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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했다. 둘째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 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올 뿐-
이 시는 거지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고 있을 것은 다 있었으나 아무런 도움을 못 준 자신의 행동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목 ‘투르게네프의 언덕’이 이 시를 시로 존재하게 한다. 내용은 시적인 면이 없다.
투르게네프가 지은 <거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
사족:
<참고>
투르게네프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그는 빨갛게 부풀은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는 투르게네프가 쓴 시 ‘거지’를 모티프로 하여 쓴 시이다.
작가는 화자와 세 명의 소년 거지 사이의 우연한 만남을 소재로 삼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괴리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과 번민을 형상화하고 있다.
투루게네프라는 철학가가 어느 겨울날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돈을 주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투루게네프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그 걸인의 더럽고 터진 손을 잡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걸인은 밝은 얼굴로 아니라고 선생님은 오늘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적선을 했다고 말한다.
▣ ‘투루게네프의 언덕’에 관한 배경 설명
윤동주는 투루게네프의 시 ‘거지’에 나오는 사이비 형제애,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해 반발했다. 그리하여 아무 손해도 없이 감사와 인심만 획득하는 투루게네프의 ‘거지’식의 자선이 지니는 자기 기만성과 부정직성을 폭로하는 작품을 써서 제목조차 ‘투루게네프의 언덕’이라 붙인 것이다. 특히 ‘투루게네프의 언덕’에서 굳이 ‘언덕’이라고 설정한 그 외조건이야말로 투루게네프가 그려 낸 값싼 온정 또는 자기도취가 그 미망을 벗어나서 극복해야 할 어떤 단계를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목적이 그러했기에 그는 작품 구도에서 신경을 썼다. 거지를 만났을 때도 다행히도 주머니에 ‘지갑, 시계, 손수건, ……’ 등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던’ 투루게네프 식의 상황 설정 대신에, 불행히도 ‘지갑, 시계, 손수건, ……’ 등 ‘있을 것은 죄다 있었던’ 상황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우리의 뿌리 깊은 가식과 헛된 이웃 사랑을 거침없이 조롱하고 풍자한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휴머니즘과 섣부른 휴머니즘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투르게네프와 윤동주의 산문시
이현우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김기림의 <길>이란 시처럼 단수필이 아닌가 할 정도로 수필에 가까운 산문시였다. 쉽게 읽혀질 뿐만 아니라, 단락마다 눈앞에 그림으로 펼쳐져 기억하기에도 좋았다. 게다가 읽으면 읽을수록 윤동주의 겸손된 마음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와 내 마음을 훈훈히 데워주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나는 윤동주시에 푹 빠져 살았다. 동족을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이국땅에서 죽어간 젊은 시인 윤동주! 누군들 그를 기리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란 제목이 계속 낯설었다. 윤동주는 왜 이 시에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디오게네스도 아니고, 거지 소년들을 본 것과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정말 아리송했다. 그러다가 투르게네프의 시 <거지>를 접하고서야 "아하!" 하고 무릎을 쳤다. 표절에 가까울 정도로 두 시가 비슷했다. 투르게네프의 시 <거지>가 결국은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에 연상작용을 불러일으켜 준 장본인이었다.
윤동주는 앞서 걸어가는 세 소년 거지를 보며 투르게네프의 <거지>를 떠올렸던 것이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파우스트> 등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투르게네프는 1000명이나 되는 농노를 거느린 대지주의 아들이었으나 평생 농노제를 증오하고 맞서 싸울 정도로 인간에 대한 그것도 약자에 대한 연민이 남달랐던 작가다. 1818년생이니 거의 200년 전 사람이요, 척추암으로 1883년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가 떠난 지도 100여 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는 윤동주에 의해 살아나고 독자들에 의해 거듭 부활하고 있다.
<거지>라는 작품에서도 그의 따뜻한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실화요, 시적 설정이 아님에 더욱 큰 감동을 자아낸다. 줄 것이 없어 거지 손을 덥석 잡아주며 용서를 청하는 대지주의 아들! 그리고 호주머니에 죄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지 소년들의 마음을 헤아려 선듯 건네지 못하고 있는 윤동주! 두 시인의 마음이 그들의 작품보다 앞서 내게 달려와 안긴다. 그들은 갔어도 그들은 시 속에 살아 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과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설득력. 그 속에서 시의 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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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윤동주 시인의 시는 보통 분위기나 어조가 감성적이고 무언가에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시는 뭔가 다르다. 화자는 찢어지는 가난함을 견디며 사는 어린 소년들의 모습을, 그저 건조하고 담담한 어조로 묘사할 뿐이다. 하지만 담담하기 때문에 이 시는 절절하고 슬프다. 원래 북받치는 감정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는 것보다 그냥 담담하게 말하는 게 더 절실해보이고 감동적인 법이다. 문득 노을이 지는 황량한 언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