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인생을 녹여 연극을 만들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5월30일 16시14분    조회:535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허동활
살아있는 전설
인생을 녹여 연극을 만든 허동활선생
 

허동활선생은 연변의 연극사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저녁노을로 불리우고있다. 연극사업에 평생을 몸담고 배우로부터 연출, 연출로부터 단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조선족의 연극과 맥박을 함께 해온 허동활선생이 걸어온 연극인생을 더듬어본다.

연극과의 인연
허동활선생은 1925년 3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조양천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린 시절 그는 성격이 명랑하고 호기심 많고 마을에서는 재롱을 잘 피우는 장난꾸러기였다. 이렇듯 천진란만하던 남아가 연극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데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허동활선생이 열세살되던 해, 조선의 류랑극단이 마을에 왔다. 어느집 울안에 막을 치고 극을 놀게 되였는데 표 살 돈이 없고 또 조무래기들은 관람불허라 가만히 마당극 지붕에 기여올라가 배를 지붕에 딱 붙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다 보았다고 한다. 그것이 발각되여 이튿날 선생님한테 정갱이에 굴뱀이 가도록 회초리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은 굽히지 않았다.  1946년 일본 도꾜 고학까지 마친 허동활선생은 조양촌 허촌마을에 야학선생으로 활약, 해방을 맞아 첫 음력설을 즐겁게 쇠기 위해 학생들은 설맞이 오락모임을 가지자고 졸랐다. 소년시절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였다. 그는 밤을 패가며 연극대본을 만들어놓았는데 제목은 《해방의 종소리》였다. 허동활선생은 극에서 주역을 맡았고 무대장치 연출까지 맡아보았다. 마을의 남녀로소가 자신의 기쁨을 담아낸 연극을 보면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다. 허촌마을에서 재미있는 연극을 놀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허동활선생은 조양구 문예선전대의 배우로 뽑혔고 나중에는 연변문공단에 출근하게 되였다. 허동활선생의 연극인생은 이렇게 이렇게 시작되였다.

힘든 연극생애에서 보람을 느껴
“처음에는 흥취로 출발해서 연극이라는것을 했는데 연극을 하다보니 점차점으로 연극에 푹 빠져버렸는데 연극을 알게 되면서부터 연극은 고된 작업임을 실감하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실패’는 있어도 ‘포기’란 없습니다.”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재미로 시작했다가 연극에 푹 빠져 살아오기까지 허동활선생의 노력은 불철주야 멈출줄 몰랐다.

연극 《백절불굴》에서의 주인공 역, 《춘향전》에서의 리몽룡, 《심청전》에서의 심봉사, 《붉은 바위》에서의 허운봉, 《장백의 아들》에서의 박철 등 굵직굵직한 프로에서 주인공 역을 담당하면서 허선생은 참으로 많은 땀을 흘렸다. 심봉사역을 신통히 해내기 위해서 지팽이에 몸을 실은채 눈을 감고 극단에서 집까지 집에서부터 극단까지 밤길을 수없이 더듬으며 맹인의 세계를 체험했으며 항일영웅 박철의 영용불굴의 의지를 페부로 체험하기 위해 20여근 나마되는 철쇠를 발목에 채운채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터지도록 걸어보면서 박철의 혁명정신의 세계를 각색하였다. 또 이몽룡의 대사를 시를 읊조리듯이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 열번, 스무번의 연습을 달갑게 자진했으며 허운봉의 바위같은 사나이의 기백을 형상화하기 위해 가물거리는 초불을 지켜보면서 눈기운을 키우기도 했다. 이런 프로정신으로 각색한 인물들의 형상은 지금도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처럼 지극한 정성으로 형상해낸 백절불굴의 주인공역이 허동활선생으로 하여금 연극인생에서 자신의 재질을 충분히 과시하고 인정을 받는 첫 전환점으로 주역에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게 했고 《춘향전》에서의 리몽룡은 그로 하여금 전국연극예술절에서 3등상을 받아오는 영예를 지니게 했으며 성공한 연극인으로 통하는 터널을 뚫어주었다.

배우로부터 연출에로   
변화무쌍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허동활선생은 사업의 수요로 배우로부터 연출로 변신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연극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한 허동활선생은 들끓는 열정으로 연극에 혼신을 다했다. 번역장막극《뻐꾹새는 운다》로 시작하여 《잘 가라 꽃사슴아》, 《눈속에 핀 꽃》, 아동극 《우리 학교 철남이》 등 장막극 26부, 《량식》, 《새 조수》 《백절불굴》, 본보기극 편단 《홍등기》 등 20여편의 단막극과 본보기극 편단의 연출을 맡아 연출가로서 자기만의 독특한 풍격을 확립하였다.

