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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성
◇ 치열한 문화 성찰이 우리를 키운다
우선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문제가 그 파급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필자는 논의의 대상을 ‘중국 조선족’에 국한시킨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조선족은 근대 이후에 파란만장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다. 험난한 역사과정 속에서 조선족한테는 ‘생존’과 ‘적응’이 늘 주된 과제였으며, 오늘날에 와서도 조선족은 급격한 이동을 거치면서 새로운 환경과 삶에 적응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늘 역동적인 과정에 있다 보니 언제 차분히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문화적 DNA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발양해야 할 문화적 DNA는 어떤 것이고, 극복해야 할 DNA는 또 어떤 것인가?” 등의 자신을 통렬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역사적 과정이 굴곡적이고 역동적일수록 집단무의식 속에 집적된 에너지가 더 크다. 그러나 우리는 늘 눈앞의 생존에 얽매이다 보니 그 속을 한번도 제대로 파헤쳐 보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다 보면 “뿌리가 약한 집단”, “철학과 신념이 빈약한 집단”으로 전락되기 쉽다.
불운했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후세들을 지구촌의 당당한 일원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자신에 대한 치열한 문화적 성찰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적 근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한다.
◇ 조선족의 문화는 ‘약자형 문화’이다
문화 연구는 다양한 시각과 층위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집단무의식과 그에 의하여 발현되는 집단적 문화개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약자형 문화’라는 개념은 조선족의 집단무의식과 문화적 개성에 관한 일종 지칭이고 판단이다.
조선족의 ‘약자형 문화’의 특성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방면에서 쉽게 봐낼 수 있다.
첫째는 논리가 단순하고, 정의감이 강하다. 조선족은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 그리고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도 약자의 입장에 맞춰져 있다. 가령,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때리면 불의이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깔보면 불의”이다. 따라서 “약한 자와 못 가진 자”의 한계는 따지지 않고, “힘 있는 자와 가진 자”가 무조건 성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곰곰히 따져보면, 이러한 논리는 너무 단순하다. ‘정의’는 시시비비를 잘 따져 판단해야지 무조건 ‘강자’를 성토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또한 ‘정의’의 기준도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
따라서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정의관’은 시각적 편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늘 약한 자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보다 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단순해지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의 문화적 성장을 저애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다. 조선족과 많이 접촉해 본 타민족 인사들은 흔히들 조선족은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평가한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화를 내고 또한 쉽게 화가 풀린다는 것이다. 흥이 도도하여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다가도 금방 돌아서서 눈물을 짜기도 하며,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근하다가도 갑자기 수가 틀리면 얼굴을 붉히며 싸움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조선족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른바 ‘군자학’에서는 “마음을 다스려 평온한 심성을 유지”하는 것을 ‘성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조선족들의 심성이 즉흥적이고 감성적으로 발달되었다는 것은 삶의 환경이 안정적인 심성을 유지할 만큼 평온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오죽했으면 “안녕(安寧)하세요”가 만남의 인사말이 되었을까! 굴곡적인 역사적 과정이 ‘굴곡적인 성격적 기질’을 만든 것이다.
