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somu00 블로그홈 | 로그인
림금산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문학작품

북방시인 최화길
2012년 12월 04일 14시 32분  조회:4770  추천:1  작성자: 구름바다
 
 
신-문학살롱 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시인 김응룡과 그의 일부 작품들을 살펴보았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흑룡강성 녕안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북방시인 최화길선생과 그의 일부 작품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겟는데요 오늘도 연변시가학회 림금산부회장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림-네,수고합니다.
신-최화길시인은 어렸을때 량 부모를 모두 여인 아주 불행한 동년시절을 지냈다고 알고있는데요 먼저 최시인의 략력부터 소개해주시죠
림—네
최화길시인은 1962년 12월 28일(음력) 흑룡강성 림구현 룡조공사 (진) 흥풍촌의 경주최씨가문의 장남으로 태여남. 불행하게도 어머니는 그를 낳고 별세. 아버지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그가 태여난후 한달만에 별세. 그러다보니 사실은 할머니가 12살까지 그를 키웠음. 어렸을 때 그런 내막을 알리없는 그는 할머니를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며 12살까지 자랐습니다.
1968년 3월부터 림구현 룡조공사 민주조선족소학교에서 5학년까지 다녔는데 그때가 1972년 5월이라 기억된답니다. 후에는 또 할머니의 사망으로 하여 그와 그보다 7년이상인 고모가 남게 되여 더는 그곳에서 생활할수 없는 상황, 하여 1972년 5월 녕안시 마하향 마련하촌에서 살고있던 큰아버지네 집에 얹혀서 살게 되였습니다. 그러니 1972년 5월부터 마련하촌조선족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공부는 남보다 좀 잘하는편이여서 선생님의 칭찬을 많이 받았으며 동네에서도 귀염둥이로 불리웠습니다. 그만큼 큰집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신—그렇다면 큰집의 인정은 어떠했습니까? 그 때 당시 말입니다.
림-네 그나마 큰집일가는 인정이 풋풋한 화목한 가정이기도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그의 5촌숙이였는데 그가 고아로 되는 것이 그렇다고 후사를 깨끗이 처리해주고 마을촌간부들과 토론하여 그를 맡아주었답니다.
큰집에 짐을 풀고보니 웬걸 그가 맏이였습니다. 원래 대학공부하느라 장가를 그의 아버지보다 늦게 드신 큰아버지다보니 맏아들이 9살이였고 아래로 6살에 나는 녀동생, 그리고 3살짜리 막둥이 이렇게 3형제였습니다. 자연 그는 큰형님이 되였습니다. 그때 그의 학습성적은 좋았습니다. 20여명이 되는 우리 5학년 기말시험에서 그는 총점 2등을 따내여 큰집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안기도 했습니다? 그후로 줄곧 2∼3등에서 벗어나본적이 없었으며 선생님들로부터 덕, 지, 체 모든 방면이 우수한 3호학생으로 평선되여 장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그래도 때론 눈치보이는 일도 있었겠는데요 특히는 큰 어머니한테는 더 어려웠지 않았을가요?
림—네 마침 큰엄마가 어려서부터 부모없이 자랐답니다. 하여  큰엄마는 그가 좀만 어색한 빛을 띄여도 인차 내속을 알아내여 따뜻한 마음으로 풀어주군 하였습니다. 눈치본 일도 있지요 돈을 달라할 일이 있으면 말하기가 좀 그랬죠 헌데 이때마다 큰 엄마가 눈치채고 그의 손을 펴주고는 그우에 동전을 올려놓아 주기도 했답니다….
큰집에 와서 3년만에 그는 초중졸업생으로 자랐습니다. 바로 역시 좋은 성적으로 녕안중학교로 진학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생활형편으로 그를 현성중학교에 보낸다는것은 정말 그림의 떡이나 다를바가 아니였습니다. 그때는 생산대별로 가을에 분배하게 되였는데 농사가 안된 해는 한공에 십전씩 차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일년내내 일해서 3백공을 벌었다 해봐야 겨우 30원에 맞먹는 돈이니 그 돈으로 쌀값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러하니 한학기에 입쌀 두마대를 내야 하는 현성중학교로 어찌 갈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또 억지로 떼를 쓸수도 없는 신분이다보니 그렇게 소원하던 현성고중으로는 갈수가 없어 향한족중학교밖에 갈수 없었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리념이 돌바위에 부딪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3년간의 향에서의 고중공부는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공부였습니다. 결국 아까운 황금시기를 한족말 몇마디 얼버무릴수 있는것으로 마무리게 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고중공부는 이렇게 시원섭섭하게 끝마쳤습니다. 
신-그렇다면 최화길시인은 어떻게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였습니까? 혹시 그가 문학을 하지않으면 안되는 리유라도 있었습니까?
림-네 할머니와 함께 있을때 어려운 식구들이 없는 그의 집이다보니 그의 집에는 매일 할머니의 로인친구들이 한구들씩 차고넘쳤습니다. 그는 아마 그 시절부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옛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감세계가 깃든 그 하나하나의 옛말들에서 그는 선한 사람에게는 복이 차례지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소박한 정감세계를 형성하였다고봅니다.