처음에는 연출이라는 낯선 직업이 서두가 잘 잡히지 않았지만 허동활선생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서책을 뒤지면서 햇내기연출가의 열정을 불살렸다.

작품에 대한 침투와 극중 인물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이 결핍한 상황에서 허동활선생은 문제의 발원지를 찾아가며 생활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긴 탐구와 고심한 연구로 작품 《광활한 천지》가 허동활선생의 연출생애에 멋진 한페지를 남겼다.

“연극창조에 있어서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배우와의 작업과정에서 모순이 있을 때 가장 힘듭니다. 배우의 창조가 연출가한테 마음들지 않고 연출가의 계발이 배우에게 접수되지 않을 때 이 매듭을 풀어가는것이 연출가의 몫이자 고민입니다.”

배우의 리해정도의 차이, 리론접수력의 차이로 수차 계발을 줘야 접수할수 있었는데 그나마 무대에 오르면 또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배우들과의 거리단축이 어려우며 지어는 연습하다가 중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허동활선생은 배우들한테 배우들에게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허동활선생은 한 선배가 한 “연출가는 배우의 오늘을 책임지는게 아니라 래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 말을 참 좋아했다. 그러면서 늘 하는 구두어가 연출가는 배우한테 배역만 배워주는게 아니라 수양, 리론, 예술구도, 직업의식 등 경쟁의식을 심어주어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굴하지 않고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배우에게 가장 고민거리가 될수 있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연출가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고민을 해결할수 있는 그런 감정의 열쇠를 잘 찾아서 배우에게 준다고 한다면 배우는 그것을 받아가지고 자기 창조를 잘 할수 있거든요. 배우의 개성과 생활경력에 맞게끔 배우를 잘 인도해야지 기계적으로 똑같이 인도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중국연극 100주년 기념좌담회에서 허동활(좌 2) 방미선이 중국연극예술가칭호를 받았다.(자료사진)
 
리더의 책임을 다하며
1960년 허동활선생은 연변연극단의 부단장으로, 1982년에는 연변연극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였다. 단장시기 허동활선생은 연극사업에서의 비교적 성숙한 시기를 맞이했다. 배우시기 허동활선생은 극속에서 모든 행복을 느낄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장이 된후에는 과연 어떤 감수를 받게 되였을가?

단장은 극단의 호주와 마찬가지인데 그 당시 한 100여명 되는 그런 사람들을 이끌다보니 힘들었고 처음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단장공작을 잘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행정공작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극단의 설비와 공연무대는 아주 헐망했다고 한다. 허동활선생은 사처로 다니면서 설비개량비용을 해결하였고 무대를 개량하는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민족의 창작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직접 작가를 방문하고 창작회의를 열어서 작품을 선정하고 지어는 함께 수개하면서 차츰차츰 창작작품 공연회수를 늘리게 하였다. 허동활선생의 대담한 결책과 지도하에  연변연극단은 점차 민족 실정에 알맞는 많은 작품들을 내놓게 되였고 메마르던 연극문화가 차츰 꽃을 피우게 했다. 당시 창작작품의 주제가 정확히 농촌실정에 알맞는 극이였고 당시 농민들의 심정을 담은 극이였던지 많은 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허동활선생이 단장직을 맡은후 연변연극단은 련속 8년간이나 길림성 모범연극단으로 뽑혔고 허동활선생도 길림성운영회 대표, 성당대표,  전국문학 예술계대표, 주정협 위원 등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다. 허동활선생은 이렇듯 척박하던 연변연극계의 불모지에 새로운 희망을 개척하며 시대의 사명감을 갖고 한생을 달려왔다.

걸어온 연극인의 삶이 슬픔과 아픈 추억보다는 기쁨과 행복, 유쾌한 추억이 더 많은 허동활선생은 백세에 가까운 황혼이지만 지금도 가끔씩 눈을 감고 조선족연극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연극을 위해서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싶다고 말하는 허동활선생, 말의 무게와 책임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있는 진정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사진설명
허동활선생의 문집
허동활 방미선 중국연극예술가칭호를
《장백의 아들》, 《광활한 천지》
 
 
허동활 략력
1925년 3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출생
1946년 일본 도꾜 고학 졸업
1960년 연변연극단의 부단장
1982년 연변연극단의 단장
 
연극 《백절불굴》에서의 주인공 역, 《춘향전》에서의 이몽룡, 《심청전》에서의 심봉사, 《붉은 바위》에서의 허운봉, 《장백의 아들》에서의 박철역을.
번역장막극《뻐꾹새는 운다》로 시작하여 《잘 가라 꽃사슴아》, 《눈속에 핀 꽃》, 아동극 《우리 학교 철남이》 등 장막극 26부, 《량식》, 《새 조수》 《백절불굴》, 본보기극 편단 《홍등기》 등 20여편의 단막극과 본보기극 편단의 연출을...
 

