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병에서 사단장이 되기까지
본인이 나이를 밝히지 않았더라면 50대초반으로 보일만큼 건장한 체구에 홍안의 모습이다. 짙은 평안도억양의 리정렬씨,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그는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고있기때문일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1952년, 심양시교의 대흥향에서 출생한 그는 “문혁”통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해 농사를 짓다가 운이 좋아 18세 어린 나이로 공군에 입대하게 되였다. 6개월의 교육기간을 마치고 곧장 비행장에 배치된 그날부터 비행기부품 익히기, 부품조립 그리고 정밀부품 수리작업 등 정비사로서의 길을 걷게 되였다.
“저희들의 업무는 24시간 긴장의 련속이였습니다. 수리를 마치고 비행기가 지상을 떠나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무슨 이변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당시만해도 부품에 하자도 많았고 기술도 낮았기때문에 비행기추락사고가 빈번히 일어났었습니다.”라고 말을 떼는 리정렬씨의 안색은 잠시 흐려졌다.
“문혁”통에 수리화지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리정렬씨는 자학의 길을 택했는데 하남성공군기계설비학원, 서안공군대학, 북경공군지휘관학원 등 전문대학의 교재들을 구해다 짬짬이 섭렵, 점차 리론과 실기면에서 탁월한 인재로 주목받게 되였다. 그 여력으로 그는 1975년에 분대장이 되였고 1978년엔 중대장, 1980년도에는 부대대장, 1985년도엔 대대장, 1989년도에는 퇀장이 되였다가 1993년도에는 사단장으로 승진하였다. 1995년도에 예편하면서 혜주시의 모 대형국유기업에 당위서기로 배치되였다. 해수로 26년간의 군생활이였다.
비록 직접 총을 들고 싸운것은 아니지만 지난 1974년도의 윁남자위반격시엔 접전지역과 가까운 해남도비행장으로 급파되여 하늘을 지켰다. 지방에 내려와 당사업을 맡은기간 군생활의 연장인양 규칙적인 복무자세로 일관, 그룹내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인물, 존경받는 인물로 대접받았다. 그러한 그에게 일감도 늘어만갔다. 처음 보직을 받고 왔을 때는 당위서기였던것이 나이가 들며 기률검사위원회 서기, 민병부 부장, 퇴직일군관리실 부장, 농촌공작대 대장 등 하루에 한시간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수 없을만큼 바쁜 일상을 보내왔다.
혜주 조선족체육대회의 숨은 공로자
리정렬씨가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와 관계가 시작된것은 지난 2006년도 혜주시에서 개최된 제2회 광동성조선민족체육대회 당시였다. 혜주시에서 개최한다는 원칙만 정해놓고 허가문제때문에 고심하고있던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임원들이 그를 찾아왔던것이다. 시정부 관계자들과는 전방위적인 교류관계를 맺고있던 리정렬씨였기에 허가를 쉽게 따냈고 장소문제도 발벗고나서 풀어주었다. 그 당시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회장직을 맡았던 최용균씨는 체육대회 개막식에서 리정렬씨의 공로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대중앞에서“련합회 고문”으로 추대한다고 공포했다. 그러나 리정렬씨 본인은 자격이 없다며 끝까지 고문직을 사양, 그러다가 지난해 혜주시분회가 창립되면서 현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리철호회장의 간곡한 부탁에 못이겨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고문직과 혜주분회 명예회장직을 수락하게 되였다. 그는 “리철호회장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조선족의 한 사람으로서 응당 련합회발전을 위해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뿐이죠. 지난해 정년퇴직 1년을 앞두고 저도 결심을 한바 있습니다. 뒤늦게 참여했지만 조선민족련합회의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나 최선을 다할 작정이였지요.”
1800년대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북3성 방면으로 이주해온 조선족의 력사를 더듬어 볼 때 그 시기를 1차 이주시기라 본다면 동북3성에서 이곳 광동 등 남방 도시로 이주한것은 제2차 이주시기로 보아야 마땅하다고 력설하는 리정렬씨는 조선민족의 우수한 두뇌를 활용, 반드시 현지에서 기업을 성공시켜야 하고 중국사회에서 조선민족의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뿐만아니라 훌륭한 조선민족의 문화적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함은 물론 기업인뿐만아니라 정계인사들도 많이 배출하여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27세때 친척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부인 김애월(심양 명렴가출신)녀사와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는데 지난해 결혼시켰다며 한시름 놓았단다.
“제 한평생은 긴장된 삶의 련속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되겠죠. 제 인생에 전반기가 군생활이였다면 중반기는 사회생활이였고 이제 퇴직후의 후반기는 헌신과 봉사의 삶으로 길을 열어갈가 합니다.”라며 조용히 자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의 모습을 조명하고있는 그에게서 뜨거운 민족애를 엿볼수 있었다. 사진은 지난해 혜주시조선민족련합회 창립대회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리정렬씨( 왼쪽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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