1979년 7월 그는 속에 별로 넣은것 없는 귀향청년으로 탈을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고중생이라고 촌에서는 막로동은 시키지 않고 농업기술원을 따라다니며 농업기술을 배우라고 배치하였습니다. 촌의 농업기술원이라야 논에 칠 농약을 비례맞추어 버무리고 치는 기술을 지도하고 함께 치기도 하는 체력로동이였습니다. 그러다 촌에 수도꼭지공장이 서게 되였는데 고중생인 그가 선반공의 적임자로 꼽혀 선반공으로 한 2년간 보내다가 그것도 경기가 시원치 않아 부도가 났답니다.
모든 아픔과 슬픔을 속으로 삭여야만 했던 그는 자연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 책읽기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여 그때 당시 중국청년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필독명작은 다 읽었으며 그것이 끈이 되여 문학작품이면 닥치는대로 읽었습니다. 오직 책과 동무할 때만이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이르게 쓰고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여 1980년 당시 《연변문예》잡지 제7월호에 풍자성을 띤 시《이런 간부 있다오》가 활자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불씨가 되여 나는 밤을 패면서 책을 읽었고 글을 쓰기에 여념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열광의 힘으로 그는 1983년도까지 시를 비롯한 통신, 수필 등 수십편이 해볕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등용하던 민영교원을 그는 시험이라는 절차를 빼버리고 합격하는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앉을 자리 설자리가 확실하지 못했던 그에게 어떤 집착을 심어주었던것 같습니다. 그 집착이 바로 문학에로의 집착이였겠지요 그 집착은 그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여 그의 불운을 메워주었으며 그에게 차례지는 모든 불합리와 불평등을 느긋이 짓밟아나갈수 있는 힘과 용기 그리고 분출구가 되였습니다.
 모두가 글을 써서 발표한 덕택이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과목은 소학교 5-6학년 한어과임 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된 교단생활이 오늘까지 꼭 29년입니다. 소학교에서 10년 민영교원으로 사업하면서 오상조선족사범함수 (84년부터 88년까지)를 졸업 1993년에는 오상조선족사범민사반에 시험쳐서 붙어 또2년간의 학습을 거쳐 1995년 7월 에 국가정식교원으로 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1996년 녕안시 성동향조선족중학교로 전근되여 초중 1, 2, 3학년 담임교원, 정교교연실 주임으로 발탁되여 사업하였습니다. 2001년 7월에는 연변대학조문전업함수를 졸업. 그 당해로 녕안시중학교로 전근되여 초중어문 교학으로부터 현재 고중 어문과임으로 줄곤 맡아(대학응시지도도)교학일선에서 사업하고있습니다.
신- 그가 문학을 시작할때부터는 또 독서도 많이 한줄로 알고있는데요 주로 어떤 책을 읽었습니까?
림-네, 책은 그의 창작에서 가장 기본적인 힘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시집은 닥치는대로 읽었고 그중 가장 인상이 깊은 시집들을 꼽는다면 “조기천전집” “김소월시선” “마야꼽쓰끼시집” “뿌슈낀시집” “김석정시집” “왕국진시집” “석무용시집” 등 국외 시집과 국내 조선족, 한족시인들의 시집을 섭렵했습니다. 소설은 “젊은 웨르터의 번민” “로빈손크루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두번째 악수” “청춘의 노래” “인간문제” “흙” “로신전집” “모순 3부작” “중국 4대고전명작” 등 자기취미에 따르는 소설을 섭렵.
신-그렇다면 최화길시인은 지금까지 어떤 작품들을 창작했습니까? 또 어떤 문학상들을 받았는지요
림-네 오늘까지 발표한 작품을 루계하면 시를 주선으로 수필, 동시, 가사 등 쟝르의 작품 500여수(편) 발표..
그중 각종 문학상 10여차 수상. 구체적으로 밝히면
1987년 시 “봄날의 사색”으로 흑룡강신문 “진달래문학상”
1995년 흑룡강조선족출판사 은하수잡지에서 공모한 겨레컵에 시 “우리동네 참모습”으로 3등상 획득.
동시 “별들의 이야기”로 한국월간아동 “백두아동문학상” (부상)을 획득.
2006년 시 “꽃(외2수)로 흑토문학상 시부분 대상 획득.
같은해 수필 “세월련가”로 길림신문 “미인송컵” 수필 은상 획득.
2005년 시집 “봄날의 사색”으로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우수상 획득.
2005년 연변작가협회 시분과에서 조직한 제 25차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에서 시 “무언”으로 가작상 획득.
2006년 한국 KBS에서 조직한 해외동포수기공모에서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합니다”는 수기로 가작상 획득.
이밖에도 동시 “해님의 낚시질”로 교원온라인글짓기경색에서 흑룡강지역 금상. 흑룡강성조선어방송국에서 조직한 “우리사는 세상”수기공모에서 련 3차 3등상 획득. 그리고 2006년과 2007년 련2년간 연변작가협회 선진창작자로 표창받았음.
신—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지금 어떤 직무를 맡고있습니까?
림—네, 연변작가협회리사, 목단강지구창작위원회 주임,
녕안시조선족문인협회 회장,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리사, 흑룡강성북방시회 부회장 등
 
