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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퇴화냐, 언어의 진화냐? (정인갑59)
2007년 10월 18일 15시 55분  조회:7470  추천:100  작성자: 정인갑

언어의 퇴화냐, 언어의 진화냐?
—《언어의 퇴화와 인간의 퇴화》를 읽고

정인갑


서영빈 교수의 많은 글들을 필자는 감명 깊게 읽곤 한다. 잘 씌어진 글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의《언어의 퇴화와 인간의 퇴화》 (이하 《퇴화》로 약칭함)만은 좀 음미해 볼 생각이 든다. ‘인간의 퇴화’ 문제는 참견할 수준이 못 되고 ‘언어의 퇴화’ 화제에 대하여서는 일가견을 말해보련다.

지금 서울 사람들은 漢語 ‘餡兒’에 해당되는 한국어를 ‘소’라 하지 않고 ‘속’이라 하고 ‘다르다’의 개념을 ‘맞지 않다’의 개념에 쓰이는 단어 ‘틀리다’로 표현한다. 하여《퇴화》의 저자는 개탄하였다:‘이건 분명히 언 어의 퇴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은 언어의 퇴화가 아니라 언어의 변화, 심지어 언어의 진화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첫째, 민중의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진화하지 퇴화할 수 없으며 또한 인위적으로 퇴화시킬 수도 없다. 중국 역사상 唐宋八大家가 고문 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지만, 그때도 민중의 언어는 엄청나게 변화, 진화하였지 추호도 퇴화하지 않았다.

‘餡兒’에 해당되는 우리말 어원이 ‘속’이므로 원래 ‘속’이라 하다가 ‘소’로 변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것을 다시 ‘속’이라 하여도 ‘소’가 ‘속’으로 발전한 것이지 퇴화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서울 방언에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속’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랴!

둘째, 언어의 변화 발전은 그 나라나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 발전의 중심지(이하 ‘문화소용돌이지역’으로 약칭함)가 이끈다, 이는 객관적 철의 규율이다.

漢語의 예로, 약 1,000년간 중국 동북부(개봉, 북경 및 남경을 연결하는 삼각지)가 변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 이 지역의 漢語는 북방 ‘오랑캐’의 말이 살판치어 엉망진창으로 망가졌으며, 또한 많은 학자들이 字書, 韻書들을 펴내 정통적인 漢語를 고수해보려 했지만 다 허사로 돌아갔다. 지금의 북경 방언은 漢語에 동화된 滿族의 口語이며 현대 표준 漢語는 이 ‘오랑캐’ 의 구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영어는 당연 영국식 영어가 정통이며 미국식 영어는 그야말로 ‘오랑캐’ 지역으로 이민간 쌍놈들의 말이다. 그러나 미국이 ‘문화소용돌이지역’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미국식 영어가 점점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서울은 조선왕조 이래 약 500년간 우리민족의 ‘문화소용돌이지역’ 작용을 하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조만간 서울말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연길에서 아무리 ‘소’, ‘치솔’, ‘웨치다’, ‘돈을 꾸다’고 해도 서울에서 ‘속’, ‘칫솔’, ‘외치다’, ‘돈을 빌리다’라 하면 무가내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언어 자체에는 是와 非가 없다. ‘約定俗成’이면 그만이다. 그 ‘約定俗成’도 ‘문화소용돌이지역’에서 인정받아야지 벽지의 인정은 무효다. 해마다 중국 조선족 언론 일꾼들이 서울에 연수가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퇴화》의 저자는 개탄할 것이 아니라 다년간 서울생활의 언어경험을 총화하여 중국조선족 언어의 발전을 잘 이끄는 것이 좋겠다.

셋째, 인류의 문화사를 보면 ‘문화소용돌이지역’은 언어를 포함한 문화의 변화 템포가 가장 빠른 지역이다. 이 지역은 모종 문화현상을 배출하면서도 또한 그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새로이 배출하기 좋아한다.

몇년 전 파리에서 시세에 가장 앞선다는 패션이 불과 1,2년 후이면 후진 옷이 돼 버리기가 일쑤다.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주현미, 최진희의 노래가 한창인데 서울에서는 이내 ‘할아버지 벌의 노래’로 돼 버린다. 명사 ‘복덕방’, ‘룸살롱’도 삽시에 ‘부동산’, ‘단란주점’으로 변해 버리고.

지금 서울에서 모음 ‘ㅓ’를 ‘ㅗ’에 접근하게 발음한다. 서술문인데도 술어부분의 억양을 상당히 높인다.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하지 말아’를 ‘그렇게 하지 말어’로, ‘그렇지 않아’를 ‘그렇지 않어’로 말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우리말의 모음조화 규율도 깰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간다. 광복 후 점점 변해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필자는 서울말이면 무작정 따르자는 뜻이 아니다. ‘속’, ‘틀리다’, ‘돈을 빌리다’, ‘ㅗ에 접근하는 ㅓ’, ‘술어의 억양을 높이는 서술문’, ‘…말어’, ‘…않어’ 등들은 A, 한동안 진통을 격다가 없어질 수도 있고—자생 자멸하고—B, 뿌리를 박고 표준어의 위치에 오를 수도 있다. A에 속하건 B에 속하건 모두 소용돌이 지역에서 빠른 템포로 나타나는 변화현상, 언어의 변화나 진화이지 퇴화가 아니다.

넷째, 언어를 포함한 모든 문화현상은 그 문화를 배출한 문화소용돌이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오래 남아있는다.

漢語 어음은 2천년간에 일사천리로 변하여 왔지만 중국의 외곽일수록 적게 변하거나 변하지 않았다. 옛 음이 많이 남아있는 방언이 粤, 閔방언이며 한국어 한자음은 더 옛날의 것이다. 중국 ‘문화소용돌이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세 한국어 '∆ [Z]' 음이 후세에 없어졌다. 그러나 함경도 방언에 그의 흔적(變種)이 남아있다. 이를테면 마슬(마을), 가슬(가을), 구시 (구이, 소나 말에게 여물을 주는 긴 그릇) 등이 그것들이다. 역시 ‘문화소용돌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말에서 ‘속’, ‘틀리다’, ‘빌리다’, ‘ㅗ음에 접근하는 ㅓ’, ‘술어부분의 억양을 높이는 서술문’, ‘…말어’, ‘…않어’가 뿌리를 박아 표준어 지위를 얻어도 기타 지역의 언어, 특이 중국 조선족의 언어에서는 상당히 긴 세월간 이를 접수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진화한 서울말(우리말)에 대한 ‘보수’, ‘守舊’로 밖에 풀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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