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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살고 싶다’와 ‘아, 죽고 싶다’
2006년 06월 16일 00시 00분  조회:4460  추천:83  작성자: 우상렬
‘아, 살고 싶다’와 ‘아, 죽고 싶다’

이 세상에 새빨간 거짓말 세 개 있다면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것과 장사치가 돈 못 벌었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가 죽겠다는 것이다는 것이다. 늙었으면 죽는 법인데도 죽기 싫어하는 것, 인간의 생명의식의 고양이다. 남자사형수가 사형을 당할 때 자기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경우도 학계에 이미 보고된 상식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생명의식에 공감한다.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종교의 존재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식이다. 인간의 생명을 신선이나 부처나 천당으로까지 연장하니 말이다. ‘好死不如懶活’, 개, 돼지처럼 어떻게 해서나 사는 것이 장땅, 오래 살다보면 신선도 되고 부처도 되고 천당에도 갈 수 있다는 착각, 이것이 우리 인간의 진면모다. 우리는 평시에 죽음을 떠올리는 화장터나 시체조차도 기피해왔다. 그리고 저주하는 말 가운데 ‘가서 썩어져라!’, ‘뒈져라!’, ‘꺼져라!’ 등 죽으라는 말에 가장 큰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제일 죽기 싫어하는 존재로 인간을 꼽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끈질긴 생명의식 때문에 인간은 먹을 것, 못 먹을 것 다 주어먹고 잡아먹고 만들어 먹으면서 오늘 이때까지 지구에서 가장 큰 군단을 형성해 오며 만물에 군림해왔다.

그런데 바로 이 생명의식의 뒤안길을 뒤져보면 인간에게는 분명 죽음의식도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의식이 인간의 드러난 의식(顯意識)의 세계라면 죽음의식은 인간의 잠재된 의식(潛意識)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평시에 ‘죽겠다’는 말을 참 많이 쓴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고와 죽겠다, 미워 죽겠다, 더워 죽겠다, 차거와 죽겠다, 바로 ‘죽겠다’는 말로 극한치를 나타낸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바로 인간이 자주 쓰는 관습어, 반복하여 쓰는 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잠재의식을 들여다본다. 인간이 바로 ‘죽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입에 올리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잠재되어 있던 죽음의식의 표출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본다.

생로병사, 자연의 섭리. 인간은 이 자연의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늙어가다 보면 면역력이 떨어져 병들고 병들어 고생하다보면 죽고 싶은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살아가다보면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 힘듬이 겹치고 겹칠 때 살기 싫은 죽음의 욕망도 생겨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자살이 이루어진다. 한국의 영화스타 이은주가 자살했을 때 당시 앙케이트 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잠재의식속의 죽음의식의 다른 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바로 숙명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초탈의 경지에서 홀가분하게 받아들인다. ‘돌아가셨다’, 죽음을 우리가 원래 왔던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한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긴다는 ‘視死如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에서 인간의 죽음을 위하여 마련한 신선세계, 열반세계, 천당 등도 결국 따져보면 죽음의 한 초탈경지를 마련하고 있다. 원래 없던 ‘나’라는 존재(無)가 생겨나(有)서 다시 원래 없던 ‘나’라는 존재로 돌아가(無)니 돌고 도는 자연의 순환이치에 귀의하는 天人合一의 경지가 따로 없다. 이로부터 우주자연과 더불은 생명의 영원한 존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無로 돌아가지만 그 대신 제2세, 제3세...의 ‘나’가 생겨나며 이 세상에 생명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것을 볼 때 죽음은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의 한 고리가 되겠다.

인생은 생명의식과 죽음의식의 교향곡이다. ‘아, 살고 싶다’와 ‘아, 죽고 싶다’의 교향곡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까지 ‘아, 살고 싶다’만 너무 의식하고 집착해온 것 같다. ‘아, 죽고 싶다’는 잊고 오다가 그것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는 당황해나기도 했다. 어쩌면 드러난 의식에서 고양된 ‘아, 살고 싶다’가

‘아, 죽고 싶다’를 잠재의식 속에 밀박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보면 잠재의식 속에 억압된 인간의 욕망들을 승화시켜 표출시킬 때 인간은 건강한 심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우리는 인간의 죽음의식도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떠올려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 개인은 유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 자살을 절대적인 죄로 보는 관점과는 달리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때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불교에서 대성한 스님이 자기의 죽을 시기를 알고 좌선한 자세로 열반에 드는 모습은 슬픔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거룩한 면이 있다.

불교의 한 교파인 라마교에서 죽은 시체를 칼탕쳐 영혼의 승화를 돕는 儀式도 무섭다기 보다는 인간의 죽음을 승화시키는 신성함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인간의 죽음을 슬픔보다는 천당으로 가는 축복된 것으로 찬송가를 불러주며 보내는 모습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의식의 한 표출이다. 일부 나라들에서 불치의 병에 걸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환자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는 것도 인간의 죽음의식 및 죽을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볼 수 있다.

잠재의식속의 죽음의식을 드러난 의식세계로 떠올리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맞이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도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아름다운 한 모습이다.

200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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