림—그는 저한테 보내온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시가 아주 예리한 상대성을 띤다고 봅니다. 나의 시 한수 한수는 모두 나의 마음의 심한 갈등에서 불꽃이 튕기여 씌여지고 이어집니다. 그속에 바로 아름다운 공중루각이 서고 칠색의 무지개가 찬연합니다. 그것이 순간의 반짝임이지만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쏟아지는 긴 마음의 려과가 있다는것을 선언하면서 나는 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시도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고 떳떳이 선고하고싶습니다. 한것은 20여년간 눈길 한번 다른데 돌릴세라 변함없이 사랑하는 《랑군님》을 어떤 《아가씨》면 외면하고 돌아서랴!
모든 지배권에 대하여 전혀 흥취가 없는 나였지만 자신의 마음 지배권만은 꼭 잡고있습니다. 하기에 나는 떳떳하게 말할수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의 생명은 한줄에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다고.”
 
신—아 네 문학에 대한 집념이 아주 철저하군요 그리고 그 어떤 굳은 신념으로 안겨오는데요….
 
신—그럼 최시인이 가장 다루기 좋아하는 시적 제재로서의 평범한 나무에 대한 시 “나무읽기”를 먼저 감상하고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무읽기
            최화길
 
세월과 함께 오직 크기에 열중하는
나무의 조용하고 평범한 삶은
인생의 둘도없는 거울입니다.
 
흙과 물과 해빛 그리고
바람과 새와 달과 사랑 나누며
변함없는 지성으로 크는 나무
 
어디서 어떻게 태여났던지
원망없고 탐 없고 시샘 모르는
충성으로 아름다운 고매한 덕성
 
고독의 물안개 피여오르면
칠색의 무지개 떠올리며
참삶의 불길을 지피는 나무
 
언제 어디서나 거룩한 존재
나무를 쳐다보면 푸르는 숨결
산다는 의미를 즐기는 나무
 
슴슴한 일상을 깨워줍니다
무미한 살음을 불사릅니다
싱싱한 행복을 만드옵니다.
 