연변위성TV (두만강프로)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44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20)   - 연변대학 미술학원 사진교연실 김광영주임 인터뷰     생존을 위한 개인적 영역 개척 필요 지난것을 보충, 거꾸로 갈수도 있어 재미있고 의미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이켜보면 변화가 가장 많은 부분이 오락이고 그중 단연 노래방이...
  • 2012-11-05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10) "붉은해 변강 비추네" 예술총감 박춘선을 만나   수년전 연변에는 두개 명함장이 있다는 말이 돌았다. 하나는 연변오동팀이고 다른 하나는 연변가무단이다. 오동팀은 최은택을 모시고 중국축구갑A리그 4강이란 위엄을 토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오동팀은 강급의 강력후보였...
  • 2012-10-26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 (4) 장익선  연변대학예술학원 장익선 음악학박사를 찾아서       음악 혹은 노래라함은 우리가 그림자처럼 늘 곁에 두고 함께 지내는 삶의  동반자와 다름이 없다. 특히 한많고 설음많은 우리민족에게 노래는 정서의 표현이요 심미의 발상이며 삶의 기록이라 하겠다. 머나...
  • 2012-10-22
  • 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2) 최룡국 부끄럼이 없어요 연변가무단 전임 악대 지휘 최룡국선생을 만나       오전 9시반경, 령하 13도… 립춘이 코앞까지 굴러왔는데도 마냥 포복행진을 하고 있는 날씨다. 하남가‘주부가원(州府嘉 )’정문에 들어서자바람 6동 아빠트를 찾아 좌우로 고개를 뽑...
  • 2012-10-22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수봉 박영만기자 = 흑룡강성 오상출신인 청도대학 음대 성악과 박주연교수는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전파하는 동시에 음악을 통한 나눔을 실천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있다.   박 교수는 상해음악대학에서 수학하고, 서울대학 음대 대학원을 졸업한 성악계의 재원이다. 서울대학 대학원 졸...
  • 2012-10-19
  • 국가1급무대미술설계사 김태홍화백의 작품세계   연변의 두번째 한락연 민족의 전통을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 생활은 모든 작품의 원천   김태홍화백 략력 1943년 흑룡강성 녕안 출생 1967년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설계학과 졸업 1967년~현재 중앙발레무극단 무대미술설계사 1984년 일본대학예술부희극연구소 특별...
  • 2012-10-18
  • http://hljxinwen.dbw.cn   2012-08-10 11:08:43             미국남가주대학 피아노학부 석사연구생 김은희의 이야기   (흑룡강신문=연변) 김명록 연변 지사장 = 지난 7월 초 , 미국남가주대학 피아노학부 석사연구생 김은희양을 인터뷰했다. 취재시에 김은희부모님들도 동석하여 김은희 ...
  • 2012-08-10
  • “장백산촬영가” 한영을 만나다 “사진작품은 유감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30년간 장백산을 촬영했지만 내놓을만한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장백산을 소재로 한 개인사진전을 열고 사진작품집 《격정의 장백산》을 펴냈으며 연변촬영가협회 주석 등 직을 지낸 한영선생이지만 겸손한 자세로 기...
  • 2012-08-09
  •   -서예학박사 조선족 서영근교수의 잊지못할 “통신학습”   지난 20세기 90년대초 한글서예로는 불모지대와 다름없는 연변에 서예에 심취해서 침식을 잊은 20대의 청년이 있었다. 굶주린 사람이 빵을 먹듯 서예에 대한 집착과 여러 대회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는 등 천부적인 소질로 주위의 이목을...
  • 2012-07-26
  •   공식석상에서 늘 빛갈고운 한복차림이였던것과는 대조적으로 인터뷰시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함순녀(48세)한테서는 차분한 카리스마가 풍겼다. 현재 연변가무단 부단장이자 연변무용가협회 주석인 함순녀는 오로...
  • 2012-07-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