등 어른들을 대상으로 미술강습반을 꾸렸다. 당시 16살난 김동운씨는 이미 월등한 재질을 보여 반장으로 천거되였다. 강습반을 거쳐 김동운씨는 영화관의 포스터까지 도맡아 그리는 이도백하의 꼬마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1982년, “10년동란”후 첫패로 모집하는 연변대학 미술학부에 입학한 김동운씨는 3년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모교의 미술교원으로 남게 되였다.
교단에 섰어도 김동운씨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간단없이 이어졌다. 1988년부터 1년간 로신미술학원에서 프랑스의 저명한 전업화가 클로드 이배르부터 계통적으로 초현실주의미술을, 1998년부터 1년간 천진미술학원에서 프랑스 빠리미술대학의 빈카스교수로부터 유럽의 전통유화기법을 전수받았다. 이 시기 김동운씨는 주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솟아나는 이미지를 그대로 기록하는 초현실주의미술작품들을 창작하였는데 반응이 좋아 각 미술관에 소장되기도 하였다.
김동운씨는 한국 덕성녀자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3년간 다양한 현대미술을 많이 접촉했다. 그는 미술관을 전전하면서 현대미술의 본질에 대해 캐고들면서 자신의 창작풍격과 창작진로를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현대미술의 홍수에 빠져들수록 중국의 전통미술에 대한 확신이 등대처럼 마음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귀국한후, 2008년부터 1년간 중앙미술학원 청년골간교사국내고급방문학자의 신분으로 서부지역의 운강석굴 등을 돌아보면서 전통미술에 대한 확신을 신념으로 굳혔다.
김동운씨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수십폭의 의상미술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자연의 드로잉”시리즈는 서울에서만 2차 개인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미술계의 호평도 잇따르고있다. 김동운씨의 작품은 웅혼하면서도 점잖아 보는이를 자극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검은색과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요모조모를 찬찬히 살피면서 작가의 마음자리까지 더듬어보노라면 어느새 산수를 향한 작가의 정신세계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김동운씨는 지금까지 중국, 미국, 일본, 한국 등 국가에서 개최된 20여차의 미술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짬짬이 시간을 쪼개 《소묘입문과 제고》, 《유화입문과 제고》 등 8권의 시리즈도서를 출판하였는데 베스트셀러로 인기리에 판매되고있다.
근 28년에 가까운 교수생애에 10여명의 석사연구생과 수백명에 달하는 본과생을 양성해낸 김동운씨는 행정사업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다보니 작품창작에 살손을 대지 못해 못내 아쉽웠다면서 창작에 대한 열망을 내비쳤다.
글/ 사진 김인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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