신-네 참으로 평범한 나무의 평범한 일생을 다루면서도 또 평범함속에 평범하지 않은 그 무엇을 안받침했다고 느껴지는데요 어떻습니까?
림-네 사실 이 세상 어디에나 흔하고 또 쉬이 우리의 눈으로 찾아볼수있는 나무를 적은 소박한 시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박하기 그지없는 나무일지라도 최시인의 시에 비친 나무는 그저 평범함을 떠나서 “언제 어디서나 거룩한 존재”인 나무로, “산다는 의미를 즐기는” 생명과 근원을 맺고있는 나무로, 자기의 삶을 “물사르는 나무” 즉 나무는 불을 피울수 있으니깐 자기를 불사르면서 온기를 세상에 남겨주는, 나중에 자기는 재로 남지만 …세상에 행복과 사랑과 따뜻함을 남겨주는 그런 나무로 한생을 마치지요
그리고 시에서도 얘기했다싶이 나무는 신분을 가리지 않습니다. 백두밀림에서 태여났는지 아님 어떤 이름없는 골자기에서 돋아났는지 출생에 대해 묻지않지요 그리고 욕심이 없습니다.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고 생활속의 부유함도 모르지요
지어 바위에 뿌리내렸던 사막에 뿌리내렸던 변함이 없고 요구가 없고 그냥 평범한 존재 그대로 자기로 자영분을 섭취하여 우로 우로만 뻗어나가는 그런 고매한 덕성을 갖고있는 나무입니다.
마치도 최시인의 일생이 그러하듯 엄마, 아빠를 잃고 할머니품에서 살때나 큰집에서 얹혀살때나 또 민영교원으로 있을때나 정식교원으로 있을때나 마련하에 있을때나 동경성에 있을때나 또 지금 녕안중학교에 있을때나 담임으로 있을때나 교도주임으로 있을때나 또 동경성성동에 있을때는 교장으로 발탁될번도 했지만 그냥 평범한 문학교원으로 일생을 불사르는 그런 자기자신의 인생과 나무의 일생을 대비적으로 쓴 감도 나고 나무이자 자신이고 또 자신이자 나무인 그런 소박미와 평범미가 이 시의 소중함을 더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말수도 적고 성품이 아주 소박하면서도 끈질고 근한 그런 소박한 분이지요 아마도 그 인간과 그와 맞먹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한다는건
 
아파트층계 입구에서 들려오는
내 발걸음소리 용케도 가려내는
그 자상한 고운 마음 잊기에는
그럴만한 리유가 없다.
 
검은머리 그 속에서 유표한
흰머리가 오리오리 늘어가고
아름답던 홍조는 퇴색하여도
변함없는 순정에 목이 메이는
그런 감동 무엇으로 밀어버리랴!
한송이 꽃으로 마음에 닿기에는
향기를 달여내는 기-인 과정
보이지 않는 깊은 숨김으로
연연한 그리움이 이여지는것.
 
사랑한다는건
무정한 미운 세월 밀어버리고
누가 보던 말던 상관이 없이
깊은 속에서 용암처럼 우러나
대신 아프고
대신 죽음도 감내할수 있는
그런 행위에서 정립합니다.
 
신-별로 자기가 친히 겪은 사랑을 썼지않았는가 생각되는데요
림-네 아마도 그런거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사랑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가정을 극진히 사랑하지만 입으로는 잘 나타내지 않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 안해를 사랑하고 가정을 끝없이 사랑한다고 봅니다. 저와도 아주 친한 사이인데 저도 그의 부인을 만나본적 있는데요 문학하는 남편을 아주 잘 받들어주고 묵묵히 말없는 푸른 잎같은 부인이지요…
아마 이 사랑시는 최화길시인께서 자기의 직접적 체음으로 쓴 시같은데요… “대신 아프고 대신 죽음도 감내할수 있는 그런 행위”가 그의 값높은 사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빠 엄마도 없고 할머니마저 없는 그가 가정을 이룬후에는 그 가정만이 자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만큼 속으로부터 뼈맞히게 소중하게 생각하는게 아닌가 쉽습니다.
 
너의 삶에 이름 바꾸고싶다
 
짓밟히고 씹히고 할퀴우며
온갖 수모를 체험하여도
오똑오똑 다시금 일어서는
저 여리면서 강잉한 잔디 앞에서
너의 삶에 내 이름 바꾸고싶다.
 
너와 별로 다름이 없으면서도
너를 아주 하찮게 여기는 사상들에
너는 너의 소박한 행위철학으로
참다운 삶이 무엇임을 세워주거니
너의 삶에 내 이름 바꾸고싶다
 
차례진 모든것에 이악스럽고
주어진 약소한것에 만족 느끼며
어제를 이어 오늘을 즐겁게 사는
쾌청한 네 삶의 행보를 보며
너의 삶에 내 이름 바꾸고싶다
 
종점까지 초지일관 시종여일 한
독할만치 린색한 너의 일정표
푸른 빛 한오리에 생을 바치는
심금을 울리는 무거운 멜로디
너의 삶에 내 이름 바꾸고싶다.
 