셋째는 성격이 급하고 표현 욕구가 강하다. 학술회의를 다녀보면 조선족 학자들이 많이 모이는 학술회의가 눈이 즐겁다. 남녀를 막론하고 옷차림이 세련되어 패션쇼를 보는 느낌이다. 게다가 표현 욕구도 강해 자기 주장을 펼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수수한 옷차림에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다 들은 후 느긋하게 발언을 하는 한족 학자들과는 대조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표현욕은 약자의 무기이다. ‘강자’는 자기 표현에 급해 할 이유가 별로 없다.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아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약자는 남의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에 표현을 통해 자기의 존재감을 알려야 하고 관심을 끌어야 하는 것이다. 조선족들이 ‘겉치레’를 좋아한다는 평가도 이러한 ‘표현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 ‘약자형 문화’의 배경
조선족의 집단적 기질에서 표현되는 ‘약자형 문화’의 특징들은 장기간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미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우리 문화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한반도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시종 대국을 옆에 둔 존재론적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근대 이전에는 중원과 북방의 강한 압력에 시달렸고, 근대 이후에는 동북아시아에 집결된 여러 강대국들의 틈새에 끼어 생존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한민족은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감을 상무정신의 발전을 통하여 해소하려 하지 않았고 불교와 유교와 같은 평화주의 사상으로 해소하려 했다. 그 결과 늘 시달림을 받는 쪽에 있어야 했고 그 과정에 ‘약자’의 집단무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족의 경우는 과경(過境)민족으로서의 불안정성 또한 갖고 있을 뿐더러 한술 더 떠서 피지배계급의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근대 이후 더욱 극심한 존재론적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면서 ‘약자형’ 집단무의식이 더욱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약자형 문화’의 특징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 ‘약자형 문화’는 양날의 칼이다
조선족의 문화적 특징을 ‘약자형 문화’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약자형 문화’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평화주의 사상,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오늘날 인류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초석으로 되는 것이다.
조선족은 이러한 사상에 체화되어 있어, 곳곳에서 인정과 배려로 남을 대한다. 따라서 어디로 가든 무난하게 적응하며, 사회적 적응 또한 빠르다. 그리고 어떻게 살든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정의롭게 살려고 한다. 조선족의 이러한 모습을 대개 타민족들은 “조선족은 자질이 높다”고 평가한다. ‘약자’로서 지켜온 따뜻한 심성으로 인하여 조선족은 미래 어디로 가든 쉽게 타자와 어울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약자형 문화’에 내재된 감성주의와 표현주의는 오늘날과 같은 서비스사회, 소비사회에 있어 진정 필요한 무형적 자산들이다. 인류사회는 이미 유형(有形)의 하드웨어 소비시대를 넘어, 감성과 미를 중요시하는 무형(無形)의 소프트웨어 소비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가령, 예전에는 돈 있으면 물건을 사는 데 열중했다면, 앞으로는 품위, 디자인, 심미적 체험, 취미생활 등 무형적 소비에 치중하게 된다. 노동력으로서 산업시대의 미덕은 체력과 절약이었다면, 소비시대의 미덕은 감수성과 표현력이다. 무엇을 하든 예쁘고, 품위 있고, 이로 하여 사람들이 감동 받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풍부한 감수성과 표현력은 앞으로 조선족에게 있어 굉장한 성장적 요인이 될 것이며, 자신 또한 이를 알고, 그 가슴에 묻혀진 기름진 옥토를 부지런히 개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약자형 문화’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 가장 큰 한계는 이른바 ‘정치’에 약한 것이다. ‘정치’를 잘 하려면 냉정해야 되고, 때로는 무자비하기도 해야 하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등에 ‘칼’을 꽂기도 해야 한다. 또한 희노애락이 쉽게 얼굴에 나타나지도 말아야 하고, 쉽게 속을 보여서도 안되며, 섣불리 나서지도 말아야 한다.
이러한 ‘정치’가 필요한 덕목은 ‘약자형 문화’가 가지고 있는 기질과는 가히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약자형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조선족이 정계에서 ‘꽃망울’을 피우기는 어려울 수 있다.
중국의 저명한 사회인류학자 비효통(费孝通)은 만년에 ‘문화자각(文化自覺)’이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그는 문화자각을 “우리의 문화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어 왔고, 현재에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로 해석한다. 즉 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자신에게 잠재된 에너지를 잘 발굴하여 미래를 위한 초석을 다지자는 것이다.
조선족도 이제는 차분하게 자신을 성찰할 때가 되었다. “수천 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하여 잠재된 문화의식을 잘 파헤쳐 현주소를 잘 알고 이를 미래를 위한 기초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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