신—여리고 평범하고 또 또 하찮은 잔디에 자기이름자를 새기고 싶다는 참 진솔한 숨결이 풍기는 시같은데요
림-그렇습니다. 작디작은 평범하나 강직한 잔디의 생명을 자기 일생에 비유하고 또 그것으로 자기의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그 의지, 아마 이 시에서는 자기의 인생력사와 잔디일생의 비슷한 점을 골라서 잘 마무려 붙인것 같아요 “여리면서 강잉한 잔디”, “푸른 빛 한오리에 생을 바친다”는 잔디, “심금을 울리는 무거운 멜로디”라거나 또 “종점까지 초지일관 시종여일한” 잔디….
 
신-최화길시인에겐 또 희트친 노래 “엄마생각”이 있다는데요 일찍 엄마를 여읜 그가 어떻게 “엄마생각”이란 명가사를 썼을가요? 그럼 먼저 가사 “엄마생각”을 함께 감상하고 그 창작경위를 들어보도록 할가요?
 
가사
 
엄마생각
 
최화길
 
흙장난에 갈라터진 내 손목을 잡아쥐고
어머니는 호되게 호되게 때렸어요
흘러간 동년 그 시절 그리운 동년
그때는 그때는 정녕 몰랐습니다
아, 모진 엄마 아, 아픈 매가
모진 엄마 아픈 매가 그립습니다.
 
알사탕 사내라고 떼질쓰는 나를 잡고
어머니는 우시면서 우시면서 달랬어요
흘러간 동년 그 시절 그리운 동년
그때는 그때는 철부지 몰랐습니다
아, 못살던 아, 우리 엄마
한줌의 흙이 된 엄마가 그립습니다.
 
신- 참으로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는 명가사였습니다. 다른 가사와 다르게 가사언어가 아주 독특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안겨오는데요. 어떻게 “모진 엄마 아픈 매가 그립다”든가 또 마지막련에 “한줌의 흙이 된 엄마가 그립습니다” 고 썻을가요? 아주 독특합니다. 또 “알사탕사내”라고 우는데 함께 우시는 엄마죠 참 독특한 매력이 넘칩니다.
그렇다면 이 가사는 어떻게 창작되였습니까?
림-네
그의 엄마는 그를 낳은후 3시간 만에 사망. 그의 엄마와 아버지를 합장한 큰 묘가 있다. 장장 45년을 기록하는 묘이다. 어렸을적에는 할머님과 동행했었는데 할머님이 하도나 섧게 우시기에 그도 덩달아 따라서 울었다는 기억이 어슴푸레할뿐이다. 그만큼 그는 엄마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가 애절한 노래 《엄마생각》의 가사를 썼다니 아마 의심스러울것이다. 실은 그의 엄마의 원형은 할머님이다. 그는 열두살까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자랐다. 새파란 아들, 며느리를 앞세우신 할머님이고 보면 할머님께서 늘쌍 외우시던 말 그대로 할머님의 속은 재가 되였을것이다. 할머님께 있어서 기적같은 그의 생명은 금이고 옥이고 집안의 기둥이였으며 할머님의 전부이고 재속의 불꽃이였다. 그런만큼 그는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집안의 둘도 없는 《황제》였다. 밥식기, 흰빛. 할머님은 죽이나 물누룽지. 그는 완전히 할머님의 등에서 컸으며 할머님의 포근한 품에 꼭 안겨 시름없이 자랐다. 하지만 이것이 할머님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일자무식인 할머님이여도 사람됨을 가르치는데는 마음이 모질었다. 커서 꼭 《큰사람》이 되여야 한다는것이 할머님의 그에 대한 기대였다. 《큰사람》이 뭔지? 그때는 몰랐지만도. 그는 할머님의 손에서 크면서 이 말만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다. 그러기에 사람됨에 어긋나는 일에 대한 할머님의 요구는 더없이 엄하셨다. 가사에서의 “아픈 매”라든가 “모진” 등—엄한 교육-란 말은 아마 여기에서 나온같다. 집안의 《황제》로 컸던만큼 그는 어렸을 때 장난이 심한편이였다. 때론 싸우다 울며 집에 들어서면 할머님은 언제나 그를 품에 꼭 껴안아주시고 함께 우시던 기억… 하지만 절대 그를 두둔하거나 역성은 들어준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자기절로 자신의 행위를 검토하여 우렬을 깨치라는데서였을것이다. 그리고 울음이 잦아든 연후에는 꼭 이렇게 타이르셨단다. “매를 맞은 사람은 다리를 쭉 펴고…”자아위안 성분이 다분한 말씀이지만 할머님은 신조같이 믿으시고 그것을 은근히 그한테 물려주려 하였다.
60, 70년대초 흙장난. 흙으로 인형,흙다마 흙장난으로 손등이 갈라터져 피가 흐를 정도였다. 손이 갈라터진다고 저녁이면 꼭 오줌물에다 손을 씻어주군 하였다. 갈라터진 손등-오줌물에 씻고난 이튿날이면 손등이 별스레 보들보들하였다.
이 가사는 사실 할머니를 썼고 그 밑에 엄마없는 애가 엄마를 뼈에 사무치게 그리는 그 피같은 그리움이 받쳐져 있지요
아이를 낳고 3일만에 돌아가신 엄마와 알사탕을 사내라고 할수도 없고 또 그런 엄마가 아프게 때릴수도 없었거든요 이런 사실은 모두 할머니와의 사실임이 확연이 들어납니다.
12살부터 큰집에서 크게 되였다. 물론 큰집에서는 그가 불쌍하게 컸다고 큰아버지나 큰어머니는 나에게 각별한것만은 사실이다. 그 사랑은 친자식을 초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그때부터 빈구석이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적어도 엄마라는 부름을 더는 입에 올릴수 없었다. 그래서일가? 남들이 그의 앞에서 엄마라는 부를 때 그는 속으로 눈물을 떨군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큰집의 막둥이 동생이 큰엄마의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릴라치면 내 베개잇은 눈물에 흥건히 젖기도 했다.
그렇다, 엄마 있는 애들에게 있어서 엄마라는 부름은 그렇게 평범한 이름이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엄마라는 이름은 그토록 소중한것이였다. 이것이 바로 엄마 없는 그가 《엄마생각》을 쓰게 된 경우일것이다.
결국 그는 “엄마생각”이란 노래를 지어 실컷, 목이 터지도록 자기가 그렇게 부르기 싶었지만 못불러본 엄마를 부른 것이다.
 
《엄마생각》이 오늘까지도 그 생명력을 과시하고있는것은 이 노래가 그 뿌리를 어머님의   티없이 깨끗한 무한한 사랑에 두었기때문이라고 본다.
 
최화길시인은 저한테 보낸 메일에서 이렇게 적고있습니다.
“이 노래가 세세대대 전창되리라 믿고싶다. 이 기회에 가사 《엄마생각》에 날개같은 좋은 곡을 달아주신 김광일선생님께 머리숙여 심심한 사의를 표시하고싶다”
 
신-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여갑니다. 오늘은 북방시인으로 각광을 받고있는 녕안중학교의 최화길시인이 걸어온 문학로정과 그의 일부 시작품을 살펴보았는데요 아마도 최화길시인에 대해서 많은 료해가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림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림-네 수고많았습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2 ]

Total : 131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71 깊은 동시는 깊은척 하지 않는다--김정도 2014-08-02 1 1679
70 채마전의 숨결 2014-07-30 1 1792
69 2014-07-30 1 1555
68 에덴의 푸른 동산 2014-07-26 2 1573
67 살아간다는 것은 2014-07-24 1 1782
66 록차(绿茶)를 마시며 2014-07-23 2 1599
65 수필 옥천행 2014-07-22 3 1858
64 물의 세계는 우주만물 중심에 있다 2014-07-16 1 1731
63 수녀 (외1수) 2014-07-15 1 1670
62 내클리어(洗肠) 2014-07-10 1 1732
61 수필 팔공팔팔 ok! 2014-07-06 0 1762
60 리유가 필요없다 2014-07-03 1 1741
59 태양이 너무 찬란해 싫다 2014-07-02 0 1541
58 동시 2014-07-01 0 1667
57 엄마는… 2014-06-30 0 1476
56 아라랑 (조시) 2013-12-27 1 2012
55 <시> 오빠 2013-12-02 1 1939
54 <시 > 장모님 2013-11-28 0 2039
53 수필 여름과 가을의 길목에서 2013-11-02 0 1991
52 수필 어느날 갑짜기 시골이 그리워 2013-09-23 0 2151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